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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새>는 오정희 작가의 첫 번째 소설로 1996년 6월에 초판을 발행, 지난 2009년에 개정판을 냈다. 이 책은 그간 6쇄를 증쇄해오면서 독자들로부터 꾸준한 사랑을 받아온 작품이다. '한국 문체 미학의 백미'로 손꼽히는 작품에 탄탄한 장편서사를 더한 작품으로 마니아층을 꾸준히 보유해 온 오정희.


'생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다'는 도발적인 말로 내 문학을 향한 열정을 부추기도 했던 작가 오정희는 1947년 서울에서 출생하였고 1970년 서라벌예술대학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1968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완구점 여인>이 당선되어 등단, 1979년 <저녁의 게임>으로 이상문학상을, 1982년 <동경>으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하는 등 각종 문학상을 수상한 바 있다. 소설 집 <옛 우물> 속에 실린 '중국인 거리'나 '유년의 뜰'을 읽고 또 읽었던 감회가 새롭다.


작가의 소설집으로는 <옛 우물>, <바람의 넋>, <불꽃놀이>, <유년의 뜰>, <돼지꿈>, <가을 여자> 등 다수가 있다. 교수 남편을 둔 작가, 여느 주부들처럼 남편과 아이들 뒷바라지하면서 어항 속 물고기처럼 나른하고 평화로운 삶을 살아온 건 아닐까. 자주 소설을 내지 않아 안타깝기도 했었다.


새, 버림받은 남매 이야기

 

장편소설 <새>는 오정희 작가의 여러 소설들 가운데서도 아주 탁월한 작품으로 부모와 사회로부터 버림받은 남매의 이야기다. 작가는 <새>를 주인공 '우미'의 관점에서 전개한다.  나는 이 소설을 몇 번이고 읽고 또 읽었어도 읽을 때마다 감회가 다르다.

 

오정희는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을 쓰게 된 배경을 밝히고 있다. '불우한 환경에 처한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한 자원봉사 프로그램에 참여했던 경험이 동기가 되어 씌어졌다'는 것. 소설에서처럼 부모와 사회로부터 보호받지 못하고 유기된 어린 남매를 정기적으로 만나는 일이 주어졌지만 나름대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참담한 실패감만 남았다'고 고백한다.

 

아이들을 맡으면서 어린 영혼을 침식해 들어오는 사악한 기운에 두려움을 느꼈고 작가 자신 안에 있는 허위의식과 세상의 불친절과 거절로 차갑고 기형적으로 단련되어지는 그들 모습을 속수무책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었던 참담한 심경을 토로한다.

 

'잠자는 우일이의 얼굴에, 빨간색과 파란색의 크레파스로 울긋불긋 그림을 그렸을 때 외할머니는 질겁을 하고 내 머리통을 후려쳤다. 이 망할 년, 잠든 사람의 얼굴에 그림을 그리면 잠든 사이 나들이 나갔던 혼이 제 몸을 찾아 돌아오지 못해 떠돌아다닌다는 걸 모르니? 엄마도 그랬나? 떠도는 혼을 찾아 나갔나?'(p7)로 시작되는 소설은 단숨에 독자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아버지한테 얻어맞아 얼굴에 푸른 무늬가 늘 생겼던 엄마는 남편의 상습적인 구타에 못 이겨 집을 나가버렸고 남매는 아버지 손에 이끌려 외할머니 집에서 외숙모집으로, 큰 집으로 옮겨 다니다가 다시 낯선 곳에서 아버지와 살게 되지만, 아버지가 데리고 온 황금빛머리털을 가진 여자가 집을 나가버리자 여자를 찾아 나가 돌아오지 않았다.그후 우일이와 우미는 둘이서 살아간다.

 

아주 갓난아기였을 때 3층에서 아버지가 던져버렸지만 나뭇가지에 걸려서 기적처럼 살아났던 동생 우일이는 키가 자라지 않는다. 너무 말라 가슴팍 뼈가 가늘게 휘어져 있는 아이는 밤마다 새가 되어 나는 꿈을 꾼다. 나는 연습을 하면 날 수 있으리라 꿈꾸는 우일이는 아무 데서나 뛰어내린다.

 

꼬마 주부가 된 우미는 밥을 짓고 고등어를 조리고 밥상을 차리고 우일이와 단둘이서 텔레비전을 보면서 밥을 먹는다. 구구단을 외지 못하고 숙제를 하지 않는 우일이를 손바닥이 터지도록 때리고 원산폭격을 시킨다. 두 남매는 소리 없이 치고받고 싸운다. 울어도 소리를 내지 않고 웃어도 소리를 내지 않는다. 

