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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 수정 : 6일 오후 1시 30분]

가정에서 갓 나오신 이경표 사모님. 지난해 봄, 32년간 모신 시어머님을 101세에 배웅해드리고 그동안 가장 안에만 묶였던 삶에 변화를 주려고 합니다. 이경표 사모님의 이런 처지는 많은 대한민국의 주부들의 형편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가정에서 갓 나오신 이경표 사모님. 지난해 봄, 32년간 모신 시어머님을 101세에 배웅해드리고 그동안 가장 안에만 묶였던 삶에 변화를 주려고 합니다. 이경표 사모님의 이런 처지는 많은 대한민국의 주부들의 형편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입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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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6년째 각종 산업용 및 목공공구를 공급하는 회사를 운영하는 지인이 있습니다. SD상사의 나승대 사장님은 수천 종에 달하는 목공용 기계와 공구들을 외국의 유명회사로 부터 수입하여 단순히 품목별로 공급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목공작업스튜디오를 만들어 직접 그 공구를 사용해서 만들 수 있는 제품을 모두 만들어보았습니다. 그 과정에서 작업의 성격을 분류하고 그 작업에 필요한 최적의 공구들을 구성해 공구집단(Tool Set)을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작업능률을 극대화하면서도 작업이 끝난 뒤에도 공구를 잃어버릴 수 없도록 맞춤공구함을 만들어서 함께 공급했습니다. 이 방식은 업계의 큰 호응을 얻었습니다. 이에 힘입어 '위시스(WISYS : Woodwork Interior System)'라는 독자적인 목공툴브랜드를 만들고 회사도 크게 성장하였습니다.  

작년에는 기존 사업내용에 더하여 시너지효과를 기대할 수 있는 목공교육장인 '위시스 목공아카데미'를 개설하였습니다. 나 사장님의 초대로 이웃 몇 몇이 그 교육장을 방문하였습니다. 나 사장님의 사모님인 이경표 선생님도 그 자리에 함께했습니다.

나승대 사장님과 이경표 사모님. 사모님은 그동안 자녀의 부양과 시어머님의 봉양으로 시간을 낼 수 없었지만 이제 그 모든 역할로부터 자유로워진 만큼, 그 정성을 쏟을 다른 대상이 필요합니다.
 나승대 사장님과 이경표 사모님. 사모님은 그동안 자녀의 부양과 시어머님의 봉양으로 시간을 낼 수 없었지만 이제 그 모든 역할로부터 자유로워진 만큼, 그 정성을 쏟을 다른 대상이 필요합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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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카데미의 개설을 축하하기위해 방문한 그 자리에서 저는 사장님께 한 가지 제의를 했습니다.  

"사모님을 이 아카데미 원장으로 추천합니다. 사모님은 지금까지 사장님이 사업에 전염할 수 있도록 빈틈없는 내조를 해 오셨고, 더구나 101세까지 장수하신 시어머님을 지극 정성으로 모신 효부로서만 지내오셨습니다. 이제 그 며느리의 역할을 완수하신만큼 이 아카데미의 운영책임을 맡겨서 나 사장님의 책임도 줄이고 사모님께는 회사 조직에 열정을 쏟으면서 사회적 성취를 이룰 수 있는 기회를 드릴 수 있으므로 두 분 모두에게 득 되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런 제안을 드린 것은 몇 년 전에 아프리카 봉사 여행길에 이경표 사모님과 함께하면서 적지 않은 대화를 나누었고 비교적 소상하게 이 집의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2

나 사장님은 전남 나주 근동에 살던 평범한 집안의 귀한 외아들이었습니다. 위로 다섯의 누님이 계십니다. 첫 누님이 81세, 막내 누님이 66세입니다. 기어코 아들을 보고 싶었던 아버지의 소원은 다섯 번째의 누님이 태어난 4년 뒤에 나 사장님이 태어남으로서 풀릴 수 있었습니다. 그러니 나사장님은 올해 62세입니다. 어머님이 마흔 하나에 나 사장님을 얻었습니다.   

아들을 얻은 기쁨은 나 사장님이 11살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가심으로서 오히려 식솔하나가 늘어난 부담으로 바뀌었습니다. 원래 가난했던 집의 식솔을 건사하는 일은 온전히 어머님의 몫이 되었습니다.  

