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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륭전자비정규직투쟁 헌정사진집 <너희는 고립되었다>.(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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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택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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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으로 오래전 일이다. 20여 년 전 일이건만 아직도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1988년 17살 때, 나는 낮에는 공장을 다니고 밤에는 학교에 다니는 주경야독 생활을 했다. 지금은 거의 찾아보기 어렵지만 그때는 산업체 고등학교가 많았다.

형편이 어려운 사람에게 교육의 기회를 준다는 취지에서 만들어진 산업체 고등학교는, 저임금으로 학생을 부려 먹는 하나의 '족쇄' 같은 제도였다. 고1 때, 소위 '마찌꼬바'(일본말)로 불리는 소규모 공장에 다녔다. 직원은 사장을 포함해서 6~7명이 전부였고, 가끔 사장 부인도 일하러 오곤 했다. 이 회사는 마산에서 상경해 세 번째로 구한 직장이었다.

초등학교 4학년 때, 아버지는 재산은커녕 그때 돈으로 40만 원의 빚만 남겨놓고 간경화로 돌아가셨다. 한글도 모르는 엄마가 구할 수 있는 직장은 한정돼 있고, 게다가 자주 코피를 쏟아 병원에 가서 링거를 맞곤 했다. 엄마는 이웃들에게 돈을 빌려 빚을 갚고, 이웃에게 빌린 돈은 하루하루 일수로 갚아 나갔다. 사회생활을 전혀 해보지 않은 엄마가, 혼자 먹고살기도 어려운데 '딸린 혹'까지 있으니 얼마나 힘들었을까?

산업체 야간 여고생... 나는 '공순이'였다

그때 너무 철이 없던 나는 엄마가 그렇게 힘든 줄 몰랐다. 결국, 이듬해 힘든 생활고에 지쳐 엄마는 재혼했다. 그때부터 내 인생에 큰 변화가 왔다. 처음엔 아주 인자한 척하던 '영감'이 재혼한 지 한 달 후부터 본색을 드러냈다. 중학교 3학년까지 5년의 세월이 내겐 50년처럼 길고, 암울한 시간이었다. 잦은 구타와 입에 담기도 어려운 욕설로 사는 게 너무 지긋지긋하기만 했다. 그래서 중학교 때 어설픈 자살시도를 2번 했고, 가출시도도 했다.

중학교 3학년 겨울방학 때. 이 겨울만 지나면 나가겠다는 내게 새아버지는 "고등학교는 절대 보내줄 수 없다이. 함~부레 꿈도 꾸지 마라이"하며 '마산행'을 닦달했다. 16살 나이에 객지에서 혼자 산다는 게 너무 무섭고 암담하기만 했다. 그러나 집에 있는 것 역시 하루하루 지옥이었다. 그러던 중 산업체 고등학교에 함께 갈 친구 언니의 "마산에서 취직시켜 줄게"라는 말만 믿고 옷 보따리 하나 달랑 들고 무작정 마산으로 향했다.

그때, 함안에서 기차를 타고 오면서 세상과 부모를 얼마나 많이 원망했는지 모른다. 집에서 점점 멀어지는 기차 속에서 속울음을 삼키려고 어금니를 깨물며 속으로 엄마를 수없이 불렀다. 막상 마산에 도착하고 보니 직장을 구해준다는 친구 언니는 "다음에 기회가 되면 구해주겠다"며 다시 시골로 내려가라고 했다.

내게는 인생이 걸린 문제였는데 아무렇지도 않게 얘기하는 언니가 야속했다. 하지만 그대로 집으로 되돌아갈 수는 없었다. '굶어 죽든지, 얼어 죽든지 마산에서 죽을끼다'라는 독한 마음으로 우여곡절 끝에 셋방을 얻은 뒤 직장을 구하러 다녔다.

