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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取중眞담]은 <오마이뉴스> 상근기자들이 취재과정에서 겪은 후일담이나 비화, 에피소드 등을 자유로운 방식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코너입니다. [편집자말]
 최순실 국정 농단 개입 의혹을 받는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지난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굳은 표정으로 식탁에 앉아 있다. 이날 김 전 비서실장은 외부 일정 없이 자택에 머문 것으로 확인됐다.
최순실 국정 농단 개입 의혹을 받는 김기춘 전 대통령비서실장이 지난 28일 오후 서울 종로구 평창동 자택에서 굳은 표정으로 식탁에 앉아 있다. 이날 김 전 비서실장은 외부 일정 없이 자택에 머문 것으로 확인됐다. ⓒ 연합뉴스

[기사 수정 : 30일 오전 10시 50분]

"어느 매체의 누구라고 하셨죠?"

그는 역시 노회했다.

2001년 12월 8일, 한국헌법학회가 주최한 '역사와 헌법' 학술대회에서 한태연 전 서울법대 교수가 유신 헌법 제정 과정과 이 과정에서 김기춘이 한 역할("유신헌법은 박정희가 구상하고, 신직수·김기춘이 안을 만들었다")에 대해 상세하게 증언했다.

당시 헌법학회장으로서 이 행사를 주최한 안경환 교수는 "유신헌법 제정 당시 기록이나 관련 자료가 전혀 남아 있지 않은 상태에서, 한 전 교수의 증언은 상당한 역사적 가치가 있다"고 평가했다. 안 교수의 말대로, 그동안 베일에 가려져 있던 유신 헌법 제정 과정이 처음으로 자세하게 확인된 것이었다.

이 증언에 대한 당사자의 반론을 들어야 했다. 핸드폰 번호를 몰라 국회의원 수첩에 나온 자택으로 전화를 했고, 뜻밖에도 그가 직접 받았다. 휴일에 집으로 느닷없이 걸려온 전화였지만 그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는 기색이었다. 거꾸로 내 신상을 물어보면서 여유를 찾은 뒤, 미리 준비한 듯 반박했다. 한 전 교수의 기억에 착오가 있다는 것이었다.

대학 3학년 때인 1960년에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한 이후 '육영수 여사 피격 사건'수사를 거쳐 유신 전성기에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장을 지낸 뒤 검찰총장과 법무장관까지 이미 섭렵한, 재선 의원이었던 그로서는 그다지 놀라운 상황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김기춘의 반박과 달리, 1972년 유신 헌법 제정 때 그가 (법무부) 과장이었다는 부분만 빼면, 한 전 교수의 주장은 대부분 당시 상황과 부합한다. 그는 유신헌법 공표 다음 해인 1973년 4월 초에 법무부 '인권옹호과' 과장(부장검사급)으로 승진한다. 주 승진자들이 사시 8회였던 데 비해 그는 무려 4기수나 아래인 12회였다. 이 때문에 "유신체제의 법령 입법과 개정의 공로와 실력이 높이 평가되어 유례없이 발탁"되었다는 해설기사가 나오기도 했다.

일대 위기 '초원복집 사건'... 헌재 위헌 신청으로 돌파

 1992년 12월 21일, '부산 기관장 모임' 고발 사건과 관련 대통령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되어 서초동 검찰청사에 출두한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1992년 12월 21일, '부산 기관장 모임' 고발 사건과 관련 대통령 선거법 위반 혐의로 고발되어 서초동 검찰청사에 출두한 김기춘 전 법무부장관이 기자들의 질문에 답변하고 있다. ⓒ 연합뉴스

그는 독재와 지역주의라는 한국 현대사의 음지에서 맹활약하면서 몇 번의 위기에 빠졌다. '우리가 남이가'라는 유행어를 만든, 1992년 말 대선 직전에 터진 '초원복집 사건'은 박정희 대통령이 '김똘똘'이라고 불렀다는 '천하의 김기춘'도 휘청거리게 만들었다.

