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오래전부터 음악을 공부하고, 대학에서 학생들에게 오로지 음악에 관한 지식만을 가르쳐왔습니다. 지금은 평범한 주부이자 아이들의 엄마로 살고 있습니다. 지난해 10월, 여행을 좋아하는 남편과 함께 북한에 가게 됐습니다. 호기심으로 떠난 여행이었지만, 저는 처음으로 우리 민족의 비극적 운명과 민족애를 느꼈습니다. 동시에 통일에 대한 염원이 생기게 됐습니다. 2011년 10월 이후 지난 4월에 열흘 동안, 그리고 5월에는 3주 동안 나진·선봉을 비롯한 북한 전역을 여행했습니다. - 기자말
원산이 가까워질수록 자동차가 마차로 변하는 듯하다. '이랴, 이랴' 소리가 절로 나온다. 내 엉덩이가 적어도 30cm쯤 공중으로 마구 뛰어오른다. 포장도로지만 상태가 좋지 않은 것 같다. 설경이가 애처로운 눈빛으로 당황해 했다. 나는 "말 타고 신나게 달리는 기분이 이렇겠구나"라는 빈말로 넘겨 버렸다.
한 시간쯤 달렸을까. 원산시가 가까워지고 있는 듯했다. 사람들의 모습이 보이기 시작한다. 엄마와 손잡고 걸어가는 아이의 모습이 마냥 천진스럽다. 엄마는 한 손으로 뭔가를 머리에 이고 한 손으로 아이의 손을 꼭 잡고 있다. 그리고 등에는 따스한 밥을 해줄 모양인지 나무를 한 짐 등에 지고 부지런히 걸어간다.
어린아이는 쫄랑쫄랑 뛰듯 마냥 신나서 쫓아간다. 엄마 걸음이 급해 보이는 걸 보니 집에서 기다리는 아가가 더 있는 모양이다. 나도 엄마니 그 엄마의 마음을 느낄 수 있었다.
한 할머니가 구부정한 허리로 열심히 걸어 간다. 머리에 손도 안 잡은 채 보따리를 이고, 양 손에는 두 개의 꾸러미를 들었다. 그리고 등에는 국방색 개나리 봇짐을 메고 열심히 걸어가고 있었다. 아마도 예쁜 손주들에게 주려고 뭔가 잔뜩 이고 가나 보다.
갑자기 돌아가신 나의 외할머니 생각에 눈물이 핑 돈다. 나의 외할아버지께서는 당시 포항에 지역구를 둔 여당의 3선 중진 국회의원이었지만, 나의 외할머니는 인사차 찾아오는 지역 공무원들이 집안 하인으로 착각할 정도로 기운 옷에 컴컴한 새벽부터 해질녘까지 열심히 일하시던 분이었다. 외할머니가 우리집에 올 때면, 항상 뭔가 버거워 보이는 짐보따리를 이고 왔다. 바로 저 할머니처럼.
북한의 휴대전화 사업, 이럴 줄 몰랐네
앞에서 남편과 리만룡 안내원의 목소리가 들린다. 둘 다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들이라서 그런지 말이 잘 통하는 모양이다. 세상 경제를 논하고 있다. 게다가 마냥 심각하게 앞으로 남한, 북한 그리고 미국이 나아가야 할 방향도 모색하고 있다. 우리의 운전기사 당원 아저씨는 그 열띤 토론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안전 운행에 최선을 다하고 있다.
내 옆에서는 설경이가 속삭이며 전화하고 있다. 남자친구와 전화하는 것이 분명하다. 얼굴에 띈 미소와 나긋나긋 한 목소리가 이를 증명한다. 핸드폰 성능이 좋은 모양이다. 저렇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이는 데도 다 들리는걸 보니... 열띤 토론을 하던 리만룡 안내원도 알아 차렸는지 뒤를 돌아보며 설경이에게 말했다.
"목소리가 바뀐 것을 보니 남자 친구인 게지? 좋을 때다." 남편은 한술 더 뜬다. "내년에 결혼한 후에도 저 목소리로 전화 받을지 궁금해서 다시 와 봐야겠다"고 했다. 설경이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친구와의 전화 통화에 휴대전화 속으로 들어갈 지경이다. 북한에서 목격하리라 상상하지 못한 광경이다.
