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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부(孔府), 공묘(孔廟)를 둘러보고 나니 점심시간이 되어 식당을 찾는데, 관광객을 실은 우마차에, 중국 전통복장을 한 사람들까지 마치 영화촬영장에 서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친구가 멀리서 오니 이 또한 기쁘지 아니한가(有朋自遠方來, 不亦樂乎)" 등의 <논어> 문구들이 다채로운 광고로 변신해 곳곳에 붙어 있기도 하다.

공자를 모신 취푸는 공자의 적손이 현령을 맡아온 터라, 취푸의 도시 발전 프로젝트 또한 공자와 그 후손을 중심으로 이뤄질 수밖에 없었다. 1904년 철도가 부설될 당시에도, 조상님들의 혼령이 기차 굉음에 안면하지 못하고, 성맥(聖脈)을 끊는다는 이유로 준설을 반대해 옌저우(兖州)에서 취푸를 크게 휘돌아 노선이 획정되었다. 그래서 취푸를 찾는 관광객은 기차보다는 주로 버스를 이용하는 편이다.

공자와 함께 시간이 멈춘 취푸 관광객을 실은 우마차에, 중국 전통복장을 한 사람들까지 마치 영화촬영장에 서 있는 느낌이다.
▲ 공자와 함께 시간이 멈춘 취푸 관광객을 실은 우마차에, 중국 전통복장을 한 사람들까지 마치 영화촬영장에 서 있는 느낌이다.
ⓒ 김대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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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푸 지도 취푸는 큰 우물처럼 기차길이 휘돌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 취푸 지도 취푸는 큰 우물처럼 기차길이 휘돌아가고 있는 모습이다.
ⓒ 인터넷 百度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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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이름은 구(丘)이고, 자(字)는 중니(仲尼)인데 모두 취푸의 동쪽에 위치한 니구산(尼丘山)과 관련이 있다. 공자의 아버지 숙량흘(叔亮紇)이 안씨(顔氏)와 이곳에서 야합(野合)하여 공자를 낳았다고 사마천의 <사기(史記)>에 기록되어 있다. 공자의 이름이 구(丘)이기 때문에 피휘하여 니산(尼山)으로 불린다.

이곳에 최근 72m 높이의 세계 최대 공자상이 완성되어 제막식을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다. 최소한 취푸는 개발의 논리보다는 문화유산을 보존하는 쪽으로 발전 모형을 잡은 셈인데, 문화대혁명 기간에 위기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최근 거세게 불고 있는 '공자 열풍'을 타고 취푸의 성지화는 앞으로 더 가속화될 전망이다.

공부와 공묘에도 수목이 많기는 하지만 아무래도 건축 위주의 다소 딱딱하고 느끼한 맛이라면 공림(孔林)은 숲 속에 펼쳐진 공원 같은, 시원하고 상큼한 느낌을 준다. 중국은 황제의 무덤에 릉(陵), 성인의 무덤에 림(林), 그 밖에 유명인의 무덤에는 분(墳)이나 묘(墓)를 붙인다.

황제가 아니면서 '릉'으로 불리는 것은 쑨원(孫文)의 중산릉(中山陵)이 유일하며, 성인의 반열에 오른 공자와 맹자의 무덤이 공림, 맹림(孟林)으로 불리며 소림사(少林寺) 고승의 무덤이라 할 수 있는 사리탑이 탑림(塔林)으로 불리는 정도이다. 관우는 송대에 '의용무안왕(義勇武安王)'에 봉해졌으며, 동시에 무사로서의 성인으로도 불려, 당양(當陽)의 무덤은 관릉(關陵)으로, 뤄양(洛陽)의 무덤은 관림(關林)으로 불린다.

만고장춘(萬古長春) 석방(石坊) 용, 봉황, 기린 등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취푸에서 가장 큰 석방이다.
▲ 만고장춘(萬古長春) 석방(石坊) 용, 봉황, 기린 등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취푸에서 가장 큰 석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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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00여 년의 장례문화가 10만여 개의 무덤, 4천여 비석으로 펼쳐진, 세계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가족묘인 공림의 시작은 만고장춘(萬古長春) 석방(石坊)이다. 12마리의 돌사자가 지키고 선 이 패방은 1594년 명나라 만력제 때 건축된 것으로 청대 옹정제가 다시 중수했다. 용, 봉황, 기린 등이 정교하게 조각되어 있으며 취푸에서 가장 큰 석방이다. 석방 안으로 측백나무를 따라 상인들이 좌판을 벌이고 물품을 파는데 웨이팡(濰坊) 특산이라는 보랏빛 무가 유독 눈에 띈다.

