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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지 국기. 피지의 어느 기념품센터에서.
피지 국기. 피지의 어느 기념품센터에서. ⓒ 김준수
남태평양에 위치한 섬나라, 피지. 호주와 마찬가지로 영국인에 의해 개척된 땅이었으나 1970년 영국으로부터 독립한 국가. 하와이와 더불어 한국인들의 신혼여행지로 각광받는 휴양지.

생애 한 번쯤은 꼭 가보겠노라고 마음먹은 곳 중 하나였다. '피지'하면 내게 떠오르는 이미지는 속이 훤히 비치는 에메랄드빛 바다와 해변가에 눈부시게 내리쬐는 태양. 여유롭고 근사한 분위기의 낙원같은 곳이었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나는 워킹홀리데이로 2년간 호주에서 지냈다. 비자가 만료되는 6월이 다가오기 전, 나는 긴 해외생활의 마침표를 어떻게 찍어야 할지 고민했다. 현지에서 만난 친구들은 대부분 귀국 전에 호주 인근, 혹은 자국 인근의 국가들을 짧게 여행하는 것을 택하는 편이었다. 그리고 나 역시도 마찬가지의 여행계획을 짜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호주 현지에서 만나 친해진 친구들이 내게 솔깃한 말을 해주었다. 내 비자가 만료되는 6월에 '2010 남아공 월드컵'이 열리니, 3개월간 유효한 여행비자로 체류기간을 연장하여 다양한 국가에서 온 친구들이 더 많은 호주에서 월드컵을 함께 보고 귀국하는 게 어떻겠느냐는 이야기였다.

나로서는 당연히 끌리는 제안이었다. 축구를 무척 좋아하는 나였고, 당시 내가 알고 지내던 독일·영국·브라질 친구들도 모두 축구팬이었기에 함께 월드컵을 보게 된다면 호주여행의 추억이 하나 더 쌓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연유로 내가 인터넷에 관련 정보를 검색하자, 호주 여행비자는 아무런 비용이나 제약없이 인터넷으로 간단하게 신청할 수 있다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단 한가지, 호주가 아닌 다른 국가에서 체류 중일 때에만 신청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나는 귀국길 여행일정을 조금 변경하기로 했다. 여행 기간을 대폭 축소하여, 일주일간 호주 인근의 피지를 여행하면서 호주 여행비자를 신청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소박하고 순수한 원주민들의 땅, 피지

 피지 외곽의 나마카 마켓.
피지 외곽의 나마카 마켓. ⓒ 김준수

 피지의 버스. 창문에 유리가 없는 점이 특이하다.
피지의 버스. 창문에 유리가 없는 점이 특이하다. ⓒ 김준수

공항에 내리자마자 남태평양의 무더위가 나를 덮쳤지만, 신기하게도 짜증스럽지가 않았다. 한국에 비해 훨씬 습도가 낮아서라고 공항에서 만난 셔틀버스 기사가 말해주었다. 내가 탄 셔틀버스는 숙박시설 측에서 제공한 것이었기 때문에 서비스 차원에서 에어컨을 틀어주었지만, 낮은 습도 덕분인지 도로에서는 창문에 유리가 없는 버스를 자주 볼 수 있었다.

또한 피지에서 내가 느꼈던 신선한 기분은 때묻지 않은 자연 덕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마치 산업화가 이루어지기 전의 한국이 이런 모습이었을까.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높은 건물은 찾아볼 수 없고, 낮은 건물이 듬성듬성 들판 사이사이에 서 있을 뿐이었다. 또한 공기도 물도 맑고 쾌적했다. 오염되지 않은 자연과 함께 숨쉬는 듯했다. 건물 외벽과 숙소 복도 여기저기 작고 귀여운 도마뱀들이 기어다니기도 했다.

피지의 자연환경에서 느낀 순수함은 현지 주민들로부터도 느낄 수 있었다. 국가산업에서 관광업이 차지하는 비중이 큰 것도 이유라고 할 수 있겠지만, 피지 사람들은 매우 친절했고 또한 전혀 가식적이지 않았다. 길에서 만난 사람들의 길안내, 호텔직원의 여행지 추천에서도 직업적인 말투나 자세보다는 마치 순박한 시골사람들같은 느낌이 풍겼다.

한번은 택시를 탔는데, 기사가 미터기를 멈추어 놓고 자신이 단골인 빵집에 잠깐 들러도 되겠냐고 물어오는 것이었다. 하루동안 여기저기 둘러보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던 나는 급할 게 없으니 그러라고 대답했다. 그랬더니 돌아온 택시기사가 나에게 갓 구운 길다란 바게트빵을 하나 건네어주는 것이 아닌가.

"이 동네에서 제일 맛있는 빵이라우. 하나 드릴 테니 맛보셔. 당신도 여기 살아보면 단골이 될 수 밖에 없을거라우."

나는 아직도 그 빵맛을 잊지 못한다. 포장되지도 않은 피지의 도로 위를 덜컹거리며 달리던 택시 안에서 먹던 바게트 빵이 사르르 입 안에서 부서지는 맛. 그 때 택시 안에서 빵을 먹었던 일은 사소한 것이지만 피지 해변의 눈부신 태양과 하늘빛 바닷물과 더불어 내게는 피지여행의 기억 중 한 부분으로 남아있다.