북한에 와서 놀란 것 중 하나가 바로 휴대전화다. 북한에 오기 전에는 언론을 통해 평양에서도 휴대전화를 쓴다는 이야기를 들었지만, 특수한 계층에 있는 극소수의 사람들만 가지고 있지 이렇게까지 일반화돼 있는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두 안내원은 물론 운전기사 모두 휴대전화를 갖고 있다. 2011년 10월 현재 가입자가 80만 명 정도인데, 연말께 100만 명을 넘을 것이라고 한다. 북한 인구가 2000만 명이 조금 넘으니 가구당 식구를 너댓으로 계산하면 대충 다섯 가구당 한 대를 가지고 있는 것 같다.
리만룡 안내원의 말로는 이집트의 오라스콤이란 회사가 휴대전화 사업을 맡아서 추진하고 있는데, 아주 빠른 속도로 가입자가 늘고 있단다. 그러자 남편이 곧바로 "이동통신 기술은 남한이 최고인데, 다른 나라 회사가 북한에 들어와 사업을 하고 있다니 안타깝다"고 말한다.
리만룡 안내원 또한 "네, 맞습네다. 북남이 서로 장단점을 보완해 협력하면 좋을 텐데..."라며 김대중, 노무현 대통령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꺼낸다. 우리가 남한 출신이라서 그랬는지 두 대통령에 대해 깍듯한 예의를 갖춰 이야기한다.
남자친구와의 통화를 마친 설경이의 말에 따르면 2011년 여름 북한에 엄청난 홍수가 있었으며 특히 곡창지대인 황해도에 피해가 막심했다고 한다. 국제적십자 대표단이 실태조사를 하고 있는데 통역을 위해 남자친구가 대표단과 함께 황해도 사리원에 가 있다고 한다.
당시 서울에도 우면산이 무너져 인명피해가 나고 북한에도 홍수가 났는데, 북한이 국제지원을 많이 받기 위해 피해를 과장한다는 뉴스가 떠올랐다. 설경이의 얘기를 들으니 내가 미국에서 뉴스를 보고 생각했던 것 보다 피해가 훨씬 더 큰 것으로 느껴졌다.
문득 '남북이 이제는 서로를 헐뜯는 비방은 하지 말아야 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서로의 아픔을 다독이며 통일로 나가야 한다는 생각을 북한 여행 이틀만에 하게 되다니... 소위 '꼴통 보수'라고 불리던 내 자신이 믿겨지지 않는다.
북한 아이들의 슬픈 인사 "헬로, 헬로"
원산 시내로 들어온 모양이다. 오는 길에 뜨문뜨문 지나쳤던 사람들이 이제는 많이 보인다. 내 눈에는 어디를 보나 같은 사람들처럼 보인다. 아마 비슷한 색상의 옷들과 비슷한 스타일의 모습을 하고 있어서 그런 것 같다.
원산시가 대도시 중 하나라고 하나 내 첫 인상은 어린시절 아버지를 따라가 본 충청도의 어느 조그마한 도시 같은 느낌이었다.
한 광장을 지나니 이곳에서도 초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학생들이 보인다. 앞으로 다가올 노동당 창당 기념일에 할 매스게임 연습에 한창이다. 제법 쌀쌀한 날씨인데 얇은 스타킹들을 입고 추운 줄 모르고 열심히 연습한다. 얼굴에는 장난꾸러기 아이들의 모습이 역력히 보인다. 조를 짜서 교대로 연습하는 것 같다. 쉬고 있는 아이들은 마치 소풍을 나온 것마냥 보따리를 열어놓고 친구들과 모여 도시락을 먹으면서 신나게 재잘거린다. 아침에 도시락을 싸며 아이가 맛있게 먹을 생각에 기뻐했을 엄마의 미소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우리가 탄 자동차가 지나가니 약속이라도 한 듯 일제히 손을 흔든다. 우리가 외국에서 온 손님임을 알고 반겨주는 듯했다. 우리의 얼굴은 분명히 자기네들 부모와 같은 생김새일 텐데 연신 "헬로, 헬로"라는 소리가 차창 너머로 들려온다. 깜짝 놀랐다. 어린 초등학교 학생들이 영어를 하다니...
설경이 얘기로는 북한에서도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를 배운다고 한다. 믿겨지지 않았다. '철천지 원쑤 미제국주의자 놈들'의 말을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다니.