5분 정도 북쪽으로 걸어 올라가자 공림의 대문인 지성림방(至聖林坊)이 나온다. 1331년 원대에 건설된 이 문은 명말 숭정제 때 조각되었다는 두 마리의 돌사자가 지키고 있다. 그 안으로 400m의 신도가 이어지는데 좌우로 각각 72, 73그루의 측백나무가 심어져 있다. 왼쪽의 72그루는 공자의 제자를, 오른쪽의 73그루는 공자의 나이를 나타낸다고 한다.

신도의 끝에 다시 붉은 벽 위로 지성림(至聖林) 글귀와 함께 성문이 나타나는데 공림이문(孔林二門)이다. 도굴 방지 등을 위해 아무나 들어서지 못하도록 높은 성곽이 둘러쳐져 있다. 공림이문을 들어섰더니 가이드가 급하게 달려와 관광차를 탈 것이냐고 묻는다. 다리도 아프고 해서 탄다고 했더니 20위안을 빨리 내라고 한다.

공림의 대문인 지성림방(至聖林坊) 1331년 원대에 건설된 이 문은 명말 숭정제 때 조각되었다는 두 마리의 돌사자가 지키고 있다.
▲ 공림의 대문인 지성림방(至聖林坊) 1331년 원대에 건설된 이 문은 명말 숭정제 때 조각되었다는 두 마리의 돌사자가 지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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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림이문(孔林二門) 좌우로 각각 72, 73그루의 측백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왼쪽의 72그루는 공자의 제자를, 오른쪽의 73그루는 공자의 나이를 나타낸다.
▲ 공림이문(孔林二門) 좌우로 각각 72, 73그루의 측백나무가 심어져 있는데 왼쪽의 72그루는 공자의 제자를, 오른쪽의 73그루는 공자의 나이를 나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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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광차는 바로 왼쪽에 있는 공자의 무덤을 뒤로 하고, 오른쪽으로 머리를 돌려 공림 전체를 한 바퀴 크게 돌며, 안내 방송으로 공림의 전반적인 배치와 형성 과정 등을 설명한다. 군데군데 유명한 공자 후손의 묘소에 멈춰 소개도 잊지 않는다. 관광차에 앉아 시원한 바람을 쐬며 다양한 수종의 울창한 수목이 우거진 공원을 둘러보는 것이 풋풋한 휴식과 여유를 준다.

유독 건륭제에 관한 이야기가 많아 귀를 기울이니, 건륭제의 딸이 공자 집안으로 시집을 온 모양이다. 원래 만주족이 세운 청나라는 만주족과 한족의 결혼을 금지하였는데 건륭제의 딸이 얼굴에 반점이 있어 사주를 보니 유명 명문가로 시집을 가야 한다는 점괘가 나왔다고 한다. 건륭제는 딸을 우선 한족 집안에 수양딸로 보냈다가, 성을 우(于)씨로 바꾼 뒤, 공자의 72대손 연성공 공헌배(孔憲培)와 결혼을 시켰다는 것이다. 황제의 사위와 딸의 무덤에는 공덕을 칭송한다는 의미의 '난음포덕(鸞音褒德)' 패방이 세워져 있다.

수수교(洙水橋) 성인의 숨결이 물길을 따라 영원히 흐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 수수교(洙水橋) 성인의 숨결이 물길을 따라 영원히 흐른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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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수하(洙水河) 진시황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여 흙을 파 강을 만든 것이 오히려 공자가문을 흥하게 하는, 강물이 되었다고 한다.
▲ 수수하(洙水河) 진시황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여 흙을 파 강을 만든 것이 오히려 공자가문을 흥하게 하는, 강물이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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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림을 한 바퀴 돈 관광열차는 본격적으로 공자의 무덤을 향해 가는 수수교(洙水橋) 앞에 멈춰 섰다. 잠시 휴식을 취한 가이드가 어느새 다가와 명대 건축된 수수교에 대해 흥이 나서 설명을 이어간다. 공자가 생전에 자신의 묏자리를 이곳 공림에 봐 두었는데, 풍수를 살펴본 제자 자로(子路)가 다 좋은데 물이 없는 것이 흠이라고 하자, 공자는 "걱정하지 마라. 후세에 누군가 이곳에 강물을 끌어올 것이니라"라고 예언했다고 한다.

공자의 예언대로 진시황이 분서갱유(焚書坑儒)를 단행하여 이곳에 유학자들을 파묻고 공자가문의 융성을 막기 위해 인공으로 흙을 파 강을 만든 것이 오히려 공자가문을 흥하게 하는, 명당자리의 화룡점정인 '강물'이 되었다는 것이다. 학술적인 근거를 찾기 어렵고 아전인수(我田引水)식 해석인 듯하나, 그나마 역사적 정황이 그럴 듯하니 웃으며 인정할 수밖에 없다.