 제121주년 세계 노동절인 1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민주노총 주최로 열린 노동자대회에서 조합원들이 생활임금보장 및 최저임금 현실화와 노조법 전면 재개정 등을 요구하며 손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자료사진)
 제121주년 세계 노동절인 1일 오후 서울광장에서 민주노총 주최로 열린 노동자대회에서 조합원들이 생활임금보장 및 최저임금 현실화와 노조법 전면 재개정 등을 요구하며 손피켓을 들어보이고 있다.(자료사진)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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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들어간 직장은 직원이 30명 정도 되는 회사였다.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일당이 소위 '돈 내기식'이었다. 매일 생산 수량을 적고, 그 수량만큼 일당이 정해지는 거였다. 이틀을 일하다가 이렇게 일하다가는 한 달에 10만 원도 벌기 어렵겠다 싶어 그만두었다.

두 번째 들어간 직장은 직원이 40명 정도 되는 회사였다. 한참 일을 하는데 빤질빤질하게생긴 젊은 주임이, 내 옆에서 일하는 내 또래 애랑 얘기하면서, 어깨와 등 이곳저곳을 아무렇지도 않게 더듬었다. 옆에서 지켜보는 나는 속으로 기겁을 했지만 정작 그 애는 상냥하게 웃으며 농담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기겁을 한 것은 '돼지우리 같은 화장실'이었다. 현장에서 화장실이 정면으로 보이고, 문을 바로 열면 변기가 있는데 일어서면 상체가 드러나는 문이었다. 유리도 없고 그냥 뻥 뚫린, 가슴 위부터 상반신이 다 보일뿐만 아니라 밑으로는 발도 보이는 나무문이었다.

요즘 유치원생도 남들이 보는 데서 볼일을 안 본다는데, 여고생에게 그곳에서 볼일을 보라는 건 소, 돼지 취급을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또 청소를 자주 안 해 생리대가 휴지통에서 넘쳐 변기 주변에 수북이 널려 있기까지 했다. '아, 아무리 직장이 없어도 이건 아니다' 싶어서 하루를 다니고 그만뒀다.

그리하여 우여곡절 끝에 구한 곳이 앞서 언급한 세 번째 회사였다. 그때 일당이 3300원이고 토요일까지 만근을 하면 12만 원의 월급을 받았다. 그 시절 보통 월세방이 6만 원 선이었고, 라면 한 그릇이 500원 하던 때였다. 그러니 임금 12만 원 받는 생활은 무척 열악했다. 

너무 배고파 빵과 우유를 달라고 '투쟁' 했다

퇴근 후 학교에 갈 때, 환장할 만큼 배가 고팠다. 그러나 월급 12만 원으로 방세 내고 생활비를 충당하기 위해서는 라면값도 아껴야 했다. 그래서 사장에게 "빵과 우유지급! 일당 500원 인상!"을 내걸며 단체행동을 했다. 하루는 선배 언니가 "우리 단체로 한 번 회사 나오지 말아볼까?"라고 제안했다. 그래서 다음날 우린 모두 회사에 안 갔다.

 기륭전자비정규직투쟁 헌정사진집 <너희는 고립되었다>. (자료사진)
 기륭전자비정규직투쟁 헌정사진집 <너희는 고립되었다>. (자료사진)
ⓒ 정택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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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날 출근을 하니, 사장이 씩씩거리며 "뭣 때문인데? 솔직하게 말해봐!"라고 하기에 세상을 너무 몰랐던 나는 정말 솔직하게 얘길했다. 선배 언니는, 우리한테 당당하게 얘기하던 모습과는 딴판으로 아주 조용히 침묵을 지켰다. 솔직하게 대답한 나는, 본의 아니게 주동자가 되었다.

사장은 "빵과 우유는 절대 줄 수 없어! 그리고 일당 500원 인상하는 대신 월차수당 없애고, 하루 결근하면 삼일치 제한다!"라고 근로조건 개악을 선언했다.

그땐 사장 말이 곧 법인 줄 알았다. 또한 사장은 나를 응징해서 더는 권위에 도전 못하게 본보기로 삼고자 했다. 사장은 "넌, 이 사회에서 암적인 존재야! 너 같은 것은 말이야, 아예 그 싹을 잘라야 해!"라며 학교도 자르겠다고 협박을 했다. 