스쳐 지나가는 우리 모습에서 그 어린아이들은 이질감을 느끼나 보다. 하기야 60년 세월 동안 멀디 먼 거리서 살던 사람들이 왔으니 우리를 낯설게 느끼는 것은 당연한 일일 것이다. 같은 언어를 쓰고, 같은 선조들을 모시고 있으며, 같은 역사를 공유한 우리인데 왜 이렇게 서로 멀어져만 간 것일까.
"헬로"라는 소리에 비탄의 눈물이 찔끔한다. 아마 우리가 타고 있는 차에 쓰여진 'Korea International Travel Company'(조선국제려행사)라는 영어를 보고 그랬겠지...
인민군을 보다 문득 아들 생각이 나다
차는 달리고 달려 조선국제려행사에서 직접 운영한다는 해산물 식당에 도착했다. 그곳의 식당 책임자로 보이는 한 아저씨가 "기다리고 있었다"며 반갑게 맞아줬다.
식당 안에는 유럽관광객 한 팀이 식사를 하고 있었으며, 우리를 위한 오찬이 차려져 있었다. 남편이 시원한 맥주를 곁들여 감자전을 한 점 입에 넣더니 탄성을 지른다. 어릴 적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의 어머니께서 만들어준 감자전과 맛이 똑같다며 말이다.
남편은 "그 친구의 부모님들은 함경도가 고향인데 한국전쟁 때 남쪽으로 피난 온 분들"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리만룡 안내원은 "지금은 행정구역상 강원도로 바뀌었지만, 여기가 예전의 함경남도"라고 답했다. 남편은 감자전만 세 접시를 비우고 나머지 음식은 제대로 손도 대지 못했다.
조개구이, 그리고 북한에서는 별미 중 하나라는 음식이 나왔다. '팔팔하게 살아서 아가미를 움직이는 가물치회'가 바로 그것. 나는 낚시광인 남편이 수시로 샌디에이고 앞바다에서, 때로는 멕시코 청정해역에서 잡은 활어회에 입맛이 망가져 있던 터라 먹는 시늉만 하며 인사치레를 했다. 그러나, 된장을 풀고 고춧가루를 넣어 끓인 가물치 매운탕은 정말 일품이었다.
다시 자동차에 오르기 전, 소화도 시킬 겸 식당 바로 앞에 있는 부둣가를 거닐기로 했다. 한가로이 낚시들을 하는 사람들이 보인다. 한 아빠가 아들에게 낚시 미끼를 끼워주면서 낚시하는 방법을 가르쳐 준다. 아이는 집중해서 아빠가 하라는 대로 열심히 따라한다. 흐뭇하고 보기좋은 장면이다.
내가 평소에 생각하던 북한사람들의 모습이 아니었다. 무엇이 이토록 당연한 부자의 모습을 보며 당황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을까. 내 머릿속은 마치 판단 오류 바이러스의 감염으로 정신이 혼미해져가고 있는 느낌이다.
자동차는 또 다시 남쪽을 향해 묵묵히 달린다. 몇천 번은 노래로 불렀을 <그리운 금강산>을 향해서 말이다. 차창 밖으로 내다보이는 동해 바다는 마치 그림으로 그려놓은 것처럼 아무 말이 없다. 너무 조용하고 잔잔해 숨도 크게 쉴 수 없을 정도. 모래사장은 붓으로 물감을 칠해 놓은 것처럼 깨끗하고 가지런하다. 모든 풍경이 그림 같다.
저 아름다운 그림에 심술 궂은 아이가 서투른 솜씨로 장난친 듯 바닷가 도로를 따라 쭉 쳐 놓은 철조망이 그림을 망쳐 놓았다. 원망스럽다. 그림처럼 평온한 풍경에 저 철조망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한다. 착잡한 심경에 마음이 터질 것 같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듯 운전기사 아저씨는 잠시 쉬어간다고 한다.
바닷가로 들어갈 수 있게 철조망이 쳐 있지 않은 곳도 있었다. 아름다운 그림속으로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림이 이내 살아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파도소리, 모래 밟는 소리, 사람들의 탄성 소리, 바닷새 지나가며 우는 소리... 모든 소리가 생동감 있다. 정말 아름답다. 내가 살아 숨 쉬고 있음에 감사했다. 철조망 너머 가까이 들어와 보니 이렇게 좋은 것을... 터질 것 같았던 마음이 조금은 후련해졌다. 그러나 여전히 내 마음 한 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이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의 정체는 무엇이란 말인가.
