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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젯밤은 트레킹을 시작한 후 처음으로 술을 마시지 않았습니다. 고소 때문에 해발 3000m를 넘어서면 술과 담배는 하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알코올의 도움을 받지 못해서인지 밤이 깊어 갈수록 정신은 맑아집니다. 헤드 랜턴을 켜고 책을 읽지만 시간은 제자리를 맴돌 뿐입니다. 히말라야의 시간은 왜 이리 가지 않는지요. 새벽 무렵에는 바람까지 사람의 마음을 심란하게 하였습니다.

험한 윗길을 통해

오늘은 마낭(3540m)까지 갈 계획입니다. 마낭에 가는 방법은 두 가지입니다. 훔데에 공항이 생기면서 새롭게 만들어진 아랫길(Low Trail)과 예전부터 주민들이 왕래하던 윗길(Upper Trail)이 있습니다. 피상의 안내판에는 아랫길은 "소나무 숲을 걷는 편안한 길", 윗길을 "좋은 전망을 즐길 수 있는 험한 길"로 안내하고 있습니다. 한참을 고민하다 포터는 아랫길을, 가이드와 트레커는 윗길을 선택하기로 하였습니다.

표지판 위길과 아랫길에 대한 친절한 안내가 있음
▲ 표지판 위길과 아랫길에 대한 친절한 안내가 있음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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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출발은 저 혼자였습니다. 다른 일행들은 어제 갔던 곰파를 다시 보기 위해 떠났습니다. 오늘은 짧은 시간에 해발을 500m 올라야 합니다. 처음부터 힘든 걸음이 될 것 같습니다. 위 피상 마을을 지나기 까지는 평탄한 길이 계속되었습니다. 마을 어귀에는 수정처럼 맑은 호수와 마니차가 저를 환송하고 있습니다. 오늘도 편안한 트레킹을 기원하며 마니차를 돌립니다.

호수 위 피상을 지나면서
▲ 호수 위 피상을 지나면서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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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보일휴(三步一休)의 걸음으로

본격적인 오르막이 시작되었습니다. 경사가 거의 45도 달하는 오르막은 사람을 지치게 만듭니다. 머리를 들면 제가 가야 할 게루가 하늘 위에 떠 있습니다. 좋은 경치와는 달리 입에서는 육두문자가 나옵니다. 삼보일배(三步一拜)가 아닌 삼보일휴(三步一休)가 계속됩니다. 지쳐서 한참을 쉬고 있는데 독일 친구 프란츠(Franz)가 쫓아왔습니다. 그는 가이드나 포터를 고용하지 않았습니다. 조그마한 배낭 하나가 전부인 그는 항상 늦게 출발하고 일찍 도착하는 부지런한 트레커입니다.

오르막 '게루'가는 길
▲ 오르막 '게루'가는 길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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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없는 오르막을 한 시간쯤 걸어 게루(3730m)에 도착하였습니다. 마을 어귀에는 수백 년 된 듯한 아름드리 당산나무가 있습니다. 나무 아래에는 트레커들을 배려하기 위한 나무벤치가 있고요. 벤치에 앉아서 계곡 건너편을 바라봅니다. 좌측부터 안나푸르나Ⅱ, 안나푸르나Ⅳ, 안나푸르나Ⅲ 그리고 강가푸르나까지 7000~8000m 고봉들이 펼쳐져 있습니다. 손을 내밀면 닿을 것 같습니다. 어디를 보아도 눈이 부십니다.

당산나무 게루의 신목
▲ 당산나무 게루의 신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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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루에서 본 안나푸르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망
▲ 게루에서 본 안나푸르나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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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발 한 켤레의 의미

게루의 찻집에서 차를 주문하였습니다. 찻집 부엌에 낡은 신발 한 켤레가 놓여 있습니다. 신발은 낡고 낡아 거덜이 났습니다. 낡은 부분을 덧대어 헝겊으로 꿰매었습니다. 덕지덕지 꿰맨 흔적이 신발 크기보다 더 많습니다. 신발 형태가 남아 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입니다. 이곳 주민들의 험한 삶의 모습을 보는 것 같습니다. 낡은 신발 한 켤레를 보면서 너무나 많은 것들을 쉽게 허비하며 살아온 날들이 반성됩니다. 히말라야에서는 신발 한 켤레도 산을 닮아 가는 것 같습니다.

신발 한 켤레 낡은 신발 한 켤레
▲ 신발 한 켤레 낡은 신발 한 켤레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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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의 가옥 모습은 폐쇄적입니다. 돌과 흙으로 만든 가옥은 군대 요새를 생각나게 합니다. 외부와 최소한의 공간만을 개방하며 지붕은 평평합니다. 옆집과는 지붕을 통해 이동하고 있습니다. 가옥 구조는 자연환경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겠지요. 황량한 바람과 폭설에 대비한 그들만의 삶의 지혜가 담긴 모습입니다.