그때 유일한 꿈이 대학에 가는 거였다. 그것만이 '공순이'를 벗어나는 길이며, 행복한 삶의 기본 조건이라 생각했다. 중학교 내내 "너거 공부 못하면 공순이 되는 거 알제?"하며 선생님들이 늘 입버릇처럼 얘길했고, 친구들도 공장에 가는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봤다.

그래서 학교를 자른다는 말은 내게 사형선고 같은 말이었다. 서럽고, 애가 타서 꺼이꺼이 숨넘어갈 듯이 눈물이 났다.

"잘못했어요. 학교만은 자르지 마세요."

눈이 퉁퉁 부을 만큼 하루를 꼬박 울며 손이 발이 되도록 싹싹 빌었다. 지금 같으면 "그래, 잘라라. 까짓것 검정고시 치면 되지 뭐. 이판사판 육판! 어디 한번 붙어보자"하고 두 눈 부릅뜨고 바락바락 대들겠지만 그땐 야무진(?) 생각을 하질 못했다.

힘겨운 나날과 일상... 나는 공장에서 인생을 배웠다

얼마 후 다행(?)스럽게도 그 회사는 망했다. 자식 사랑이 유난했던 사장은 남의 자식 눈에는 피눈물 나게 독하게 굴더니, 1년치 퇴직금을 떼먹고 어디론가 잠적했다. 수소문 끝에 사장집을 찾아가서 단체로 퇴직금 달라고 항의했다. 또 "안 주면 노동부에 고발하겠다"고 짐짓 큰소리를 쳤다.

그런 내가 사장에게는 가소롭게 보였을 것이다. 사장은 "아주 중요한 서류가 있는데 그걸 니가 들고 갔제? 찾아내지 않으면 경찰에 신고할끼다"고 협박했다. 사장 서랍에서 내 도장을 꺼낸다고 잠시 열어봤는데 그걸 빌미로 '쇼'를 하는 거였다. 너무 억울했지만 "경찰에 신고한다"는 말에 기겁했다. 할 수 없이 눈물을 삼키며 피 같은 1년치 퇴직금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 모르면 이렇게 당하는 것이 세상이다.

 기륭전자비정규직투쟁 헌정사진집 <너희는 고립되었다>.(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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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택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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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빵과 우유'를 주는 회사로 옮기고, 그다음엔 점심까지 제공해주는 회사로 옮겼고, 드디어 지금의 회사로 옮겨서 20년째 다니고 있다. 그때 독한 사장 덕분(?)인지 본능적 감각으로 회사의 부당함이 보였고, 세상을 제대로 보는 눈을 일찍 떴다. 20대 초반에 노동조합 대의원 활동을 하면서 세상의 모순을 적나라하게 보았고, 나름 혜안(?)도 갖게 됐다. 

주변에 공장 다니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는 동료가 많다. 고등학교 시절, 인생의 낙오자인 양 벗어버리고 싶던 공순이 삶이 오히려 내겐 다행(?)이다 싶다.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는 이미 공장에서 거의 다 배웠으니까.

그리고 암울했던 지난날 역시 삶의 밑거름이 되어서 내 몫만 챙기는 이기적인 삶이 아닌, 주변의 소외된 이웃들에게도 관심을 두게 되었다. 그러나 참으로 안타까운 건,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노동자들은 여전히 힘들고 팍팍하다는 거다. 노동자는 정규직, 비정규직, 용역 등으로 세분됐고, '내 옆 동료는 곧 나의 경쟁상대'인 살벌한 시대다. 그래서 몇몇 동료는 자기가 피해를 볼까 봐 '알아서 기는' 경우도 있다.  

그런 동료를 지켜보면서 사람에 대한 불신이 들면서도 그보다는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네 모습이 안쓰럽다. 그래서 가끔 세상의 변화, 발전에 회의가 들기도 한다. 그러나, 지금 이만큼이라도 사는 것은 선배들의 '위대한 투쟁' 덕이라는 걸 늘 잊지 않으려 한다.

후세에 더욱 나은 미래, 아니 지금보다 더 낙후된 미래를 남기지 않기 위해서라도 안일하게 주저앉고 싶은 나를 채찍질해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이직 때문에 생긴 일' 응모 기사입니다.



태그:#이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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