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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이 대북 확성기 철거를 요구한 시한인 22일 오후 5시를 앞두고 한반도의 군사적 긴장 이 최정점으로 치닫고 있다.

북한은 지난 20일 '대북심리전 방송을 중지하고 48시간 이내에 모든 심리전 수단을 전면 철거하지 않는다면 강력한 군사적 행동으로 넘어간다'는 최고사령부 명의의 전통문을 보내온 데 이어, 21일 밤에는 "전면전도 불사하겠다"는 외무성 성명을 발표했다.

북한의 위협에 대해 국방부는 대북 심리전 확성기 방송을 계속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한민구 국방장관은 대국민 담화를 통해 "대북 확성기 방송은 지뢰 도발에 따른 우리의 응당한 조치"라며 "만약 이를 구실로 추가 도발을 해온다면 우리 군은 이미 경고한 대로 가차 없이 단호하게 응징해 혹독한 대가를 치르게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남북이 모두 '전면전 불사' '단호한 응징'을 다짐하고 있는 국면이다. 1953년 7월 정전협정 체결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가 군사적 위기 상황이 가장 심각하게 고조되었던 때는 지난 1976년 8월과 1994년 6월, 그리고 지난 2013년 4월로 꼽힌다. 당시에는 어떤 일들이 벌어졌을까?

전쟁 일보직전까지 갔던 1976년 8월 도끼만행 사건

도끼 만행사건 현장 공개 1976년 8월 18일 도끼 만행의 현장이, 10년 만인 1986년 8월 18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미루나무는 미군 2명이 살해된 뒤 가지를 모두 잘려 둥지만 남은 채 방부 처리돼 보존되고 있다. 당시 사건을 목격했던 작업원 곽희환씨가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 도끼 만행사건 현장 공개 1976년 8월 18일 도끼 만행의 현장이, 10년 만인 1986년 8월 18일 처음으로 공개됐다. 미루나무는 미군 2명이 살해된 뒤 가지를 모두 잘려 둥지만 남은 채 방부 처리돼 보존되고 있다. 당시 사건을 목격했던 작업원 곽희환씨가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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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6년 8월 18일 오전, 판문점 공동경비구역 안에서 미군 장교 2명이 북한 경비병들에게 살해당하는 사상 초유의 일이 발생했다.

이 사건으로 우리 측 경비초소의 시야를 가리는 미루나무 가지치기 작업을 감독하던 미군 경비중대장 아서 보니파스 대위와 마크 바레트 중위가 목숨을 잃었다. 이른바 '판문점 도끼 만행 사건'은 한반도를 전쟁 직전의 상황으로 몰고 갔다.

휴가차 일본에 가 있던 주한미군 사령관 스틸웰 장군은 전투기 뒷좌석을 얻어 타고 급하게 돌아와 '데프콘3 (Defense Readiness Condition 3)'를 발동하고, 휴가 중이거나 부대를 떠나 있는 모든 미군 장병에게 즉시 복귀하도록 명령했다. 한국전쟁 이후 '데프콘 3'가 발령된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다.

이에 맞서 북한도 김일성 조선인민군 최고 사령관 명의로 전 인민군과 로농적위대, 붉은 청년 근위대 등에 전투태세를 갖출 것을 명령하는 지시를 하달했다. 북한 전역에 준전시상태를 뜻하는 '북풍 1호'가 선포됐다. 사건 이틀 뒤인 8월 20일, 박정희 대통령은 육군 제3사관학교 졸업 훈시를 통해 "미친개한테는 몽둥이가 필요하다"고 공언했다.

미군 장교 2명이 살해된 사건에 분노한 미국 정부는 미루나무 절단을 결정했다. 도끼질 한 번에 스물세 그루의 나무를 잘라냈다던 미국의 전설적인 나무꾼의 이름을 따 '폴 버니언 작전(Operation Paul Bunyan)'으로 명명된 이 작전은, 8월 21일 전격 실행됐다.

오전 7시, 유엔사 판문점 경비대 1개 소대와 제1 특전여단 64명의 호위를 받으면서 미군 공병대원 16명이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으로 진입했다. 이들은 군사분계선 남쪽 '돌아오지 않는 다리'로 가는 도로변 두 개의 북한 측 초소에서 차단기들을 제거하고 문제의 미루나무에 도착해서 나무를 잘라내기 시작했다.

같은 시각 미 7함대 소속의 항공모함 미드웨이 전투단이 동해를 북상하여 북한 해역으로 이동했고, 미 본토에서는 F-111 전폭기 20대가 날아왔다. 또 괌에서 B-52 폭격기, 오키나와에서 발진한 F-4 팬텀 전투기 24대가 한반도 상공을 선회했다.

