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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추운 계절이 다가왔습니다. 이 맘 때면 누구보다 몸과 마음이 시린 이들이 있습니다. 바로 홀로 지내는 어르신들입니다. 이 분들에게 따뜻한 밥 한 그릇과 몸 누일 방도 필요하지만 더욱 필요한 것은 이야기 나눌 사람입니다. 긴 세월 이어온 그 분들 생엔 한 시대가 고스란히 스며 있습니다.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과 함께 그 분들을 찾아나섭니다. 어르신들이 들려주는 이야기 속으로 여러분들을 초대합니다. <편집자말>

지난 11월 26일 서울 서대문구 어느 식당에 어르신들 인생 이야기를 듣는 자리가 마련됐다.

 

주인공은 강삼순(72), 고재호(77), 박복례(80), 이금예(81) 어르신. 최근 <오마이뉴스> 지면을 통해 긴 인생을 털어놓은 분들이다. 사회복지법인 우양 사회복지사 세 명과 오마이뉴스 김혜원 시민기자가 자리를 함께 했다.

 

아들 얘기만 나와도 눈시울이 붉어지는가 하면 허리 구부러져 다닌다고 97세된 어르신한테 "젊은 사람이…"라며 타박 받은 사연, 개성 음식 자랑 등 이야기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즉석에서 <전국노래자랑>을 방불케하는 노래자랑이 벌어지기도 했다.

 

여든 나이에도 독일어와 컴퓨터가 배우고 싶다고 하고, 자기보다 어린 어르신들한테 밥봉사를 하면서 "뿌듯하다" 말하는 이 분들을 보면서 '인생'과 '행복'을 떠올렸다.

 

"나이 많다고 빨리 가는 게 아니야"

 

이날 모인 어르신들은 처음엔 서로를 할아버지, 할머니라 불렀다. 나이차가 최대 9살까지 났지만 겉으로 봐선 누가 위이고 아래인지 분간할 수 없는 상황. 어르신들도 마찬가지였던 모양이다. 나이를 확인하고 모두들 놀라는 눈치였다.

 

고재호 할아버지는 이금예 할머니 나이를 물어보곤 깜짝 놀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 표정이 익살스러워 모두들 웃었다. 이금예 할머니는 '최강 동안'이라 불릴만 했다.

 

박복례 할머니는 능숙한 외국어 실력을 선보여 주위를 놀라게 만들었다. '배움에 나이는 없다'는 말을 몸으로 보여주었다. 말 재치도 돋보였다. '여든이라 어르신'이라 했더니, 동네 아흔 일곱 된 할머니 이야기를 꺼내신다.

 

"우리동네 아흔 일곱 먹은 할머니가 있어. 날아다녀. 내가 허리가 아파서 구부리고 다니니까 새색시가 왜 저러냐고 그래. 새파랗게 젊은 사람이 왜 허리 고부라져서 다니느냐고. 열 입곱 차이 나니까 자기 눈엔 내가 새색시지."

 

이어 인생 경험이 깃든 말 한마디를 보태신다.

 

"감나무 봤지? 다 익은 홍시도 떨어지고 덜 익은 땡감도 떨어지잖아. 나이 많다고 빨리 가는 게 아니고 나이 젊다고 빨리 가는 게 아니야."

 

강삼순 할머니는 조용히 분위기를 즐겼다. 가끔씩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행동으로만 보면 제일 어르신으로 보일 법했다. 하지만 이날 막내는 할머니 몫이었다.

 

숫기도 없고 재주도 없다며 노는 것을 보는 것만으로도 즐겁다는 강 할머니다. 화장품 외판원을 하던 시절에도 10년 근속직원 잔치에서 노래 대신 벌금을 냈다면서 사는 재미라고는 애들 키우는 재미 밖에 모르고 살았다고 한다.

 

가마니짜기, 뜨개질, 영어 술술... 갑자기 벌어진 솜씨 자랑

 

치아 상태가 좋지 못한 어르신들이라 고기가 부담스럽진 않을까 내심 걱정했었다. 기우였다. 어찌나 잘 드시는지. 평소 고기를 즐겨 드시지 못한 탓이라 여겨 마음이 아련하다. 최근 생일을 맞은 분들이 몇 분 있었지만 모두 소리 소문 없이 조용히 넘어갔단다. 생일상 한 번 제대로 못받는 처지니 고기 구경이 쉽진 않았으리라.

