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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침마다 보았던 중촌리 풍경. 농약을 치지 않아 논에 뜸부기가 자주 나타나고 메뚜기들도 많았는데요. 마을로 들어오는 갓길도 보이고, 무척 평화롭게 느껴집니다.
 아침마다 보았던 중촌리 풍경. 농약을 치지 않아 논에 뜸부기가 자주 나타나고 메뚜기들도 많았는데요. 마을로 들어오는 갓길도 보이고, 무척 평화롭게 느껴집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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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복더위에도 새벽녘에는 이불을 덮어야 하는 경남 합천군 가회면 중촌리 하목마을, 문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아침 햇살은 반가운 소식을 전해주는 우체국 집배원 아저씨만큼이나 반갑고 따스하다. 장대비가 쏟아진 뒤끝이어서 상쾌한 기운이 몸으로 스며든다. 자리에서 일어나 쌀을 씻으러 샘가로 향하며 하늘을 보니까 언제 비가 왔느냐는 듯 높고 푸르다.

공연을 끝낸 가수가 빠져나간 무대를 연상시키는 산골마을의 아침. 자그만 고가(古家) 마루에서 바라보는 하늘은 잔디 운동장으로 느껴진다. 마을을 감싼 산들을 종합경기장의 관중석에 비유해보기도 한다. 하지만, 이곳은 쓸쓸한 운동장과는 다르다. 맑은 계곡물 소리와 이름 모를 새들의 지저귐이 조화를 이루는 축복의 광장이기 때문이다.

매일 반복되는 일이지만 오늘도 아침을 일찍 해먹고 설거지를 마쳤다. 호형호제하고 지내는 조씨의 자녀 영국이, 영미와 '단계' 장에 가기로 약속한 날이다. 대충 방을 치우고 잠시 상념에 빠져 있는데, 영국이와 영미가 물기 촉촉한 마당의 풀잎을 밟으며 들어온다.

"아저씨예, 오늘이 단계 장날인데예, 정말 우리랑 나갈랑교?"
"그럼, 함께 가야지. 나 혼자는 심심해서 자장면도 먹기 싫고, 장에도 가기 싫다···."

혹시나 해서 확인하러 온 모양인데 확실한 대답을 듣더니 활짝 웃으며 "금방 올께예!"라며 돌아간다. 뛰어가는 뒷모습이 무척 귀엽고 사랑스럽다. 나도 모르게 '아이들도 외출 준비를 하는 모양이네!' 소리가 나오면서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비가 조금만 내려도 넘쳤던 중촌리 목곡마을 입구. 자갈길에 시멘트로 범벅을 해놓아서 삭막하게 느껴집니다. 작년 9월에 갔었는데 물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오른쪽 작은 계곡도 사라졌더군요.
 비가 조금만 내려도 넘쳤던 중촌리 목곡마을 입구. 자갈길에 시멘트로 범벅을 해놓아서 삭막하게 느껴집니다. 작년 9월에 갔었는데 물소리가 끊이지 않았던 오른쪽 작은 계곡도 사라졌더군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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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버스 시간에 맞춰 영국이와 영미와 집을 나섰다. 마을 어귀는 황매산에서 폭포처럼 쏟아져 내려오는 물소리로 귀가 따갑다. 마을 뒷산 계곡물이 길을 넘치는 소리는 아직도 폭우가 쏟아지고 있다는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러나 영국이는 이틀만 지나면 괜찮을 것이라며 대수롭지 않다는 표정이다.

나와 영미는 넘치는 물을 겨우 피해서 건넜는데 영국이는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곳저곳을 돌아다닌다. 어디에서 구했는지 크고 작은 돌들을 낑낑대며 들어다 돌다리를 만든다. 영미는 오빠 행동이 당연하다는 듯 돌을 어디 어디에 놓으라며 코치를 한다. 자장면이 걸린 버스 출발시간도 아랑곳 않는 아이들을 지켜보다 작은 감탄사가 터진다.

영국이와 영미는 어떻게 해야 원만한 공동체를 이루고, 아름다운 사회가 조성되는지 말이 아닌 행동으로 나를 가르치고 있다. 남을 배려하는 생활이 몸에 익숙한 아이들이 대견하고 믿음직스럽다. 착한 일을 한다고 칭찬도 못하고 공사가 끝나기만 기다린다.