풍수교 역할을 하는 수수교를 지나면 공자묘로 진입하는 통로인데 당묘문(擋墓門)이 일단 앞을 막는다. 황제도 이곳에서 3일 동안 목욕재계하고 의복을 단정히 하고 공자를 알현했다고 한다. 당묘문을 지나면 한 쌍의 화표(華表)가 있는데, 이곳의 화표는 위에 구름이 조각되지 않은 것이 특징이다. 천당과 지옥의 경계를 나타낸다고 한다.

화표를 지나면 두 쌍의 신수(神獸)가 놓인 용도(甬道)이다. 송대 1123년에 만들어졌다는 문표(文豹)와 록단(甪端)이 앙증맞은 모양으로 서 있다. 문표는 표범의 형상으로 공자 곁에서 책을 정리하고 먹을 갈았다고 하며, 록단도 상상의 동물로 공자가 열국(列國)을 주유(周遊)할 때 수레를 끌고 통역을 맡았다고 한다. 만지면 복이 온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얼마나 많은 관광객들의 손길이 닿았는지 반질반질 윤이 나 있다.

신수(神獸)가 놓인 용도(甬道) 만지면 복이 온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많은 관광객들의 손길이 닿는 문표(文豹)와 록단(?端)이다.
▲ 신수(神獸)가 놓인 용도(甬道) 만지면 복이 온다는 가이드의 설명에 많은 관광객들의 손길이 닿는 문표(文豹)와 록단(?端)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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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관과 무관을 대표하는 석상 옹중(翁仲) 옹중은 원래 흉노를 물리친 진시황 수하의 용맹한 장수였다고 하는데, 공자의 수호천사가 되어 서 있다.
▲ 문관과 무관을 대표하는 석상 옹중(翁仲) 옹중은 원래 흉노를 물리친 진시황 수하의 용맹한 장수였다고 하는데, 공자의 수호천사가 되어 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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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관과 무관을 대표하는 석상 옹중(翁仲)이 공자의 무덤 바로 동편에 우람한 키로 서 있다. 옹중은 원래 흉노를 물리친 진시황 수하의 용맹한 장수였다고 하는데, 어쩌다 공자의 수호천사 임무를 맡게 된 건지. 베이징의 명대 황제 무덤군인 명13릉의 신도를 떠올리게 한다.

황제도, 공자도 죽어서까지 자연과 문무백관의 호위를 받으려는 고대인의 사후 세계에 대한 인식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는 느낌이다. 옹중 옆은 향전(享殿)인데, 역대 황제들이 공자에 대한 제례를 올리며 제문을 읽던 곳이라고 한다. 또한 1950년 인민해방군 총사령관 주더(朱德)가 이곳에서 군사회의를 개최했다는 설명이 붙어 있다.

향전에서 더 올라가면 "자공(子貢)이 직접 황련목을 심었다(子貢手植楷)"라는 표석과 고목을 위해 만든 정자와 비석이 있다. 최근 '의로써 이득을 취하고, 이익으로 세상을 구제하는(以義取利, 以利濟世)', 유상(儒商)의 선구자로 몸값이 오르고 있는 자공은 공문10철(孔門十哲)의 한 명이다.

성격이 활달하고, 언변이 뛰어나 사마천은 <사기(史記)>에서 자공을 '이언교사(利言巧辭)'로 묘사하고 있다. 장사와 상술에 밝아 공자의 경제적 후원자 역할을 했으며, 멀리 교역을 떠나 공자의 임종을 지키지 못하고 뒤늦게 돌아와 다른 제자들은 3년상을 치르고 돌아갔지만, 6년 동안 공자의 묘를 지키며 눈물로 나무를 심고 키웠다고 한다.

자공(子貢)이 직접 황련목을 심었다(子貢手植楷) 자공이 심은 나무가 1882년 번개로 불타 죽은 것을 그루터기만 보존하고 있다.
▲ 자공(子貢)이 직접 황련목을 심었다(子貢手植楷) 자공이 심은 나무가 1882년 번개로 불타 죽은 것을 그루터기만 보존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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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희제가 자공의 노력을 기념하여 작은 정자와 비석을 세우면서 자공의 눈물을 비석에 새겼는데 문화대혁명 때 홍위병이 훼손하였다고 한다. 호사가들은 자공의 눈물이 홍위병 덕분에 말랐다고 말한다. 자공이 심은 나무가 1882년 번개로 불타 죽은 것을 그루터기만 보존하고 있다. 그 바로 곁으로 역대 황제들이 쉬던 작은 정자들이 세 개 있는데 송대의 진종(眞宗), 청대의 강희제와 건륭제가 이곳에서 쉬었다고 한다.