미국은 교전 상황에 대비한 구체적 전쟁계획인 우발계획까지 만들어 놓고 있었다. 이 계획에 따르면 교전 사태가 발생할 경우 한국군과 미군 포병이 개성 인근의 인민군 막사에 대한 포격을 시행하고, 전쟁이 확대될 경우 개성과 연백평야에 대한 탈환, 북한군 기갑부대가 남진할 경우 전술핵의 사용까지도 염두에 두고 있었다.

오전 7시 48분 미루나무는 밑동만 남기고 완전히 제거됐다. 이날 정오, 군사정전위원회 북측 수석대표 한재경 소장은 김일성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명의의 구두 메시지를 UN사 측에 전달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에서 이번에 사건이 일어나서 유감"이라는 김일성 주석의 메시지를 사실상의 사과로 받아들인 미국이 사건을 일단락 지으면서, 휴전 이후 최대의 전쟁위기를 맞았던 한반도는 파국의 위험에서 벗어났다. 이 사건 이후 쌍방은 판문점 공동경비지구를 남과 북으로 분할경비하기로 합의하고, 군사경계선을 표시로 북한군과 유엔군이 각각 경비 책임을 지게 되었다.

라면 사재기, 환전 소동 빚어졌던 1994년 6월 위기

남북적 3차 실무회담 지난 1985년 8월 22일, 남북적 3차 실무회담. 남측 송영대 대표(오른쪽)와 북측 박영수 대표가 합의문을 교환하고 있다. 후에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한 인물이 박영수다.
▲ 남북적 3차 실무회담 지난 1985년 8월 22일, 남북적 3차 실무회담. 남측 송영대 대표(오른쪽)와 북측 박영수 대표가 합의문을 교환하고 있다. 후에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한 인물이 박영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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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6월에도 한반도는 전쟁의 문턱까지 다가갔다. 1993년 3월, 북한은 일방적으로 NPT(핵확산금지조약) 탈퇴를 선언했다. 핵확산 금지를 추진하던 미국에게, 북한의 NPT 탈퇴는 중대한 도전이었다.

밀고 당기는 물밑 협상 끝에 1993년 6월 2일 북·미 고위급회담이 개최됐다. 회담 결과 일단 북한의 NPT 탈퇴는 유보됐다. 우여곡절 끝에 1994년 2월 18일, 북한과 미국은 팀스피릿 훈련 중단, 국제원자력기구 사찰, 남북 특사 교환, 북미 회담 개회 발표를 주요 골자로 하는 이른바 '슈퍼 화요일' 합의문을 도출해냈다.

하지만 한미 강경파의 반발로 고위급 회담에 진척이 없는 가운데, 1994년 3월 19일 이른바 '서울 불바다' 발언이 터져 나왔다.

당시 판문점에서 개최된 남북접촉에서 박영수 북측 회담대표는 송영대 남측 대표에게 "여기서 서울이 멀지 않다, 전쟁이 일어나면 불바다가 되고 만다"고 말했다. 박영수의 발언을 담은 폐쇄회로(CCTV) 녹화테이프는 그때까지 한 번도 공개되지 않았던 남북회담의 관례를 깨고 각 방송사에 전해져 전파를 탔다. 이 일로 이미 예정되어 있던 3차 북미 회담도, 슈퍼 화요일 합의도 허공으로 날아가 버렸다.

1994년 5월 4일 영변 원자로에서 연료봉을 추출해 재처리를 강행하겠다면서 핵 카드를 전면에 꺼내 들었던 북한은 그해 6월 13일 국제원자력기구(IAEA)를 탈퇴했다.

북한의 국제원자력기구 탈퇴 선언 직후 전국에선 생필품 사재기 열풍이 몰아닥쳤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영동백화점에선 하루 30상자씩 나가던 라면이 14·15일 이틀 동안 200상자 넘게 팔렸다. 압구정동 아파트 단지 부근의 한 시중은행 지점에서는 평소 3만 달러 정도였던 외화 환전액이 14일 5만 달러, 15일에는 12만 달러로 크게 늘어났다.

미국에서도 군사적 해결방안이 힘이 실렸고, 영변 핵시설에 대한 폭격 방안이 신중하게 검토됐다. 당시 상황에 대해 윌리엄 페리 전 미국 국방장관은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나는 살리카시빌리 합참의장과 주한미군 사령관 게리 럭 장군에게 작전계획 5027을 점검할 것을 지시했고, 북한 핵시설 제거를 위한 비상계획을 재점검하도록 지시했다. 우리는 비상계획을 통해 북한 핵시설을 파괴할 수 있지만, 문제는 북한의 대남보복 가능성이었다…. (중략) 1994년 6월 14일 군 수뇌부 회의를 소집했는데 이 자리에서 게리 럭 주한미군 사령관은 작전계획 5027 실행방안에 대해 상세히 보고했다. 나는 대량살상무기 사용이 포함될 수 있는 전쟁이 일어날 직전에 와 있음을 직감했다." - 윌리엄 페리 회고록 <Preventive Defense: A New Security Strategy for America>

당시 미국은 한반도에서 새로운 전쟁이 발발한다면 미군 3만 명, 한국군 45만 명, 민간인 100만 명이 죽거나 다치고, 한국 경제의 피해 규모는 1조 달러에 이를 것으로 예상했다. 주한 미 대사관은 자국민 철수 계획을 점검하고, 주한 미군 기지에는 패트리엇 미사일이 배치되었다. CNN은 전쟁 상황을 보도할 중계팀을 한국으로 급파했다.