여섯 자녀의 끼니를 위해 남편을 잃은 57세의 부인은 동네의 큰 일이 있는 집을 돌면서 허드렛일을 도맡다가 마침내는 봇짐 장수일로 접어들었습니다. 주로 옷가지나 반짇고리 같은 물건을 보자기에 싸서 이거나 질빵에 걸머지고 나가시면 너닷새 만에 돌아오기 일쑤였습니다. 허기진 아들은 누나와 함께 마을 길모퉁이 산자락 능선으로 나가 어머니가 돌아오기를 하염없이 기다리곤 했습니다.  

봇짐장수로는 일곱 식구가 먹고 살기가 아득해진 어머니는 결국 온 식구을 이끌고 서울로 올라옵니다. 그때가 나 사장님이 16살 되던 해로, 서울로 오자마자 트럭 조수로 취직했습니다. 서울과 강원도를 오가며 물건을 나르던 그 트럭 밑이나 길가 인근 다리 밑이 나사장님의 잠자리였습니다.   

워낙 성실한 이 청년은 나중에 명동의 한 무역회사에 취직해서 10년 근속 후 30살에 서울 처녀를 만나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 이니셜을 딴 SD상사를 세우고 독립했습니다. 산업용 기계와 공구를 전문으로 수입해서 국내 딜러들에게 공급하는 이 회사는 다행히 안정적으로 자리잡았습니다. 

나 사장님의 취미는 나무를 가공하는 일이었습니다. 나 사장님의 아버지는 목수였으며 17대 직계조상님이 체암 나대용 장군으로 거북선을 만든 분이었습니다. 나대용 장군은 이순신 장군을 도와 거북선을 제조하는 것은 물론 쾌속선인 해추선을 발명한 조선의 대표적인 과학자이자 발명가였습니다.  

이렇듯 무엇이든 만드는 것에는 출중했던 집 안 내력이 반영된 탓인지 나 사장님은 다시 목공구 수입에도 눈을 돌려 그 공구를 활용해 나무 제품들을 직접 만들고 실험하면서 목공구 세트를 최적으로 구성할 수 있었습니다.

목공실습을 지도하는 나승대 사장님. 나 사장님으로부터 33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조상님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거북선과 쾌속선인 해추선을 발명한 나대용 장군입니다. 나 사장님에게도 집안의 이런 재능이 내림되어 있는 듯싶습니다.
 목공실습을 지도하는 나승대 사장님. 나 사장님으로부터 33대를 거슬러 올라가면 그 조상님이 임진왜란을 승리로 이끈 결정적인 역할을 한 거북선과 쾌속선인 해추선을 발명한 나대용 장군입니다. 나 사장님에게도 집안의 이런 재능이 내림되어 있는 듯싶습니다.
ⓒ 이안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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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업이 자리잡은 후, 나 사장님은 먼저 집을 텃밭 있는 곳으로 옮겼습니다. 어머니가 흙을 만지면서 소일하실 수 있도록...

#3

그 어머님이 작년 3월, 101세의 생일상을 받으시고 4월에 고요히 눈을 감으셨습니다. 41세에 남편이 그렇게 바라던 아들을 얻고, 그 아들을 60년 키워놓고 세상을 버린 것입니다. 이경표 사모님의 입장에서는 시집 올 때 시어머님의 연세가 칠순이셨으니, 32년 간 시어머님을 모신 것입니다.   

제가 사모님을 뵐 때 마다 '참 효부시다'라고 인사를 건네면 늘 손을 내저으면서 '효부'라는 말을 들을 만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저는 TV연속극에 나오는 며느리들처럼 그렇게 곰살궂지 못해요. 그저 기본적인 의무만 하는 정도입니다."  

사모님의 겸양의 말에도 불구하고 기실은 44살이나 위인, 시할머니같은 분을 시어머니로 모시는 그 모습은 항상 각별했습니다.   

어려운 세월을 살아오신 시어머님은 아들의 자수성가 후에도 아들의 봉양을 받는 노인으로만 살지는 않았습니다. 아침 일찍 용산시장에 나가셔서 마늘이나 양파를 까는 일품을 팔아 일당을 벌어 오시거나 그 일이 없을 때는 주변 식당의 허드렛일을 도와드리고 점심식사라도 스스로 해결하곤 했습니다. 아들과 며느리의 만류에도 리어카 행상 같은 노동을 놓지 않았습니다. 그 시어머님이 집에 들어 앉으신 것은 팔순이 가까웠을 때였습니다.  