돌아온 시드니 공항, 나를 따로 불러낸 공항직원

피지에서 여유로운 일주일을 보내고, 그동안 인터넷으로 호주 여행비자를 신청했다. 이제 호주로 귀국해서 친구들과 유쾌하게 월드컵 경기들을 즐기는 일만이 남았다고 생각하니, 시드니 공항에 착륙하는 비행기 안에서 기분이 한껏 설렜다.

이미 워킹홀리데이 비자로 한 번 호주 입국을 경험해봤던 터라, 익숙하게 입국심사카드를 작성하고 대기줄에 섰다. 내 앞에 서 있던 사람들이 한 명 한 명 줄어들고, 이제 내 차례가 다가왔다. 여기를 지나고 나면, 수화물센터에서 내 짐가방을 찾아서 공항을 떠나면 되는 것이다. 나는 차분하게 웃으며 공항직원에게 여권을 내밀었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지난번에는 짧게 여권을 확인한 뒤 돌려주던 직원이 이번에는 한참을 여권을 들여다보다 수화기를 들더니 어딘가로 전화를 하는 것이 아닌가.

"미스터 킴, 잠깐 따라와주겠습니까?"

그 말을 듣는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난 분명 선량한 여행객의 한 사람으로서 지냈음에도 '내가 뭘 잘못한 건가?'하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수없이 던지기 시작했다. 혹시 수배자 몽타주에 나랑 닮은 사람이 있는 건가 싶기도 했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면서 직원의 안내로 나는 공항 입출국 사무소에 들어가서 앉았다.

'잠시 여기 앉아서 기다리라'는 말에 나는 불안해하며 의자에 앉아 호주에서 내가 보낸 2년을 돌이켜봤다. 아무리 되짚어봐도 문제가 될 일은 하지 않았다. 한국에서도 법을 어긴 적은 한 번도 없었다. 피지를 떠나기 전에 여행비자가 승인된 것도 확인했다. 그런데 왜….

내 사연을 들은 직원 "그게 불법체류자들의 수법입니다"

이윽고, 정장을 입은 여직원이 내가 있던 사무실로 들어왔다. 영문을 모르고 잔뜩 긴장해있던 그녀가 먼저 내게 질문을 던졌다.

"미스터 킴, 피지에 가서 여행비자를 신청했네요?"
"네, 제가 뭘 잘못한 건가요?"
"호주로 다시 돌아온 이유가 뭐죠?"

나는 내 피지 여행계획과 돌아온 이유, 즉 친구들과 월드컵을 보고 한국으로 돌아가기 위해서라는 설명을 했다. 그 중 한 명인 한국인 친구도 곧 비자가 만료될 예정이라, 월드컵이 끝나면 비슷한 시기에 같이 귀국할 생각이라는 이야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공항직원은 나를 못미더운 눈빛으로 쳐다봤다. 내가 왜 굳이 호주 인근의 국가에서 잠시 체류하다 돌아온 것인지 이해하기 힘들다는 눈치였다. 내가 설명한 친구들에 대한 이야기도 못 믿는 듯했다.

"미스터 킴, 당신이 한 일. 그러니까 뉴질랜드나 피지, 인도네시아 같은 호주 주변국에 잠시 다녀와서 여행비자로 체류기간을 연장하는 것. 그게 전형적인 불법체류자들의 수법입니다."

내 귀로 들은 말을 의심했다. 내가 불법체류자라고? 호주에서 지내며 1년간 일하던 업체의 그리스인 사장으로부터 '4년 동안의 노동비자' 제안도 거절했던 나였다. 단지,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에 친구들과 월드컵을 보려던 게 이런 오해까지 낳을 줄은 꿈에도 몰랐었기에 무척 당황했다.

결국, 나는 곧 비자가 만료될 내 친구와 그 직원을 전화연결해서 내 말이 거짓말이 아님을 입증해야만 했다. 또한, 앞으로 일하지 않아도 3개월간의 체류기간 동안 지낼 수 있을만큼 넉넉한 자금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 위해 통장잔고까지 보여줘야 했다.

마침내 가까스로 나의 호주입국은 허용되었다. 담당직원으로부터 "앞으로 호주에 여행비자로 재입국은 안 됩니다, 그 조건으로 입국을 허가하겠습니다"라는 씁쓸한 말을 들은 이후에.

호주정부가 급증하는 불법체류자들 때문에 출입국시 강경한 정책을 펴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2년 동안의 즐거웠던 호주생활을 마무리하는 시점에서 공항직원에게 불법체류자 취급을 받아야 했던 일은 웃기면서도 슬픈 기억으로 남을 것 같다. 억울함에도 경황이 없어서 끝내 외치지 못하고 삼켜야만 했던 말과 함께.

"난 불법체류자가 아니라 평범한 여행자라구요! 내가 그렇게 누추해 보였단 말입니까!"

덧붙이는 글 | '나의 황당 해외여행기' 응모기사입니다.



#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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