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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중앙 높은 곳은 호헨 잘츠부르크 성이다. 11세기에 처음 지어진 요새로 몇 번의 중축 끝에 681년에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1분 걸리는 트로페를반이라는 케이블카로 오르내렸는데 사방의 전망이 시원했다.
▲ 잘츠부르크의 구시가지 멀리 중앙 높은 곳은 호헨 잘츠부르크 성이다. 11세기에 처음 지어진 요새로 몇 번의 중축 끝에 681년에 지금과 같은 모습이 되었다고 한다. 1분 걸리는 트로페를반이라는 케이블카로 오르내렸는데 사방의 전망이 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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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8월17일(토) 맑음.


콜로세움, 개선문 그리고 화산재 속에서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 폼페이…. 이탈리아에는 천년을 넘은 나이를 자랑하는 그런 건축물들이 즐비했다.

인스부르크나 잘츠부르크는 그에 미치지 못했지만 기본이 6~700년 전에 지어진 건물들이 많다는 설명이었다. 그런데 우리에게는 석굴암이나 화강암의 탑 등 석조물을 제외하고 천년을 넘긴 건축물은 찾을 수 없다. 우리나라에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건물이 남아있지 않은 까닭은 목조 건축물의 특성상 석조 건축물에 비해 수명이 짧은 원인이 크다고 본다.

글을 몰라도 무슨 가게인지 알 수 있게 만든 일종의 간판이다.
거리의 상점에는 그런 예술성이 돋보이는 조형물로 장식되어 있었다.
▲ 가게를 알리는 조형물 글을 몰라도 무슨 가게인지 알 수 있게 만든 일종의 간판이다. 거리의 상점에는 그런 예술성이 돋보이는 조형물로 장식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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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우리나라에 오래된 건축물이 남아있지 못한 원인은 우리의 비극적인 역사 때문이라는 생각을 한다. 수많은 전란을 경험했던 우리 조상들은 후대에 남은 단단하고 아름다운 건축물에 신경 쓸 수 없었을 것이다. 더구나 백성들 집의 규모조차 제한하고 집을 지을 경제적인 활동을 법으로 금했던 수탈의 정치에서 백성들은 뜻이 있어도 크고 튼튼한 집을 지을 수 없었을 것이다.

강 건너는 신도시라고 했는데 보통 2,3백년된 건물이라고 했다. 
견고한 건물을 짓는 그들의 생활모습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 호헨짤쯔부르크 성에서 본 도시 전경 강 건너는 신도시라고 했는데 보통 2,3백년된 건물이라고 했다. 견고한 건물을 짓는 그들의 생활모습은 반면교사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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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의 불안, 국가의 수탈로 인해 경제적인 여유를 가질 수 없었던 불행의 역사 속에서 뜨내기처럼 현실의 고통을 감내하고 살았을 우리 조상들을 생각하면 수 백년 된 건축물이 남아있는 못한 현실을 탓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2차 대전의 피해를 입은 곳이라고 했지만 파괴된 성당을 원형대로 복원한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우리 역사가 참으로 아팠다. 고작 30년 된 시멘트 건물(아파트)을 재개발한다는 우리의 현실이 뜨내기처럼 살았던 역사의 반영이라는 생각을 하면 마음은 더 아팠다.

정면의 계단은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도레미송을 부른 곳이다.
▲ 미라벨 정원 정면의 계단은 '사운드 오브 뮤직'에서 도레미송을 부른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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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시청 청사로 쓰이는 곳이라고 한다. 
성직자였던 디트리히 주교와 살로메라는 여성의 금지된 사랑 이야기가 현실로 남은 곳이다.
▲ 미라벨 정원의 정면 지금은 시청 청사로 쓰이는 곳이라고 한다. 성직자였던 디트리히 주교와 살로메라는 여성의 금지된 사랑 이야기가 현실로 남은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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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츠부르크의 미라벨 정원, 천재적인 음악가 모차르트, 아름다운 상징적 조형물을 간판으로 내건 구 시가지의 건물들, 7일 만에 열린다는 시장의 풍경, 관광객을 실은 마차가 오가는 레지던츠 광장, 연합군의 폭격으로 파괴되었으나 복원했다는 대성당은 물론 '사운드 오브 뮤직'이라는 영화의 추억을 상품화하여 관광객을 끌어 모으는 나라.

마침 7일장이 열리는 날이었기에 시장을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채소와 유제품 그리고 육류제품은 물론 골동품까지 많은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시장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물건은 정돈되어 있었다. 
현지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농민들이 직접 생산한 물건이라고 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먹을 것 가지고 속이는 행위는 크게 처벌받을뿐 아니라 그런 농축산물은 팔 수도 없다고 했다.
▲ 시장의 정육점 마침 7일장이 열리는 날이었기에 시장을 돌아볼 기회를 가졌다. 채소와 유제품 그리고 육류제품은 물론 골동품까지 많은 것을 찾을 수 있었다. 시장 사람들의 모습은 우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으나 물건은 정돈되어 있었다. 현지 가이드의 말에 의하면 농민들이 직접 생산한 물건이라고 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먹을 것 가지고 속이는 행위는 크게 처벌받을뿐 아니라 그런 농축산물은 팔 수도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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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걸 보겠다고 자발적으로 달려간 나. 안내하는 현지 가이드의 설명을 들으면서 부지런히 카메라에 담았다. 비슷비슷한 발음의 지명 그리고 건물과 사람들 때문에 사진을 찍은 장소조차 기억할 수 없는 날이 오게 될 것이다. 그러나 그걸 염려할 시간이 아니었다.

노란 건물의 4층에서 모차르트가 태어났다고 한다. 
입장료는 10유로, 우리 돈으로 1만5천원이었으나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었다. 찰츠부르크는 모차르트와 관련된 기념품은 물론 초콜렛까지 찾을 수 있었다. 초콜렛은 포장에 다라 다르지만 8개들이 봉지에 우리 돈으로 4천 5백원이었다.
▲ 모차르트 생가 노란 건물의 4층에서 모차르트가 태어났다고 한다. 입장료는 10유로, 우리 돈으로 1만5천원이었으나 사진 촬영을 금지하고 있었다. 찰츠부르크는 모차르트와 관련된 기념품은 물론 초콜렛까지 찾을 수 있었다. 초콜렛은 포장에 다라 다르지만 8개들이 봉지에 우리 돈으로 4천 5백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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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동유럽 여행은 8월 13일부터 24일까지 다녀왔습니다. 이 기사는 한겨레 블러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짤츠부르크, #모차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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