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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혹한 살수 무영객은 강호의 전설적인 비급 무극진경의 행방을 찾기 위해 은거한 고수 모충연을 암습한다. 모충연은 일격을 당한 후 제자 관조운에게 알듯 모를 듯한 말을 남긴 채 운명한다. 한편 황실의 비밀조직 은화사 역시 무극진경의 강호 출현을 눈치 채고는 관조운을 추격한다. 관조운은 살수와 은화사에게 이중으로 쫓기면서 스승 모충연이 가르쳐준 수수께끼를 풀어나가야 하는데.... - 필자말

無爲刀
▲ 무위도 無爲刀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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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장 유언

"숙부님, 저기 저 무사님들 정말 멋져요. 나도 이담에 무사가 되고 싶어요."
"안 돼. 섭월, 너는 선비가 되어야 해."

관조운(關照雲)은 돌아가신 아버님의 뜻도 그렇고, 홀로 계신 어머니를 생각해서라도 무사가 아닌 선비가 되어야 한다는 말까진 조카 섭월(燮月)에게 하지 않았다. 이제 일곱 살인 애가 아버지의 뜻과 어머니의 바람을 어찌 이해하겠는가. 그저 눈앞에 보이는 장면에만 혹할 뿐인데. 등에 비스듬히 장검을 메고 말을 타고 지나가는 강호의 협사들이 아이의 눈에는 멋져 보였는가 보다.

이 아이도 사내라고 삼촌인 자기만 보면 아무 작대기나 들고 칼싸움하자고 덤빈다. 아이의 어머니가 엄격히 금하는 장난이건만 잠재된 사내 본능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다. 관조운 자신도 그랬지 않았던가. 아니 더하면 더했지 못하진 않았다. 위로 장형(長兄)이 있다는 핑계로 문사(文士)의 가풍 따윈 일찌감치 벗어던지고, 수박 겉핥기나마 사서오경을 떼자마자 무문(武門)으로 달려가지 않았던가.

단오절을 맞이한 금릉(金陵)의 저잣거리는 붐비기 그지없다. 홍무대제가 대명국(大明國)을 세우고 이 고장을 남경(南京) 응천부(應天府)라 칭하였지만 사람들은 여전히 옛 당(唐) 시절부터 부르던 습관대로 금릉이라 칭했다. 금릉 시내는 덜컹덜컹 마차 구르는 소리, 따각따각 말발굽 소리, 끄윽끄윽 수레 끄는 소리처럼 기물(器物)이 내는 소리가 저잣거리의 바닥을 울리고 있다면, 인간이 내는 소리는 공중에서 서로 맞부딪혔다.

대목을 맞이하여 상인들의 드높은 목청은 당연하다 치더라도, 손님을 호객하는 점원의 새된 소리, 흥정하는 소리, 아이 찾는 소리, 우렁우렁 젊은 남자의 호기 어린 목소리, 키득키득 젊은 여자의 교태 어린 웃음, 저 마다 제 각각의 소리가 저자의 화음에 일조를 하고 있다.

관조운은 아비 없는 어린 조카에게 저잣거리의 사람 사는 냄새를 맡게 하고 싶었다. 선대(先代) 몇 대 조(祖)에서 이루어 놓은 벼슬아치의 신분을 못 잊어 문관의 예법과 문사의 격조를 형벌처럼 강요받고 있는 조카에게 가끔은 딴 세상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런 그를, 아이의 어미이자 장형의 아내이고, 한때 서로의 가슴에 연정의 싹을 틔워주는 사이였던 필진진(弼眞珍)은 못 마땅하게 여겼다.

필진진이 마땅치 않은 건 관조운도 마찬가지였다. 구중심처까지는 아니더라도 몇 겹으로 둘러싸인 장원에 틀어박혀, 아이에게 선비가 갖추어야 할 학식의 습득에만 집착하는 건 필히 지아비가 못 다 이룬 꿈을 아이를 통해 이루려는 여인네의 허망한 고집처럼 보였다.

