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C카드로 항공료 567만 원을 결제했고 2006년 국회의원 정치후원금으로 충당했다."(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측 해명)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은 지난 9일 스스로 목숨을 끊기 전에 작성한 메모에다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에게 '10만불'을 건넸다고 적었다. 여기에는 '2006. 9. 26 벨기에'라는 문구도 함께 적혀 있었다.
'10만불'과 '2006. 9. 26 벨기에'라는 메모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2006년도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박 대통령, 김기춘-최경환과 함께 벨기에, 독일 순방
지난 2006년 당시 박근혜 대통령은 이명박 전 대통령과 함께 한나라당의 유력한 대선주자였다. 박 대통령은 9월 14일 여의도에 개인 사무실을 연 데 이어 23일부터는 독일 아데나워재단 초청으로 벨기에와 독일을 방문했다. 9박 10일 일정의 유럽순방은 본격적인 대권행보의 신호탄으로 해석됐다.
김기춘·최경환 당시 한나라당 의원이 박 대통령의 유럽순방에 동행했다. 두 사람은 박근혜 정부 출범 이후 청와대 비서실장과 경제부총리에 발탁되며 권력 실세로 떠올랐다.
'성완종 메모'에 적힌 '2006. 9. 26 벨기에'는 박 대통령의 첫 목적지인 벨기에 브뤼셀을 뜻한다. 박 대통령은 9월 25일부터 26일까지(현지 시간) 벨기에 브뤼셀에 머물며 한국전 참전기념탑에 헌화하고, 유럽연합(EU)과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본부 간부들을 만났다.
박 대통령은 9월 27일 독일 베를린에 도착했고, 다음날(9월 28일)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인 앙겔라 메르켈 총리를 만났다. 박 대통령이 한나라당 부총재 시절이던 지난 2000년 기민당 당수였던 메르켈 총리를 처음 만난 지 6년 만에 재회한 것이다. 박 대통령은 메르켈 총리가 추진하는 '작은 정부' 정책에 "제가 한나라당 대표로 있을 때 당이 추구한 노선과 같다"라고 공감을 나타냈다.
이후 박 대통령은 지난 1964년 12월 부친인 박정희 전 대통령이 찾았던 함보른 탄광을 방문했고, 1960년대 독일로 파견된 광부, 간호사 출신 교포들이 참여하는 재독한인회 주최 환영회(프랑크푸르트)에도 참석했다. 유럽순방에 동행했던 김기춘 전 실장은 당시 "박 전 대표는 아버지의 강인함과 어머니의 유연함을 골고루 갖추고 있다"라고 평가한 바 있다.
잇따른 김기춘 전 실장의 거짓말... "내가 착각했던 것 같다"'성완종 메모'에 적힌 '김기춘 10만불'은 박 대통령의 본격적 대선행보로 기획된 유럽순방과 관련돼 있다. 성완종 전 회장은 목숨을 끊기 직전 <경향신문>과 한 인터뷰에서 "김 전 실장이 2006년 9월 VIP(박근혜 대통령) 모시고 독일 갈 때 10만 달러를 바꿔서 롯데호텔 헬스클럽에서 전달했다"라고 주장했다. 일방적 주장이라고 하기에는 꽤 구체적인 증언이고, 박 대통령의 유럽순방 일정과도 거의 정확하게 일치한다.
이에 김기춘 전 실장은 성완종 메모와 인터뷰가 공개된 직후 "당시 모든 방문 비용은 아데나워재단이 댔다"라며 "내가 항공료나 체재비를 내지도 않았는데 10만 달러나 되는 거액을 받을 이유가 없다"라고 전면 부인했다.
하지만 이러한 해명은 금방 거짓말로 드러났다. 당시 박 대통령을 초청한 아데나워재단이 <한겨레>에 보낸 이메일 답변서에서 "재단은 대표단(박 대통령 일행)이 베를린과 브뤼셀에 머무는 기간 동안 숙식과 교통비용을 제공했을 뿐 한국-유럽 구간 항공료는 지원하지 않았다"라고 밝힌 것이다.
게다가 이에 앞서 '성완종 다이어리'(2012년 4월-2015년 2월)를 통해 김 전 실장이 비서실장에 재임하던 중에 세 차례나 성 전 회장을 만난 사실까지 확인됐다. 결국 "재임 중 한번도 만난 일이 없다"라고 해명했던 김 전 실장이 "내가 착각했던 것 같다, 만난 것은 사실이다"라고 실토하기에 이르렀다.
김 전 실장의 해명이 잇달아 거짓말로 드러나자 '10만 달러 수수' 의혹은 더욱 커졌다. 야당은 "1인당 수백만 원에 이르는 박 대통령 일행의 항공료에 성 전 회장이 전달한 10만 달러의 돈이 쓰였을 개연성이 높아졌다"라고 공세를 폈다.
567만여 원 항공료 구입, 2006년 10월 정치자금에서 충당
이에 김 전 실장 측은 "BC카드로 항공료 567만 원을 결제했고 2006년 국회의원 정치후원금으로 충당했다"라고 말을 바꾸었다. 그렇다면 이것은 '사실'일까?
<오마이뉴스>가 28일 정보공개청구를 통해 중앙선관위로부터 받은 '정치자금 수입·지출부'(2004년-2008년)에 따르면, 김 전 실장은 2006년 10월 23일 '항공권 구입'(대한항공)으로 567만3300원을 지출했다고 신고했다. 같은 해 9월 신용카드로 지출한 항공료를 자신의 정치자금에서 충당한 것이다.
이로써 김 전 실장은 유럽순방 항공료 의혹에서 벗어났다. 하지만 이것이 곧바로 10만 달러 수수 의혹에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이와 관련한 검찰수사가 여전히 남아 있다.
한편 2006년도 김 전 실장의 정치자금(수입)은 2억9577만여 원이었고, 이 가운데 약 9068만 원을 지출해 2억여 원이 남았다고 중앙선관위에 신고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