 

이틀에 한 번씩 우미를 찾아오는 상담어머니는 12살인 우미와 친해보려고 하지만, 불행을 연속적으로 겪어 온 아이들의 마음은 철문보다 높고 단단하게 닫혀 있어 좀처럼 열고 들어갈 수가 없다. 나날이 말라가던 우일이는 창고에 사는 집 나온 언니 오빠들과 어울려 다니느라 늦게 집에 들어오거나 외박을 하고 어느 날 밤늦게 들어와 누운 뒤로 싸늘하게 주검으로 변한다. 우일이의 주검이 해체되어가는 것을 지켜보면서 우미의 일상은 계속된다.

 

어느 해지는 저녁 무렵, 우미는 철길로 나간다. 아버지가 떠났던 철길, 노랑머리 여자, 연숙아줌마의 아저씨가 떠났던 그 길에 홀로 선다. '한 걸음씩 내디딜 때마다 어둠은 짙어졌다. 아버지는 이 철길을 따라 가면 세상 어느 곳으로라도 갈 수 있다고 말했었다. 아버지도 이 길로 떠났을 것이다. 연숙아줌마의 남편도 연숙아줌마를 버리고 이 길로 떠났을 것이다...'생각하며 더 짙어가는 어둠 속으로 발을 내딛는다.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가는 중

 

저무는 하늘로 작은 새들이 날아가는 철길 따라 우미는 어디로 갔을까. 그 어디에서 삶을 견디고 있을까?! 우리 사회엔 수많은 우미와 우일이가 있다. '세상의 불친절과 거절로 버림받은 아이들, 마땅히 받아야 할 사랑과 보호, 관심과 존중으로부터 내쳐진 아이들은 '문 없는 단단히 봉인된 방'과 같다. 보호의 사각지대에 놓인 청소년들과 어린아이들, 그 아이들은 늘 우리 가까운 곳에 있다.

 

어둡고 차가운 지하 계단에서 웅크리고 앉았거나, 거리를 배회하거나 아무도 관심 갖지 않는 곰팡내 나는 누추한 방에 웅크리고 앉아 있다. 위악에 찬웃음을 터뜨리며 거리의 부랑자가 되어 패거리를 이루어 절망에 찬 욕지기를 침 뱉어내며 치고받고 싸우고 있다. 버려진 건물에 들어가 본드를 흡입하고 어두운 밤거리를 폭주족이 되어 시한폭탄처럼 내달린다.

 

오래 전의 한 기억이 떠오른다. 그 아이는 양부모가 부부싸움 끝에 기름을 끼얹어 화재로 죽었고 누나와 형, 그리고 그 아이는 할머니와 함께 살았다. 아이들은 좀도둑이 되었고, 남의 집에 몰래 들어가 도둑질을 하고 똥을 누고 나왔다. 바깥에서 놀다가 시커멓게 때 묻은 얼굴과 허름한 옷을 입고 시내 곳곳을 안 돌아다니는 곳이 없었다. 학교에도 잠깐 다녔지만 적응하지 못하고 그만두었었다. 할머니는 별다른 벌이가 없어서인지 아이들의 도둑질을 묵인하고 있었다. 지금 생각해도 마음이 아픈 기억이다.

 

2010년 5월 4일, '보건복지부의 아동보호 조치현황에 따르면 2009년 한 해 동안 방치되거나 버려진 요보호아동수는 9028명에 이른다'고 한다. 2007년에는 8861명까지 줄었지만 2008년 이후 2년 연속 9000명 선을 돌파한 상태다. 매일 25명꼴로 아이들이 버려지고 있는 현실이다.

 

엄마의 부재, 아버지의 부재, 사회의 관심과 존중과 사랑의 부재로 삶에 내팽겨쳐진 아이들은 오늘도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날씨는 더 쌀쌀해지고 겨울은 눈앞에 있다. 옷깃을 여며야 하는 추운 계절이 다가올수록 우리 마음의 문을 열고 바라보아야 하리라.

 

"우리는 모두 매일매일 무엇인가가 되어가는 중이지. 너는 지금의 내가 되기 전의 나야. 아니면 내가 되어가는 중인 너라고 말해야 하나? 그래서 나는 너희들을 보는 게 무서워 견딜 수가 없어"(p73)라고 감자 눈을 파내면서 아버지의 여자가 우미에게 했던 말처럼 이 땅의 아이들이 그렇게 되지 않기를, 나지막이 기도해본다.

덧붙이는 글 | 책: 장편소설 <새>(개정판)
저자: 오정희
가격: 8,000원


오정희 지음, 문학과지성사(2017)


#오정희#새#문학과지성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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