모처럼 명절을 맞이하여 제사 차 형님의 장원에 들른 조운은 반갑게 따르는 아이의 핑계를 대고 저자거리로 나섰다. 등 뒤에 박히는 형수의 따가운 눈초리를 모른 척하며. 관섭월은 아이다운 호기심으로 저자거리를 눈이 휘둥그레 살피다가 어느 가게 한 곳에서 멈췄다.

"삼촌, 아니 숙부님."

천자문을 익히면서부터 아이 엄마는 더 이상 삼촌이라는 칭호를 쓰지 못하게 했다. 저자거리의 아랫것들처럼 삼촌이 무어란 말이냐, 앞으론 숙부님이라고 부르거라. 조운 앞에서 진진은 더욱 엄격하려 했다.

아이가 가리키고 있는 것은 붉은 자단나무로 깎아 만든 새총였다. 새총의 손잡이는 봉황을 새겨 고급스러워 보였지만, 줄은 누르튀튀한 색으로 처음 보는 것이었다. 조운이 하나를 집어 들었다. 손잡이를 잡고 줄을 당기자 어깨 뒤로 주욱 늘어났다. 생각보다 탄력성이 좋았다.

"헤헤, 이 줄로 말할 것 같으면, 저 멀리 남만(南蠻)에서 온 것으로 아주 탄력이 좋습죠. 우리 중원에서는 구하고 싶어도 결코 구할 수 없는 신기한 줄입죠."

상인은 어느새 다가와 굽실거렸다.

"우리 소공자께서도 한 번 당겨보십쇼."

상술 좋은 상인은 어느 새 섭월의 손에 새총을 쥐어 주었다. 섭월은 당겨볼 생각도 없이 조운을 쳐다보았다. 그 눈엔 이미 간절함이 담겨 있었다. 조운은 품에서 몇 닢을 꺼내 상인에게 지불하고 새총을 섭월에게 건네주었다. 아이의 입이 목련처럼 벙그러졌다.

"새총을 많이 갖고 싶었니?"

조운이 말했다.

"그럼요, 삼촌. 아니 숙부님. 문간아범 댁 아삼도 갖고 있고, 마당어멈 댁 종칠이도 갖고 있단 말예요. 그런데 나만 없어요."
"왜 너만 없니? 어머니에게 사달라고 하던가, 까짓것 외채의 하인들에게 만들어 달라고 해도 되지 않으련?"
"그게……, 숙부님."

섭월은 뭔가 말하려다 삼켰다. 조운은 섭월이 말을 끝맺지 못해도 알 것 같았다. 보나마나 섭월의 어머니 진진이 새나 쫓는, 그런 상스런 장난감은 선비의 품위를 손상시키는 짓이라며 금했음에 틀림없다. 조운은 아이의 심정을 알 것 같으면서도 그 어미의 고집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니었다. 청상(靑裳)의 한 서린 엄격을 어찌 고집으로만 탓할 것인가.

"저기, 숙부님은 예전에 무공을 수련한 무사였잖아요."

새총을 손에 쥔 섭월은 신이 나 숙부를 올려다보며 말했다.

"그럼, 한때 이 숙부도 등에 검을 메고 허리엔 도를 찬 적이 있었지."
"우와, 그럼 나쁜 놈들도 죽여, 아니 처치해 봤어요?"

섭월의 눈이 반짝였다.

"섭월아, 무예를 닦는다는 건 사람을 죽이기 위해서가 아니란다. 음, 그럴 때가 없진 않지. 내가 위험에 처했다거나, 혹은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에게 위협을 당하거나 할 때는 무술로서 상대를 제압할 수가 있지. 하지만 그게 목적은 아니란다."

"그럼, 상대가 악당이라면 무술을 사용할 수 있는 건가요?"
"글쎄다. 상대가 악당이라고 판단하는 건 또 다른 문제란다."

조운은 섭월의 질문이 여기서 더 이상 나아가지 않기를 바랐다. 악당과 선한 인물의 구별을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그저 눈앞의 상황에 따라, 혹은 자신의 입장에 따라 그은 불명확한 선이 아니던가.