게루를 출발하였습니다. 급작스럽게 고도를 높였기에 최대한 천천히 걷습니다. 산 능선을 타고 가는 트레일은 완만한 오르내림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계곡 아래에 훔데 공항 모습과 울창한 숲 사이로 미로 같은 길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아랫길을 선택하였다면 이곳과는 다른 경치를 볼 수 있겠지요. 같은 곳을 향해 가지만 가는 방법에는 다른 길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인생도 자신만의 길을 통해 목적지로 나아갈 때 성공한 삶이겠지요.

계곡 아래 공항이 있는 훔데의 모습
▲ 계곡 아래 공항이 있는 훔데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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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목한계선을 넘어

수목한계선을 넘었습니다. 벌거벗은 산의 모습은 황량함 자체입니다. 산비탈에는 추수가 끝난 헐벗은 밭들이 힘겹게 걸려 있습니다. 추수가 끝난 밭에는 염소와 야크만이 산 능선을 헤쳐 다니며 마지막 남은 곡식을 뜯고 있습니다. 힘겨운 자연환경은 사람과 동물 모두를 힘들게 하나 봅니다.

양떼  메마른 대지에서 풀을 뜯는 모습
▲ 양떼 메마른 대지에서 풀을 뜯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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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왈(3657m)에 도착하였습니다. 점심을 위해 들어간 로지는 손님을 맞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가 도착하자 부랴부랴 난로에 불을 지피고 요리 준비를 시작합니다. 주인보다 더 바쁜 사람은 착한 가이드 '도르지'입니다. 나무를 나르고 감자를 깎고 물을 길어 오는 것은 주인아주머니가 아닌 가이드입니다. 을씨년스러운 날씨가 사람을 움츠러들게 합니다.

점심을 먹고 나니 날씨가 맑아집니다. 서둘러서 짐을 챙겨 출발하였습니다. 뭉지까지 계속해서 내리막길입니다. 뭉지는 피상에서 아랫길 출발한 길과 만나는 곳입니다. 트레일 주위에는 관목들이 고개를 숙이고 덤불을 이루고 있습니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최대한 자신의 몸을 최대한 낮추어야 합니다.

브라가(Braga·3360m)를 지나자 점점 좁아지던 협곡이 넓은 평원으로 바뀌었습니다. 마을을 지나자 티베트 불교의 성자인 밀라레파가 수행한 동굴(Milarepa cave)은 강 건너편에, 5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프라켄 곰파(Praken Gompa)는 우측 산 능선에 걸려있습니다.

곰파 절벽아래 위태하게 걸려 있는 프라켄 곰파 모습
▲ 곰파 절벽아래 위태하게 걸려 있는 프라켄 곰파 모습
ⓒ 신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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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마낭에'

오후 5시, 드디어 오늘의 목적지 마낭(3540m)에 도착하였습니다. 마을 입구에는 '타시텔레'(Tashi delek)라고 적힌 선간판이 우리를 환영하고 있습니다. 탈(Tal)을 지나고부터 티베트 마을이 계속되기에 "나마스테"라는 인사말보다 "타시텔레"라는 말이 더 자주 들립니다. 먼저 도착한 포터가 마을 입구에서 뜨거운 차를 보온병에 담아 언제 도착할지 모르는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들의 마음 씀씀이가 고맙습니다.

마낭에.. 마낭 입구에 도착한 모습
▲ 마낭에.. 마낭 입구에 도착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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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낭은 차메 이후 가장 규모가 큰 지역이며 트레커들의 파라다이스입니다. 이곳에는 병원·빵집·극장·PC방 등 다양한 시설이 있습니다. 갑자기 문명 세상에 온 느낌입니다. 우리는 이곳에서 하루를 더 묵으며 휴식과 고소에 대해 적응을 할 예정입니다. 마을에서 가장 시설이 좋은 로지에 숙박하였습니다.

숙소 마낭의 숙소
▲ 숙소 마낭의 숙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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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레킹을 시작한 후 5일을 걸었습니다. 날이 밝으면 출발하고 해가 지면 멈추는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5일을 걷다 보니 걷는 것 자체가 일이 되었습니다. 머릿속에는 온통 해발 5416m의 쏘롱라를 무사히 넘을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제 걸음을 멈출 때가 된 것 같습니다.

내일은 마낭에서 휴식을 취하면서 내가 히말라야를 걷는 목적에 대해 다시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할 것 같습니다.


#네팔#히말라야#안나푸르나#안나푸르나라운딩#마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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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3월 자발적 백수가 됨. 남은 인생은 길 위에서 살기로 결심하였지만 실행 여부는 지켜 보아야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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