 

고재호 할아버지가 "크리스마스 때도 먹을 수 있나" 묻는다. 함께 한 우양의 사회복지사가 설날 잔치가 예정되어 있다고 하자 너무 멀다며 실망하신 눈치다. 이금예 할머니가 "고기 먹으면서 벌써 다음 고기 먹을 생각하느냐"고 타박을 준다.

 

이날 모두가 모인 시간은 오후 다섯 시가 조금 넘은 시간. 아침만 드셨다는 분도 있고, 점심만 드셨다는 분도 있다. 어르신들은 듣도 보도 못한 요리를 즉석에서 만든다. 죽에 냉면을 만 것을 보고 "무슨 요리냐"고 물었지만, "맛있다"며 드신다. 고재호 할아버지는 저녁을 맛있게 먹기 위해 평소 드시는 라면도 안 드시고 하루 종일 굶으셨단다.

 

강삼순 할머니는 냉면을 한 젓가락도 대지 못했다. 찬 것을 못드시기 때문이다. 참 음식도 싫지만 찬 바람도 싫어하는 할머니다. 40년 전 산후조리를 잘 못해 얻은 산후병이 지금까지도 할머니를 괴롭히고 있는 것이다.

 

이금예 할머니는 반대다. 겨울에도 더운 물을 못마실 정도다.

 

음식 먹는 이야기에서 요리 이야기로 넘어간다. 주제가 요리로 바뀌자 이금예 할머니가 신이 나셨다. 동네서 노인정 음식 봉사를 하는 이 할머니는 음식 솜씨가 빼어나다는 개성 출신이다. 지금도 집에 맷돌과 돌절구를 놔두고 손수 음식을 만들어 드신다.

 

"맷돌에 천천히 갈아서 만든 음식이 맛있어요. 더디 만들고 더디 먹어. 그래서 내가 더디 늙는 것 같아."

 

요리 이야기는 냉면에서부터 인절미를 지나 묵, 부침, 식혜, 약식으로 이어진다. 자세하게 음식 만드는 순서를 이야기하는데, 요리에 관심 있는 이라면 귀가 번쩍 뜨이는 정보가 나오지 않았을까.

 

이 할머니 이야기는 가마니짜기 대회에서 1등 한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뿌듯했던 시절은 나이가 들수록 더 또렷해지는 것일까. 강삼순 할머니는 뜨개질이 장기다. 아이들 옷을 모두 다 떠서 입혔다고. 김혜원 기자가 "어린 시절 어머니가 옷을 만들어주시면 까끌까끌해서 정말 힘들었다"고 추억담을 말해 또 한바탕 웃음이다.

 

순간 박복례 할머니가 영어를 술술 말해 눈과 귀가 한 곳에 모인다. 치매를 막기 위해 열심히 배우는 중이란다. 일제시대를 거쳤기 때문에 일본어도 능통한 편. 중국어도 몇 마디 하신다. 외국어에 관심이 많다는 할머니는 몸만 아프지 않았다면 독일어도 배우고 싶었단다. 외국어 욕심이 끝이 없다. 노트북을 보고 호기심을 보인다. '노트북' '이메일' '로그인' '계정'과 같은 단어를 말해 깜짝 놀랐다.

 

지금은 사용하지 않지만 포털사이트 이메일 계정도 있단다.(oomydea.hanmail.net/ qhr2812.naver.com) 컴퓨터에 관심이 많았으나 한쪽 손가락이 펴지지 않아 결국 뜻을 이루지는 못했다. 왼쪽 손가락을 잡아봤다.

 

"걸레도 못 빨아. 그래서 동네아줌마들이 해주고 가잖아."

 

박복례 할머니에게 음식 이야기를 물어보니, "잘하는 건 없고 먹기만 잘한다"고 받아치신다. 농담을 좋아하는 할머니시다.

 

"한송이 떨어진 꽃을 낙화가 진다고 서러워마라"

 

고재호 할아버지는 벌써 소주 한 병을 비우고 두 병째 주문하신다. 술도 시원하게 마시고, 말씀도 거침이 없다. 머리에 쓴 모자에 '총무'라는 표시가 뚜렷하다. 동네 노인정 총무란다. "아무나 하는 게 아니"란다.