공자의 묘로 가는 길 오른쪽에 공자의 손자 공급(孔伋, 子思, <중용>의 저자)의 묘가 있고, 그 앞으로 공자의 아들 공리(孔鯉)의 묘가 있다. 공자가 휴자포손(携子抱孫), 즉 아들과 손잡고 손자를 껴안고 있는 모습이다. 공자가 젊은 나이에 아들을 낳았을 때 노나라의 애공이 잉어를 선물로 보내와 아들 이름을 잉어라는 의미의 리(鯉)라고 지었는데 덕분에 취푸 사람들은 잉어를 먹지 않게 되었다고 한다. 어쩔 수 없이 잉어를 먹을 때면 잉어라 하지 않고 홍어(紅魚)라고 부르며 먹는다고 한다.

공자의 무덤 앞에 놓인 비석 금대 1244년 세운 선성묘(宣聖墓), 1413년 세워진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墓)’가 각각 적혀 있다.
▲ 공자의 무덤 앞에 놓인 비석 금대 1244년 세운 선성묘(宣聖墓), 1413년 세워진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墓)’가 각각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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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자의 무덤 앞 묘 앞 제단에는 향을 피우는 사람, 꽃다발을 공양하는 사람, 공자의 기운을 전하려는 듯 아이를 쓰다듬는 사람 등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 공자의 무덤 앞 묘 앞 제단에는 향을 피우는 사람, 꽃다발을 공양하는 사람, 공자의 기운을 전하려는 듯 아이를 쓰다듬는 사람 등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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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479년 공자가 죽자, 노나라 애공이 이곳에 장사지냈다고 하는데, 당시에는 분묘가 없었는데 공자에 대한 평가가 높아지면서 묘의 크기도 커지고 분묘의 높이도 높아졌다고 한다. 묘 앞에는 두 개의 비석이 있는데 작은 비석은 금대 1244년 공자 50대손 공원(孔元)이 세운 것으로 선성묘(宣聖墓)라고 적혀 있고, 명대 1413년 세워진 큰 비석에는 서예가 황양정(黃養正)이 쓴 '대성지성문선왕묘(大成至聖文宣王墓)'가 적혀 있다.

왕(王)자의 세로획을 길게 늘여 앞의 비석에 마지막 가로획이 잘 보이지 않게 해 간(干)자처럼 보이게 도안하였다. 황제가 공자에게 제례를 올릴 때 王자를 보고 불쾌해 하는 것을 막기 위한 장치였던 셈이다. 지금은 황제보다 높은 평가와 호사를 누리고 있으니 앞의 가림막 비석을 당당히 없애도 될 것 같은 느낌이다. 묘 앞 제단에는 향을 피우는 사람, 꽃다발을 공양하는 사람, 공자의 기운을 전하려는 듯 아이를 쓰다듬는 사람 등으로 발 디딜 틈이 없다.

공자의 묘 앞에는 자공이 움막을 짓고 6년이나 공자의 시묘살이를 한 것을 기념한 '자공려묘처(子貢廬墓處)'가 있다. 자공의 묘는 허난(河南)성 따피산(大伾山) 인근에 있는데, 어쩌면 이 공림에서 더 많은 사람들의 환대와 추모를 받는 것 같다.

2500년 전에 죽은 공자가 자본주의보다 더 돈을 밝히는 사회주의 중국에서 오늘날 이렇게 뜨겁게 환영받는 것에 대해,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를 대체할 사회 통합의 기제로서, 중화민족주의를 강화하는 수단으로, 유교라는 문화콘텐츠를 중국의 정체성으로 강화하기 위한 도구로서 공자가 필요하기 때문이라는 등의 해석이 분분하다.

공자의 고향 마을 취푸가 세계 유교문화의 성지로 부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꼭 국경절 연휴에 몰려든 수많은 인파 탓만은 아닐 것이다. 중국 최고지도부가 이미 '공자 모시기'에 적극 나선 마당이니 우리 공자님 당분간 비행기 좀 타셔야 할 듯하다. 어느새 지붕 없는 박물관 취푸의 서편 하늘에 석양이 곱게 물들고 있다. 그 노을 너머로 공자의 행복한 미소가 퍼지며 고향 마을 취푸를 포근히 감싼다.


태그:#공자, #공림, #취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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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베이징에서 3년, 산둥성 린이(臨沂)에서 1년 살면서 보고 들은 것들을 학생들에게 들려줍니다. 거대한 중국바닷가를 향해 끊임없이 낚시대를 드리우며 심연의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건져올리려 노력합니다. 저서로 <중국에는 왜 갔어>, <무늬가 있는 중국어>가 있고, 최근에는 책을 읽고 밑줄 긋는 일에 빠져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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