사실 가난하고 부지런했던 나주 시골의 어머니와 서울 며느리 사이에는 적지 않은 문화적 틈이 있었습니다. 억척의 생활을 평생 견뎌 온 시어머님에게 서울깍쟁이 며느리의 살림살이는 헤프기 그지없었습니다. 아무리 여물게 살림을 살아도 시어머니의 기준으로는 항상 초름했습니다. 또한 친구들의 시어머님 연배인 시누이들의 눈치도 며느리에게는 부담이었습니다.   

"시어머님께 수의를 입혀드릴 때 정말 뜨거운 눈물이 나오드라구요.  엎드려 진심으로 용서를 빌었습니다. '어머님, 잘못했습니다'라고... 이 말을 살아계실 적에 못해드린 것이 또한 얼마나 후회가 되었는지..."  

나이 드신 부모들을 요양시설에 의탁하는 시류에도 불구하고 시어머님이 집에 들어앉으시고 부터는 매끼니 더운밥으로 모신 그 며느리가 101세의 시어머님 주검 앞에서 용서를 빌면서 오히려 회한하는 눈물을 쏟는 모습이 다른 며느리들에게 죽비를 치는 일이구나 싶었습니다.

이경표 사모님이 사무실의 회의 책상머리에 앉았습니다. 아니 앉혔습니다. 앞으로는 과도 대신 결재용 펜을 든 모습이 기대됩니다.
 이경표 사모님이 사무실의 회의 책상머리에 앉았습니다. 아니 앉혔습니다. 앞으로는 과도 대신 결재용 펜을 든 모습이 기대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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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호모 헌드레드(Homo Hundred)' 시대라고들 합니다. 남편의 일이 안정되고, 자녀들이 장성하거나 출가해서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이 축소되고 이렇듯 며느리로서의 역할을 끝낸 여성들은 이제 자신을 위한 삶을 살 필요가 있습니다.  

서예가 소엽 신정균 선생님은 몇 해 전에 '주부은퇴식'을 가졌습니다. 전반기가 주부로서 가정에 헌신하는 삶이었다면 후반기는 스스로에게 봉사하는 삶을 살겠다는 선언적 의미를 담은 것입니다. 이 주부 은퇴식이 기존의 역할을 팽개치겠다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가정을 위해 유보했던 자아의 실현에 더 비중을 주겠다는 것입니다. 대외적인 선포라기보다 자신에게 용기를 얻어주는 흥겨운 이벤트였습니다.  

이경표 사모님을 아카데미 원장으로 추천했던 의도는 바로 '주부 은퇴식'으로 얻는 효과와 크게 다르지 않은 것이었습니다.   

이경표 사모님의 아카데미 원장 임명장 전달.
 이경표 사모님의 아카데미 원장 임명장 전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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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의 경험이 없는 주부가 갑자기 원장 역할을 잘 해낼 수는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이런 선포식을 통해 부부간의 역할을 전환하는 계기로 삼아 더 열심히 경영수업을 받고 스스로 목공 일도 배워서 뒤늦게라도 '커리어우먼'으로서의 자부심 가득한 삶으로서의 복귀와 사회적 역할에도 한몫하는 실버의 삶을 살았으면 하는 바람을 담은 것입니다.   

당시 우리는 급히 임명장을 만들어 사모님께 수여토록하고 큰 박수로 사모님의 아카데미원장 취임을 축하드렸습니다.

이웃들의 박수 속에 부인에게 원장 임명식을 전달한 나 사장님은 그동안의 희생적인 내조에 감사했습니다. 나 사장님은 이제 외조로 부인의 사회활동을 돕고 그동안 부인의 헌신에 대한 빚을 덜고자합니다.
 이웃들의 박수 속에 부인에게 원장 임명식을 전달한 나 사장님은 그동안의 희생적인 내조에 감사했습니다. 나 사장님은 이제 외조로 부인의 사회활동을 돕고 그동안 부인의 헌신에 대한 빚을 덜고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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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경표 사모님은 지금, 목공아카데미에 출근해서 수강생들을 뒷바라지하면서 스스로도 기초반을 수강하고 있습니다. 저는 사모님이 머지않아 능력있는 실질적인 원장으로 거듭나리라 믿고 있습니다.   

시할머님같은 시어머님을 모시고, 시어머님같은 시누이들과 조화의 삶을 성공적으로 수행한 32년간 주부 경력이 곧 아카데미의 경영 능력으로 전환될 수 있는 값진 유기질 토양이기 때문입니다.   

덧붙이는 글 | 모티프원의 블로그 www.travelog.co.kr 에도 함께 포스팅됩니다.



태그:#나승대, #이경표, #위시스목공아카데미, #에스디상사, #SD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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