자동차는 슬프디 아름다운 동해를 끼고 금강산으로 다시 향한다. '통천'이라는 이정표가 보이자 리만룡 안내원이 "이곳이 고인이 된 현대 정주영 회장의 고향"이라고 설명한다. '그래서 고인께서 생전에 금강산에 관심을 두셨구나, 산수가 수려한 곳에서 태어나셨네'라고 생각했다.
어느새 어둑어둑한 시간이 됐고, 군인 아저씨가 지키는 검문소가 나왔다. 금강산에 거의 다 온 것 같았다. 검문소의 군인 아저씨는 텔레비전에서 보던 로봇 같은 살벌한 얼굴이 아니었다. 늘 봐왔던 숫기 없는 얼굴, 바로 우리 아들의 모습이었다. 늠름한 척, 씩씩한 척하지만, 내 눈에는 그저 대학교 근처 아파트로, 기숙사로 나가 있는 보고픈 내 아들들의 모습이었다. 이내 나의 마음은 저 아들의 부모가 됐다. 얼마나 보고 싶고 걱정이 될까. 가슴이 찡해온다.
"남조선 관광객들이 붐비던 시절이 꿈만 같습니다"
아린 가슴을 움켜안고 쓸쓸한 어둠 속을 10분 정도 달렸을까. 호텔 불빛이 보인다. 마음에도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한다. 몇 년 전 서울에 사는 엄마가 이모들과 함께 금강산 구경 가신다고 했을 때도 내겐 그저 노래 속에서만 존재하는 금강산일 뿐이었다. 노랫말이 현실 속에 존재한다는 것을 서서히 피부로 느끼고 있다.
호텔에 도착하니 말끔하게 정복을 차려입은 훤칠한 아저씨가 자동차 문을 열어주며 반갑게 맞는다. 그런데 말씨가 내가 기억하는 강원도 억양과 비슷하다. 아! 그렇구나. 남한이 지척이구나. 순간 설악산의 한 호텔로 착각할 지경이었다. 내 젊은 시절 친구들과 단풍구경 가자며, 가을바다 보자며 몇날 며칠 계획짜고 부모님께 허락을 받기 위해 단체로 의기 투합해 집집을 찾아 다니던 그 때 생각이 난다. 그 추억의 장소가 이곳에서 약 1시간 정도만 더 가면 된다니.
호텔은 나무랄 데 없이 깨끗히 정돈돼 있었다. 이 호텔이 현대 아산에서 리모델링한 호텔이라고 했다. 그래서인지 서울의 어느 호텔에 온 것처럼 친근하다. 고급스러워 보이는 샹들리에, 멋진 꽃장식들, 그리고 남한 스타일의 안내문들... 마치 순간 이동이라도 한 듯했다.
말쑥하게 꾸며져 있는 호텔 안은 너무 한산해 화려한 불빛이 쓸쓸해 보인다. 체크인을 하려고 기다리는 사이 몇십 명의 중국 관광객들이 들어왔다. 호텔이 생기를 띠는가 싶더니 이곳저곳에서 사진만 찍고 우르르 나가 버렸다. 잠은 다른 곳에서 자는가 보다. 다시 호텔은 침묵 속에 빠졌다.
우리의 짐을 들어줬던 아저씨가 말했다.
"원래는 남조선 관광객들을 위한 호텔이었는데, 관광이 두절돼 쓸쓸하게 텅 비어 있다가 바로 얼마 전부터 약간의 외국 관광객들을 투숙시키고 있습니다. 예전 남조선 관광객들이 붐비던 그 시절이 꿈만 같습니다. 너무나 그립습니다."진심 어린 눈빛 속에서 시간을 되돌리고 싶어하는 간절한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호텔 방으로 올라가는 엘리베이터 속에서 나는 흥분과 감회 속에 들떠 있었을 많은 사람들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우리 두 부부를 싣고 올라가는, 정성들여 치장한 이 엘리베이터는 마치 관객 없는 무대 위의 무희처럼 느껴져 측은한 마음이 든다.
방 안은 세련되면서도 말끔하다. 텔레비전도, 냉장고도, 욕실의 액세서리들도... 모두 친숙한 남한 제품들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들이 말할 수 없는 슬픔으로 어우러진다. 언제쯤이면 이 쓸쓸한 어우러짐이 완벽한 조화를 이뤄 한반도 전역에 메아리칠 수 있을까. 마음속 어렴풋한 소망이 절실함으로 내 심장 속에 파고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