그해 6월 16일 백악관에서 미 정부 고위관료들과 군 관계자들이 모여서 군사적 해결책을 최종적으로 논의하던 시각,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이 방북했다. 같은 날 한국에선 민방위 훈련이 전시 대비 훈련으로 전환되어 실시됐다.

한반도를 뜨겁게 달궜던 위기는 카터 전 대통령이 김일성 주석과 '핵 활동 동결' 합의를 끌어내면서 극적인 돌파구를 찾았다. 그해 10월 이른바 '제네바 기본합의문'이 탄생하면서 북핵 위기는 일단락된다.

미 전략무기 총동원 됐던 2013년 봄 '한반도 군사위기'

북한 로켓 발사 한 달 2012년 12월 12일,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로켓 발사장에서 '광명성 3호' 2호기를 실은 장거리 로켓 '은하 3호' 발사모습.
▲ 북한 로켓 발사 한 달 2012년 12월 12일, 평안북도 철산군 동창리 로켓 발사장에서 '광명성 3호' 2호기를 실은 장거리 로켓 '은하 3호' 발사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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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정부가 출범한 2013년 봄 한반도에는 또다시 전쟁의 암운이 몰려왔다.

2012년 12월 12일, 북한은 '광명성 3호' 위성을 실은 장거리 로켓 '은하 3호' 발사에 성공했다. 이에 대한 '처벌'로 유엔이 2013년 1월, 대북제재 결의안 2087호를 내놓았다. 북한은 이에 반발해 3차 핵실험을 함으로써 위기가 촉발됐다.

2013년 4월 한미 양국이 키리졸브·독수리 연합군사훈련에 돌입하자, 북한은 한반도에서 전쟁발발 가능성이 커졌다며 강경 대응에 나섰다.

당시 미국은 훈련 기간에 핵무기 장착이 가능한 B-52 전략폭격기, B-2 스텔스 폭격기, 샤이엔 공격형 핵잠수함(USS Cheyenne), 현존 최고의 전투기라는 F-22 랩터(Raptor)를 출격시켰다. 전략 무기를 이례적으로 공개한 미국에 대해 북한도 전략로켓군과 장거리 포병부대 등 야전포병군에 1호 전투 근무태세를 하달하고 북-미와 남-북 모든 통신선을 차단, 전쟁위협을 고조시켰다.

북한은 4월 5일 무수단 미사일 2기를 동해안으로 옮긴 뒤 발사대 장착 차량에 실어 원산 부근에 은폐했다. 북한은 같은 4월 5일과 7일 평양주재 외국공관과 유엔기구들에 철수를 권고했고, 8일에는 김양건 대남비서가 개성공단을 방문해 북측 노동자 전원을 철수시켰다.

'전쟁 개시자'란 별명이 붙은 NBC 리처드 엥겔 기자 등 25개국 280여 명의 분쟁취재 전문기자들이 입국해 경기도 파주의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에서 전쟁위기가 고조되고 있는 한반도 상황을 취재했다.

일련의 북한의 예상 밖 강수를 접한 미국은 4월 7일 이틀 뒤로 예정돼 있던 ICBM '미니트맨 3'의 발사실험을 5월까지 연기한다고 발표했다. 북한을 과도하게 자극함으로써 생겨나는 오해나 오산을 피하기 위해서였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 뒤 한미 양국은 북한에 대화를 제의했다.

4월 11일 한국은 '통일부 장관 성명'을 통해 대화를 촉구했고, 오바마 대통령도 반기문 유엔사무총장과의 면담에서 "지금은 북한이 그동안 취해왔던 호전적인 접근을 끝내고 온도를 낮춰야 할 때"라면서, "미국은 이 문제들에 대한 외교적인 해결 노력을 지속할 것"이라고 천명했다.

그해 5월 15일까지 한미연합 공군·대잠수함·해상 훈련이 진행되고 북한이 이에 대한 대응 차원으로 5월 18·19일 동해안 일대에서 단거리 미사일 6발 발사한 것을 끝으로, 2013년 봄의 한반도 군사위기는 막을 내렸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한반도 위기#포격 도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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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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