 

건너편 이금예 할머니는 민요교실 회장이다. 주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아무래도 이금예 할머니 노래솜씨가 궁금하다. 목소리로 봐선 한 자락 하실 듯 싶다. 거듭 부탁드렸더니 어느새  유성기에서 흘러나올 듯한 구성진 가락이 흘러나온다.

 

아니, 아니 놀지는 못하리라

한송이 떨어진 꽃을 낙화가 진다고 서러워마라

한 번 피었다

지는 줄을 가고 오는이 알건마는

모진 손으로 꺾어다가

시들기 전에 내버리니

버린 것 쓰라리거든

무심코 밟고 가니

핀들 아니 슬픈손가

숙명적인 운명이라면

너무도 아파서 못살겠네

얼씨구나 좋다 지화자 좋네

아니나 놀진 못하리라

 

'창부타령'이다. 최근 민요교실에서 배운 노래다. 흥이 난 이 할머니가 박복례 할머니를 부추긴다. 주현미 노래를 좋아한다는 박 할머니는 창부타령 다른 구절을 부른다. 이 할머니가 '얼씨구'하면서 노래평을 곁들인다.

 

"아 그렇게 하면 안돼요. 느려야 맛이 나. 아니 아니… 노지는 못하리라… 느리게 해야 맛이 나."

 

박 할머니가 인정한다. 원래 노래를 빠르게 부른다고. 이제 눈길은 강삼순 할머니에게 꽂힌다. 할머니가 수줍게 웃는다. 박 할머니 말씀에 또 한 번 웃음이다.

 

"젊은 친구가 한 곡해, 막내가 돼서"

 

뜸을 들이는 동안 이금예 할머니가 다시 노래를 부른다. "으악새 슬피우니…"를 지나 "우물가에 사랑 찾는 개나리처녀" "말없이 돌아와요. 사랑하고 있어요"로 쉼없이 이어진다. 어느새 노래는 세 할머니 중창이다. 한동안 분위기가 고조된 가운데 고재호 할아버지 노래를 듣고 싶다고 아우성이다. 이미 술 두 병째 드시고 더 이상 술이 없음을 안 할아버지는 약간 속상한 상태. 남은 술 한 잔 드리니 금세 얼굴이 펴진다. 그래도 노래는 다음에다.

 

"다음에 할 거야. 내가 준비를 해야지. 연습을 해야 하지 않겠어."

 

그리고선 또 노래. 동요 '산토끼'도 나오고 찬송가도 나온다. 민요 '태평가'는 절절하다.

 

"짜증을 내어서 무엇 하나, 성화를 받치어 무엇 하나. 속상한 일이 하도 많으니 놀기도 하면서 살아가세."

 

잠시 숙연해진 찰나 박복례 할머니가 영어로 '캐세라세라'를 부른다. 1절은 영어로 2절은 한글로 부른다. '캐세라세라'라는 부분에서 "될 대로 되라"라고 번역해 웃음이 '빵' 터졌다. 이 유쾌한 할머니들을 어떻게 말릴까.

 

이날 어르신들 나이를 모두 더하면 모두 310년. 그 오랜 세월 긴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두세 시간으로 가당키나 할까. 빨랫감 이고 한강 가서 빨래하던 시절, 일본 순사에게 우리말 쓴다고 매맞던 아픔, 월남전도 벌어지기 전 군대생활하면서 겪은 외로움 등 이야기는 끝이 없다. 그렇게 오늘 하루 긴 이야기를 들었다. 노래와 함께.

덧붙이는 글 | * 어르신들 친구가 돼주세요. 이 글을 읽고 어르신들에게 답글을 보내주세요. 사회복지법인 우양(www.wooyang.org/서울시 마포구 서교동 460-1, 02-324-0455)으로 후원을 보내주세요. 편지, 이메일을 보내주시면 어르신들에게 전해드리겠습니다. 한 끼 식사보다, 하루 잠자리보다 더 큰 선물이 될 것입니다. 더불어 우양에도 후원을 부탁드립니다. 


#이금예#박복례#강삼순#고재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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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아줌마가 앞치마를 입고 주방에서 바라 본 '오늘의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요? 한 손엔 뒤집게를 한 손엔 마우스를. 도마위에 올려진 오늘의 '사는 이야기'를 아줌마 솜씨로 조리고 튀기고 볶아서 들려주는 아줌마 시민기자랍니다.

공연소식, 문화계 동향, 서평, 영화 이야기 등 문화 위주 글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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