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용 생가에서 다시 만난 지용
육영수 여사 생가에서 정지용 시인의 생가는 멀지 않다. 도로를 따라 읍내방향으로 가다 청석교를 건너기 전 왼쪽 편에 있다. 지번 상으로는 옥천읍 하계리 39번지가 된다. 생가 앞으로는 시 '향수'에 나오는 실개천이 흐른다. 그러나 시에서처럼 실개천이 휘돌아 나가지는 않는다. 하천의 폭을 넓히고 직선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생가 뒤로는 2005년 개관한 정지용 문학관이 있다. 길 옆 '시인 정지용 생가터'라는 표지석과 시 '향수'시비를 지나면 왼쪽으로 사립문이 있다. 사립문에서 보면 두 채의 초가집이 남향하고 있다. 이 중 왼쪽이 안채고, 오른쪽이 창고가 있는 사랑채다. 안채는 방이 두 칸, 부엌이 한 칸이다. 이들 중 두 개의 방에 지용의 유품이 진열되어 있고, 사진과 시판이 걸려 있다. 유품으로는 책장, 옷장, 서랍장, 약장이 보인다.
서랍장 위로는 원통형 시판이 세워져 있고, 그 뒤쪽 벽에는 정지용 시인의 사진이 걸려 있다. 방 안에는 어디서 구했는지 등잔과 질화로도 보인다. 그리고 벽에는 지용의 시가 훌륭하게 한글 서체로 훌륭하게 표현되어 걸려 있다. '할아버지', '별똥', '호수' '고향' 등이다. 그런데 이들 시가 너무 짧고, 동시적인 경향이 강해서 아쉽다. 할아버지 할아버지가 담배ㅅ대를 물고 들에 나가시니, 궂은 날도 곱게 개이고, 할아버지가 도롱이를 입고 들에 나가시니, 가문 날도 비가 오시네. 일반적으로 지용의 시를 모더니즘으로 분류하는데 그러한 계열의 시를 걸어야 하지 않을까? 더 욕심을 부린다면 종교적이거나 동양적인 정서의 시를 한 편 보고 싶다. 지용의 시가 더 이상 동시 차원에서 머물러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기다림과 그리움 그리고 절절한 외로움을 표현한 시도 보고 싶다. 지용의 문학세계
정지용은 140여 편의 시를 남겼다. 그리고 『시(詩)의 옹호』, 『시(詩)의 위의(威儀)』, 『시(詩)와 언어(言語)』, 『조선시(朝鮮詩)의 반성(反省)』과 같은 시론집을 썼다. 그 외에 시론(時論), 서평 또는 예술평, 여행기 등 130여 편의 산문을 남겼다. 한 예로 '민족반역자 숙청에 대하여'라는 시론(時論)에서 정지용은 친일파의 숙청을 주장하고 있다. 이미지즘과 모더니즘으로 대변되는 그의 시 세계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이다. "친일파 민족 반역자의 온상이고 또 그들의 최후까지의 보루이었던 8·15 이전의 그들의 기구 -―이 기구와 제도를 근본적으로 타도하는 것을 혁명이라 하오. 혁명을 거부하고 친일 民叛徒 숙청을 할 도리 있거던 하여 보소." 또 '문인과 우문현답(說問答)'에서는 네 가지를 질문하고 네 가지 답을 적어 놓았다. 그 질문과 대답이 상당히 해학적이면서도 이지적이다. 이 중 두 번째와 세 번째 것이 더 재미있으면서도 의미 있다.
