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생태철학자 '사티쉬 쿠마르(Satish Kumar)'는 세계 강대국의 핵 정책을 몸으로 항의하면서, 인도에서부터 미국까지 2년 반 동안 걸어서 순례를 했습니다. 녹색연합은 이 정신을 계승해 1998년부터 녹색순례를 시작했습니다. 올해는 '비무장지대'로 발걸음을 옮겨 한국전쟁의 참상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강원도 철원을 시작으로 남북 긴장의 역사인 서해 5도의 최북단 백령도까지, 정전협정 60년의 역사를 지금 만나러 갑니다. 순례는 5월 22일부터 5월 31일까지 9박 10일간 진행됩니다. [편집자말] |
"하루 8시간 가까이 걷는다. 지구별을 두 발로 걸으며, 자연의 경이로움과 상처 입은 생명까지 온몸으로 느껴본다."녹색순례 원칙 중 하나입니다. 순례 중 필요한 자기 짐을 메고 하루 8시간 가까이 걷다보면 평소와 다른 것들이 눈에 보이곤 합니다. 푸른 청보리 너머 백로가 강가에서 날갯짓 하는 모습도 보이고, 걷다가 지쳐서 시선을 바닥에 두면 한 걸음씩 내딛는 내 발도 보입니다.
이렇듯 자연 속을 걷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동안 미처 보지 못한 것들을 보고 느끼게 해줍니다. 제주 올레길, 지리산 둘레길처럼 걷기 열풍을 불러온 유명한 길 외에도 최근 떠오르는 평화누리길이 있습니다. 오늘(24일) 녹색순례단이 걸어온 길은 연천평화누리길 셋째길입니다.
평화누리길 위에서평화누리길은 안전행정부(구 행정안전부) 주도로 조성되는 한반도 생태평화벨트 사업의 일환입니다. 2010년 개설된 경기도 평화누리길은 김포, 고양, 파주, 연천 등 4개의 시군을 잇는 총 연장 184.5km의 도보 여행길로 김포 2구간 38.4km, 고양 2구간 25.5km, 파주 4구간 58km, 연천 3구간 62.2km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2020년까지 인천과 경기, 강원 등의 지자체들이 DMZ 접경지역에 조성하고 있는 걷기코스와 자전거길입니다. 곳곳에 매달린 주황색, 파란색의 리본과 나무표지판을 확인하며 평화누리길을 걷고 있음을 확인 할 수 있습니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휴전선을 가운데 두고 남북이 2km씩 후퇴하며 만들어진 군사적 완충지대인 비무장지대(Demilitarized Zone)는 냉전의 상징이 되었지만, 그와 동시에 생태자원과 경관자원이 뛰어난 공간이 되었습니다. 평화누리길이 조성되는 접경지역은 DMZ 후방 5-20km 밖의 민간인 통제선으로부터 거리 및 지리적 여건, 개발 정도 등을 기준으로 정해놓은 공간입니다.
좌우대립의 역사가 만들어낸 DMZ는 역사적, 생태적으로 중요한 가치를 지니고 있어, 정부는 DMZ 주변 지역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 및 생물권 보호지역으로 지정하려는 노력을 하고 있고 동시에 평화누리길도 조성하고 있습니다. 평화누리길을 걸으며 자연 경관을 둘러보고, 전쟁이 불러온 참상을 되새기고 평화에 대한 염원을 다짐하면 좋겠지만, 사업이 진행되는 과정을 떠올리면 우려되는 부분들이 있습니다.
평화누리길 조성사업은 전체 사업 구간에 대한 경제적, 환경적 타당성 검토를 하지 않은 채 시작되었고 2010년 10월 국회에서는 지뢰 등 안전문제에 대한 지적을 받기도 했습니다. 또한 공사구간을 지자체별로 10킬로미터 이내로 분할하여 별도의 사업처럼 추진하고 있어 환경영향평가는 물론 사전환경성검토조차 생략한 경우가 많습니다.
이미 완공된 파주, 화천, 양구 등의 지역은 번거로운 출입 절차 때문에 자전거 이용자들로부터 외면을 받고 있습니다. 실제로 철원지역은 양지리로 진입하면서 평화누리길 안내를 시작합니다. 양지리통제소를 지나 월정리로 진입하는 구간에도 도로 위, 각종 안내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관할부대와 협의가 되지 않아 실제 평화누리길 이용만을 위한 출입이 불가능합니다.
야생동물에 대한 보호 대책도 비현실적이라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습니다. 2700종 이상의 야생동식물이 서식하는 생태자원의 보고임에도, 도로 양쪽에 철망과 안전대를 설치하여 기존의 야생동물 이동통로를 막고, 형식적으로 새로운 이동통로를 만들었다는 것입니다.
또한 지자체들이 각각 경쟁적으로 자기 지역에 평화누리길을 만들다 보니, DMZ 로고 및 표지판과 표지도 다르고 홍보도 따로 하고 있어 행정구역별로 다른 모습에 아쉬움을 주기도 합니다. 안전행정부, 2개의 광역단체, 7개의 지자체가 "평화누리길"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자전거도로를 조성하고 있지만 컨트롤타워가 없어 중구난방으로 조성되고 운영되고 있는 것이 지금의 상황입니다.
2000년대 이후, DMZ에도 개발의 바람이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 북한과의 관계가 좋아지고 금강산 관광 등 직접적인 교류까지 진행되자 DMZ일원에도 개발의 바람이 불었습니다. 현재 DMZ일원에 설치된 각종 전시관, 박물관, 문화광장 등은 앞으로 북한과의 관계가 더 좋아지고, 평화-통일 관광지로 급부상할 것이라는 예측과 수요로 당시 개발된 시설들입니다. 계획의 확장으로 현재도 DMZ일원에 대한 개발이 진행되고 있고 평화누리길도 그 중 하나입니다.
와초리, 옥계리의 평화누리길을 지나 도착한 군남홍수조절지는 2011년에 준공된 높이26m, 길이 656m에 총 저수용량 7000만 톤의 콘크리트댐입니다. 건설 당시 북한 황강댐의 무단 방류에 대응하기 위해 건설한다고 그 취지를 밝혔으나, 황강댐의 1/5정도의 규모밖에 되지 않아 실질적인 홍수 대비책으로 보기 어렵다는 분석과 함께 수몰 지역민들의 강한 반발이 있었던 곳입니다.
또한 세계적으로 2800마리 밖에 남지 않은 멸종위기종 두루미의 서식지도 수몰된다는 논란이 있었지만 현재는 완공 되어 수몰 예정지 마을 주민들은 이주가 거의 완료되었습니다. 수몰 예정 도로보다 높은 위치에 대체 도로가 건설돼 사용 중입니다.
평화누리길을 걷고 준공된 지 채 2년이 되지 않은 군남 홍수조절지를 지나며 DMZ접경지역의 개발 문제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게 됩니다. DMZ 접경지역의 역사적, 문화적 가치를 보존하는 것을 고려해야 그 안에 60년 생태자원이 훼손되지 않고 다시는 한반도가 냉전의 상징으로 남지 않게 될 것입니다.
최근 접하게 되는 뉴스를 보노라면 통일-평화협정은 한참 뒤에 있는데, 지금 진행 중인 DMZ일원의 개발사업이 앞서 나가는건 아닌가 하는 우려가 듭니다. 평화를 누리는 길을 걸으며 평화에 대해 생각해 봅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는 신수연 녹색연합 활동가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