당시 검찰은 초원복집에 모인 기관장들은 "사적 모임에서 나눈 대화를 가지고 처벌할 수는 없다"며 무혐의 처분하고, 모임을 주재한 김기춘만 불구속 기소한 뒤 징역 1년 형을 구형했다. 사건 두 달 전까지 법무부 장관이었던 그는 여기서 '신공'을 발휘했다. 자신에게 적용된 '선거운동원이 아닌 사람의 선거운동 금지조항'(대통령선거법 36조 1항)이 '표현의 자유와 참정권'을 제한하고 있다며 헌법재판소에 위헌 신청을 제기한 것이다. 결국 그 이듬해 헌법재판소가 이에 대해 위헌 결정을 했고, 이에 따라 검찰이 공소를 취하하면서 무죄가 됐다. 호적에 빨간줄이 그어질 뻔한 아찔한 상황을, 정권의 힘과 '법률 기술자'의 지식으로 돌파한 것이다.

2004년 국회 법제사법위원장으로서 노무현 대통령의 탄핵을 주도하면서 세간의 관심에 중심에 섰던 그는 2008년 총선에 낙천하면서 역사에서 사라지는 듯했다. 그러나 2013년 8월 74세 나이로 박근혜 대통령의 비서실장을 맡으며 '기춘대원군'으로 군림한다. 2015년 2월 청와대를 나온 뒤 검찰 수사 중 자살한 성완종 전 경남기업 회장의 주머니에서 나온 메모에서 그에게 10만 불을 줬다는 대목이 나오면서, 검찰 수사 대상이 됐으나 메모 이외에 다른 물증이 나타나지 않아 결국 무혐의 처리됐다.

'최순실 게이트'맞아 다시 '신공'... 그러나 YS정부 초기와는 상황 달라

 2일 오전 세종문화회관에서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사업 추진위'(위원장 정홍원 전 총리) 출범식이 열렸다. 박근혜 대통령 최장수 비서실장을 지낸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비선실세' 최순실 등 현안에 대한 질문을 쏟아내는 기자들을 피해 다니고 있다.
2일 오전 세종문화회관에서 '박정희 탄생 100돌 기념사업 추진위'(위원장 정홍원 전 총리) 출범식이 열렸다. 박근혜 대통령 최장수 비서실장을 지낸 김기춘 전 비서실장이 '비선실세' 최순실 등 현안에 대한 질문을 쏟아내는 기자들을 피해 다니고 있다. ⓒ 권우성

김기춘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와 관련한 '직권 남용' 혐의로 수사 대상이 되면서 다시 '신공'을 준비하고 있다. 최순실씨를 "알지도, 만난 적도, 전화한 적도 없다"고 전면 부인하고 나선 것이다. 최씨와 박 대통령의 '문고리 3인방', 안종범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국정농단에 대해서도 "모르는 것이 무능하다고 하면 할 수 없지만, 실제로 몰랐다. 자괴감이 든다"고 할 정도의 '자학 모드'를 연출하고 있다. 사법처리를 피하기 위해 차라리 '무능'을 선택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최순실의 딸 정유라를 돌봐주라고 지시했다는 김종 전 문체부 2차관에 대해서는 "사실이 아니"라며 "머리가 돈 사람"이라고 반박했다. 최씨의 측근으로 알려진 차은택 감독이 "최씨의 지시로 김 전 실장을 만났다"고 한 데 대해서는 "박 대통령께서 만나보라고 해서 비서실장 공관으로 불러 만난 것"이라면서 박 대통령에게 혐의를 떠넘기기까지 했다. 박정희 가문에 대를 이어 충성해오던 그가 자기 살길을 찾기 시작한 것이다.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가 "법률 미꾸라지이자, 형량을 즉석에서 계산할 수 있는 형량 계산기"라고 비꼬고, 대학 3학년 초 만 20세에 사법시험에 합격한 당대의 수재 안대희 전 대법관이 "판단력과 논리 구성이 대단하다. 말한 대로 적으면 바로 문장이 된다. 그 양반 아이큐는 170대"라고 평가하는 '법의 달인' 김기춘, 그는 이번 위기도 돌파할 수 있을까.

1992년 초원복집 사건 때와는 두 가지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우선 국민적 주목도와 분노가 그때보다 훨씬 강하다. 결정적으로 당시 그의 뒷배가 됐던 김영삼 정부가 출범 초기의 욱일승천하는 정권이었던 비해, 지금의 박근혜 정부는 대통령 스스로 조기 퇴진을 예고한 시한부 정권이라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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