아이들이 말하는 소리도 빼앗아가는 계곡의 물소리는 하루를 시작하는 내 가슴으로 파고들고, 코를 찌르는 밤꽃 냄새와 밤나무 주변을 날아다니는 벌들은 평화롭고 한가한 산골 마을의 풍요를 한껏 노래하고 있다.

 마을에서 계곡으로 가는 비탈길. 20년 전에는 길이 좁고,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잡초가 무성했고, 무서움을 느낄 만큼 후미진 산길이었습니다.
 마을에서 계곡으로 가는 비탈길. 20년 전에는 길이 좁고,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잡초가 무성했고, 무서움을 느낄 만큼 후미진 산길이었습니다.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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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마에 땀이 맺힐 때마다 찾아갔던 계곡. 이곳에 몸을 담그면 송사리들이 몰려들어 친구가 되어주는데요. 그때는 송사리가 가장 고마운 존재가 되지요.
 이마에 땀이 맺힐 때마다 찾아갔던 계곡. 이곳에 몸을 담그면 송사리들이 몰려들어 친구가 되어주는데요. 그때는 송사리가 가장 고마운 존재가 되지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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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이었다. 마을 어른들께 인사를 다녀와 낯선 산골마을의 여름을 구경하는데, 작열하는 태양은 물기 오른 나뭇잎도 마르게 할 것 같았다. 동시에 시원한 계곡물에 풍덩 빠져들고 싶어졌다. 그러나 너무 조용하고 인적이 드물어 혼자 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해서 마당에서 풀잎으로 뭔가를 만드는 영국이와 영미에게 처음으로 말을 걸었다. 

"얘들아, 저 논 아래로 흐르는 계곡물이 좋다는데 같이 가자!"
"조치~예, 우리도 가자. 오빠는 안 갈랑가?"

영미는 기다렸다는 듯 반가워하며 오빠에게 같이 가자고 졸랐고, 영국이도 좋다면서 따라나섰다. 함께 뛰놀던 동무들이 마을을 모두 떠나고, 타지에서 이사 오는 사람도 없는데,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난 아저씨가 친절한 목소리로 함께 놀러 가자니까 반가웠을 것이다.

그러나 호된 신고식을 해야 했다. 계곡으로 향하는 비탈길을 걸어가다 갑자기 넘어진 것이다. 놀리려고 그랬는지, 기술을 자랑하고 싶어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길 양옆의 잡초를 엮어 놓은 것이었다. 잡초에 걸려 넘어진 나를 보며 웃는 아이들이 얄미웠다. 하지만, 순수한 표정에 마음이 끌려 하루를 즐겁게 보냈다. 

그 후 아이들은 계곡 어느 곳이 깊고 얕은지, 뒷산 계곡의 어디가 숲이 울창한지, 마을로 들어오는 길은 어디와 연결되어 있는지 등 꼭 알아야 할 기본 정보를 제공해주었고, 서로 필요하면 찾는 친구사이로 발전했다. 그렇게 어울리며 두메산골 생활의 참맛을 알았고, 지금은 혼자 다니면서 자연을 즐길 정도가 되었다. 

마을버스를 타고 가회면에서 내려 '단계' 장으로 가는 버스에 올랐다. 창밖으로 펼쳐지는 들녘엔 백로들이 평화롭게 날고, 어떤 놈은 피곤한지 한가로이 쉬고 있다. 창으로 들어오는 시원한 바람과 상큼한 들녘 냄새에 취해 눈이 사르르 감긴다. 뒤에서는 영국이와 영미가 무슨 할 말이 그리 많은지 웃으며 재잘대고 있다.