섭월도 그 이상의 질문을 하진 않았다. 아이의 눈을 사로잡을 새로운 장면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몇 걸음 앞에 먹빛 가사를 두른 스님이 목탁을 두드리며 탁발을 하고 있었다. 스님의 가사는 남루하되 목소리는 낭랑했다.

"삼촌, 저 스님 혹시 소림사 무승(武僧)이 아닐까?"

섭월의 눈에 다시 호기심이 어렸다.

"아냐, 이 근처의 청운사 스님일 게다. 스님이라고 모두 무술을 익히는 건 아니란다. 소림사 스님들은 탁발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웬만해선 속세에 나오지도 않지. 그러니 우리 눈에 쉽게 띄지도 않는단다."

"삼촌. 저기"

아이가 가리키는 곳엔 웃통을 벗은 차력사가 입으로 불길을 내뿜으며 무어라 중얼거리고 그 주위를 사람들이 빙 둘러 서 있다.

"삼촌도 저런 거 할 줄 알아?"
"아냐, 저런 건 술(術)이라고 해서 하나의 재주일 뿐이야. 삼촌이 닦은 건 술이 아니라 예(藝)야. 그래서 우리는 무술이라 하지 않고 무예라고 칭하지."

섭월은 조운의 설명이 끝나기도 전에 다시 눈이 사방을 살폈다.

"그럼 저 사람들은?"

아이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허리에 검을 차고 푸른 상투끈과 암회색의 소매 없는 배자를 입은 한 무리가 지나가고 있었다. 배자의 가슴에는 두 겹의 원이 있고 그 안에 '盟'자가 새겨져 있다.

"저 사람들은 무림맹(武林盟) 사람들이야. 음, 무당파 소속 맹원(盟員)이구나."
"무림맹은 뭐하는 사람들이야? 삼촌."

다시 섭월의 질문이 이어진다.

"무림맹은 구대문파 사람들이 만든 연맹이야. 그러니까 유명문파 사람들이 모여서 강호의 치안을 담당하고, 에, 또. 그러니까, 정파에 맞서는 사파와 흑도의 무리들을 제압하기 위해 힘을 합친 조직이라고 할까."

"그러면 관졸(官卒)은 뭐하구요?"

섭월이 이상하다는 듯 조운을 올려다보며 다시 물었다.

"음, 그러니까. 관졸들은 인원도 부족하고 보통 사람들의 치안을 다스리는 것도 벅차니까 강호의 일에는 끼어들지 않는 경향이 있단다. 그래서 드잡이질이 끊임없는 강호의 일은 강호인들이 해결하자는 취지에서 만든 것이 무림맹이지."

"그러면 무림맹의 최고 대장은 누가 하나요?"
"구대문파의 장문인들이 합의해 추대한단다. 임기 3년의 맹주는 대개 각 문파의 수장들이 돌아가면서 맡고 있는데, 올해부터는 무당파에서 추천한 만상노군(萬上老君) 황인(黃仁)이 맹주의 직책을 맡고 있단다."

"그럼 무림맹이 강호의 일을 다 해결해 주는 건가요?"
"꼭 그렇지도 않단다. 연맹이라는 것이 그렇게까지 힘이 있는 것이 아니라서 완벽한 해결은 어렵단다. 주요 문파의 입김에 좌지우지 되는 경향도 있긴 하지만 가장 중요한 역할은 각 문파 간의 세력 균형을 맞추어 주는데 있다고 할까. 그 이상은 정치적인 얘기가 되니 그만하자구나."

조운은 억눌려 있다 터져나오는 아이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위해서는 하루해도 짧을 것 같았다. 어느 새 햇살이 누각에 비스듬히 비껴있다. 섭월을 데리고 나올 때 점심 요기까지만 하고 온다는 조건이었는데 벌써 미시(未時)가 된 것 같았다.

"섭월아, 이제 들어갈 시간이구나. 어머니가 걱정하시겠다."

섭월은 아쉬움이 뚝뚝 떨어지는 얼굴로 "네. 숙부님"하고 대답한다.

덧붙이는 글 | 월, 수, 금, 주 3회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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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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