"설문 2. 結婚은 정말 戀愛의 무덤입니까? 답 2. 자연 그럴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警句가 어짠지 미즉지근해서 실습니다. 설문 3. 最後의 運命을 어데서 어떻게 마치시렵니까? 답 3. 妻는 내손으로 묻어주고 다음으로 내가 죽겠는데, 평생에 나의 罪를 들으시든 神父와, 친구 한 분과 아들 딸 앞에서 南窓에 해 빛운 날 오는 듯 가지이다." 이런 정지용의 시 세계는 시대별로 초기시, 중기시, 후기시로 나눈다. 휘문고보 재학시절부터 일본 도시샤(同志社)대학 졸업 때까지의 시가 초기시다. 대상의 묘사에 중점을 두는 이미지즘 계열의 시를 많이 썼다. 중기시는 1929년 귀국후 『정지용시집』을 간행한 1935년까지이다. 1936년은 정지용 시인에게 큰 변화가 있는 해이다. 북아현동으로 이사하고 아버지 정태국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이후 정지용은 시와 시론, 산문과 수필, 영시 번역 소개, 가톨릭 관련 잡지 기고 등 다양한 문학 활동을 전개한다. 이때부터 6·25사변이 발발하는 2월까지 그는 계속해서 시를 발표한다. 이 시기의 시를 우리는 후기시로 분류한다. 후기시는 초기시의 감각과 언어에 철학을 더했다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시대별 구분 외에 주제나 작가의식 등을 토대로 지용의 시세계를 모더니즘 계열, 종교적 보편주의 계열, 동양적 자아성찰 계열로 나눌 수 있다. 다음 시 '유리창'은 대상을 통해 자신의 마음을 닦아낸다. 일종의 자아성찰이다. 시어에 있어서도 충청도 사투리가 두드러진다. 어린거리고, 파다거리고, 백히고, 날러간다. 유리창 1 유리에 차고 슬픈 것이 어린거린다. 열없이 붙어서서 입김을 흐리우니 길들은 양 언 날개를 파다거린다. 지우고 보고 지우고 보아도 새까만 밤이 밀려나가고 밀려와 부딪치고, 물먹은 별이, 반짝, 보석처럼 백힌다. 밤에 홀로 유리를 닦는 것은 외로운 황홀한 심사 이어니, 고운 폐혈관이 찢어진 채로 아아, 늬는 산ㅅ새처럼 날러갔구나! 정지용 문학관의 모든 것
정지용의 삶과 문학을 알려면 정지용 문학관엘 들러야 한다. 문학관 입구에는 지용의 동상이 서 있고, 건물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오른쪽으로 지용이 의자에 앉아있다. 그래서 사람들이 지용의 옆에 앉아 사진을 찍어나 잠시 대화를 나눌 수 있다. 그리고 나서 사람들은 오른쪽으로 들어가 4개의 공간을 지나가게 되어 있다. 이들을 통해 우리는 지용의 삶과 문학을 알 수 있다. 우리는 이 공간으로 들어가기 전 영상실로 가 정지용 시인의 삶과 문학을 다룬 다큐멘터리 필름을 본다. 한 30분 정도 되는 영상물로 상당히 학술적으로 만들어졌다. 우리는 이 시청각 자료를 통해 정지용 시인과 가까워진 다음 전시공간으로 들어간다. 대부분 자료는 영상을 통해 들은 내용으로 새로운 것이 없다. 단지 정지용의 시집과 산문집 초간본을 만날 수 있고, 연구서들도 볼 수 있다는 게 의미 있다.
이들보다 오히려 내 눈을 확 뜨이게 하는 것은 비파도(枇杷圖)라는 한 폭의 그림이다. 청계(靑谿) 정종여가, 그리고 지용이 글씨를 썼다. 비파는 중국과 일본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상록 교목이다. 그런데 그림 왼쪽에 지용이 쓴 '필락경풍우(筆落驚風雨)' 다섯 글자가 기가 막히다. 두보가 '이백에게(寄李白)' 보내는 시의 3번째 행이기 때문이다. 두보는 이백의 신묘한 글재주를 다음과 같이 찬양하고 있다. 예전에 미친 듯한 객이 하나 있어 昔年有狂客 사람들은 당신을 선인이라고 불렀지요. 號爾謫仙人 붓을 놓으면 비바람도 놀라게 하고 筆落驚風雨 시를 지으면 귀신도 울게 만들었지요. 詩成泣鬼神 이제 지용의 시를 마음껏 불러주자.
이제 지용은 우리에게 아주 가까이 왔다. 방송을 통해 시도 때도 없이 지용의 시 '향수'가 흘러나오고, 학생들은 교과서에서 그의 시 '홍시'를 배운다. 또 대학에서 지용의 문학을 다룬 논문도 쏟아져 나오고 있다.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 지는 22년 밖에 되지 않았다. 1988년에야 해금되었기 때문이다. 정지용은 이제 매년 5월 그의 고향 옥천에서 개최되는 지용제를 통해 다시 살아나고 있다. 이때가 되면 수많은 사람들이 옥천에 모여 지용을 추모하고 노래한다. 문학행사, 공연 및 이벤트, 전시 및 체험행사 등이 열린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은 지용문학상 시상, 시와 관련된 행사다. 그리고 시가 있는 향수음악회도 아주 의미있는 행사다. 정지용 시인의 시에다가 곡을 붙여 부르는 일종의 경연대회로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다고 한다.
정지용은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50년 세상을 떠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그 후 38년 동안 우리 곁을 떠났다. 북으로 갔다는 이유로. 정말 그럴까? 많은 사람들이 의문을 가졌지만, 누구 하나 앞장서 외치는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시조차도 소리 내어 불러주는 사람이 없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자 그는 내게로 와 지용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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