 단계면 길가 한옥. 조선 시대 한양의 양반가를 떠오르게 하는데요. 대부분 돌담인 게 특징이었습니다.
 단계면 길가 한옥. 조선 시대 한양의 양반가를 떠오르게 하는데요. 대부분 돌담인 게 특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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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남 산청군 단계 장날 풍경. 시골 아주머니들이 장을 향해 빠른 걸음을 하고 있는데요. 중앙지 지국 간판이 눈길을 끕니다. 전날 비가 내려서인지 우산을 하나씩 들고 있군요.
 경남 산청군 단계 장날 풍경. 시골 아주머니들이 장을 향해 빠른 걸음을 하고 있는데요. 중앙지 지국 간판이 눈길을 끕니다. 전날 비가 내려서인지 우산을 하나씩 들고 있군요.
ⓒ 조종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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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금 있으니까 영화와 사극 드라마에서 자주 봤던 한옥들이 보이기 시작하고, 길이 조금씩 넓어지면서 짐을 머리에 이거나 등에 지고 걸어가는 아주머니들이 종종걸음을 하고 있어 버스가 단계에 도착하고 있음을 짐작하게 한다. 

산청군에 속한 '단계'는 닷새마다 장이 서는데, 옛날에 양반들이 많이 살았다는 것을 증명하듯 흙벽에 기와를 얹은 돌담과 솟을대문의 한옥들이 자주 눈에 띈다. 타임머신을 타고 조선 시대로 돌아가 양반가를 걷는 기분이다.

사라져 가는 자그만 시골 장이어서 쓸쓸하고, 말과 풍습까지 달라 어색하다. 손님을 부르는 장꾼들 소리에도 전라도만큼 개운한 맛이 묻어나지 않는다. 이름도 모르는 생선도 보이는데, 크기만 했지 신선도가 떨어져 입맛을 달아나게 한다. 된장찌개에 넣을 호박 하나와 양파 몇 개, 흰 고무신 한 켤레를 사는 것으로 장보기를 끝냈다. 경상도 시골 장날을 추억하려고 아이들과 이곳저곳을 구경하다 보니까 허기를 느낀다. 마침 허름한 중국 집 간판이 눈에 들어오기에 영국이에게 물었다.

"영국아, 단계에 있는 중국집 중에 어디가 제일 맛있게 하지?"
"지는 잘 모르는데예. 영미 니는 아나?"
"나도 모른데이, 오빠가 모릉걸 내 어찌 아나!"
"하하..알았다, 그냥 저 집에 들어가서 먹자."

자매가 주고받는 대화에 정이 듬뿍 담겨 있다. 부모 농사일을 거들면서 학교에 다니려면 정신없이 바쁠 산골 소년에게 어리석은 질문을 했다는 생각에 웃음이 나온다. 식당에 들어서니까 판자로 짜놓은 테이블 서너 개와 찌든 춘장 냄새가 우리를 반긴다.

자장면 세 그릇을 주문하고 카운터 아주머니를 보는 순간 며칠 전에 생각했던 탕수육 생각이 삼십육계 줄행랑을 친다. '잘 알아보고 들어와야 하는데'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이미 늦었다. 기름때가 낀 옷차림과 손등, 누런 치아가 입맛을 달아나게 했던 것이다. 한쪽 구석에는 누렇게 변한 흰 고무신에 검붉은 얼굴의 40대 아저씨 둘이 빈자장면그릇을 앞에 놓고 단무지를 안주 삼아 소주를 마시며 뭘 따지는지 고성을 질러댔다. 

주방에서 '자장면 세 개요!'라는 소리가 들리기에 아주머니보다 먼저 달려가 쟁반을 받아왔다. 그러나 끈적거리는 나무테이블과 아주머니 표정은 젓가락질을 두세 번만 하게 했다. 자리에서 일어나 요금을 지불하고 영국이와 영미에게는 천천히 먹고 나오라고 당부하고 밖으로 나왔다.

마음은 상했지만, 왼손에 들고 있는 비닐 주머니 속의 흰 고무신을 보니까 조금 풀어지는 것 같다. '뭐든 새것이 좋다!'는 말이 떠올라 신발을 갈아 신었다. 발가락을 움직일수록 촉감이 부드러워 철없는 아이처럼 자꾸 움직여본다. 고무신은 잘 구입한 것 같다. 탕수육 사 먹을 돈은 두었다가 다음 합천 장날 아이들과 자장면이나 국밥을 사먹으러 나가야겠다고 생각하니까 입가에 미소가 지어진다.


#자장면#중촌리#단계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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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8월부터 '후광김대중 마을'(다움카페)을 운영해오고 있습니다. 정치와 언론, 예술에 관심이 많으며 올리는 글이 따뜻한 사회가 조성되는 데 미력이나마 힘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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