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이 우리 결혼기념일이네!'지난 토요일(19일)은 저희 부부 결혼기념일이었습니다. 빈민운동가 부부를 인터뷰하던 중에 받은 아내의 카톡을 보고 결혼기념일인 것을 알았습니다. 깜박한 것만 해도 죈데 만취까지 했으니 보통 큰 죄가 아닙니다.
20년 넘게 빈민운동 현장을 지키는 서울대 출신 부부의 가슴 뜨거운 사랑 이야기를 들은 게 사달이었습니다. 김수영 시인의 눈빛을 닮은 순정파 사내와 누이처럼 따뜻한 미소를 머금은 여인의 순애보가 문제였습니다. 아내에게 용서를 구했습니다. 혀 꼬이는 말로 결혼 축하 케이크를 사가지고 귀가하겠다고, 가슴 뜨거운 사랑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말했습니다.
"소주에 취한 게 아니라 가문 세상을 적시는 순정에 취한거라오, 내 그대에게 돌아가서 가슴 뜨거운 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겠소."좋은 과학자가 꿈이었던 서울대 공대생의 인생을 바꾼 사건
서울대 전자공학과 93학번 남일 학생의 꿈은 과학자였습니다. 그냥 과학자보다는 행복한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하는 좋은 과학자가 되고 싶어 공대에 진학했습니다. 대학 2학년까지는 이 꿈을 잘 간직했는데 대학 3학년이던 1995년, 인생이 통째로 뒤바뀌는 사건을 만나면서 꿈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사건 발생 현장은 철거민 투쟁 현장이었습니다.
봉천동과 금호동 달동네 현장에선 철거 용역 깡패들이 행패를 부리고 있었고 철거 반대 투쟁을 하던 세입자 중에 한 사람이 분신하는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를 목격하기 전까지는 열심히만 하면 꿈을 이룰 수 있는 나라라고 믿었습니다. 그래서 대학 2학년까지는 묵묵히 공부했습니다. 그 사건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그의 꿈과 믿음은 깨지지 않았을 것입니다. 과학도의 고민이 깊어졌습니다.
무슨 세상이 이러지? 왜 이렇게 불공평하지? 가난한 사람들이 죽어가는데 아무도 보호하지 않지? 이런 세상을 외면하고 좋은 과학자가 될 수 있을까? 대학원에 가고 박사가 되는 게 나에게 무슨 의미지?1998년, 운동권 학생들이 현장을 거의 빠져나간 뒤였습니다. 그런데 운동에 나서지 않았고, 눈에도 잘 띄지도 않았고, 말도 별로 없던 그는 후배들과 함께 봉천동 달동네에 '다솜공부방'을 만들었습니다. 운동권 선배들은 공부방 선생이 아니라 공부방을 운영하겠다는 그에게 "무모한 일이니 하지 말라"고 말렸지만 소용없었습니다. 그는 거처를 아예 공부방으로 옮겼습니다.
"봉천동 달동네 사람들은 단칸방에서 아홉 혹은 열 식구가 살았습니다. 저 좁은 방에서 어떻게 다 잘 수 있을까? 아이들은 책상도 없는데 어디서 숙제를 할까? 의문이 들었습니다. 밤이 늦었는데도 공부방 아이들이 가려고 하지 않아서 친구들과 노는 재미로 그런 줄 알고 쫓아 보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집에 가봤자 엄마는 없고 술에 취한 아빠는 욕을 하거나 때리기 때문에 가기 싫어했던 것을 나중에 알았습니다. 부모들은 살기 힘들어서 아이들에게 관심 쏟을 겨를이 없고, 방치된 아이들은 일찌감치 연애를 하거나 몰려다니며 사고 쳤습니다. 내가 이런 상황이었으면 어떻게 됐을까? 내가 똑똑하고 잘나서 서울대 온 줄로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큰 부자는 아니었지만 공부방과 책상이 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부모로부터 사랑을 받으면서 성장했기 때문에 서울대 학생이 될 수 있었던 사실을 깨달으면서 아이들을 교화한다고 훈계한 게 부끄러웠습니다."지하철 행상으로 달동네 공부방 월세와 운영비 마련
공부방 운영을 책임진 그는 월세와 운영비를 마련해야 했습니다. 하지만 과외는 하지 않았습니다. 부잣집 자식들에게 지식을 팔아서 돈을 버는 것이 옳지 않다고 생각한 그는 지하철에서 주방기구와 머리 빗 등을 파는 행상을 시작했습니다. 파트타임으로 돈을 벌기에는 지하철 행상이 적당했고 돈벌이도 쏠쏠했습니다. 지하철 행상이 막히면 찹쌀떡을 팔러 다녔습니다. 후배들 몰래….
"승객 여러분 안녕하십니까. 수출 길이 막히는 바람에 회사가 어려워지면서 재고를 해결하기 위해 이렇게 좋은 품질의 빗과 주방기구를 싸게 드리려고 여러분을 찾아뵙게 됐습니다."그는 행상 당시를 술술 재현했습니다. 인생 막다른 길에 몰린 사람들이 생존을 위해 선택하는 게 지하철 행상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말도 없고, 키도 큰 서울대 공대생에게 지하철 행상이 어울릴 것 같지 않았는데 선전 말투를 들으니 묘하게도 어울렸습니다. 그는 하루에 10만 원 정도 벌었다고 했습니다.
"요새는 공익요원들이 지하철 행상을 단속을 하는데 제가 행상하던 1998년도에는 청원경찰 아저씨들이 단속했습니다. IMF 이후 사는 게 힘든 시절이어서 그랬는지 적당히 눈감아주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청원경찰 아저씨들도 실적을 올려야 하기 때문에 일주일에 한 번은 단속했습니다. 그래서 몇 월, 며칠, 몇 시에 단속을 당하기로 약속하고 만났습니다."아, 그 시절엔 그랬구나. 어려운 사람끼리 눈감아주었구나.
"일주일에 한 번은 파출소로 잡혀가고 2~3주일에 한 번은 법원에 넘겨져 즉결심판을 받았습니다. 판사가 즉결심판 대상자들을 한 줄로 세워놓고 속전속결로 처리했는데 저의 차례가 되자 서류와 저를 훑어보다가 '서울대 학생이 왜 이런 일을? 다른 알바하세요!'라면서 과태료 3만 원을 때렸습니다. 다른 행상들에겐 10만원을 때렸는데 저는 3만 원이었습니다. 서울대 학생이라고 봐준 거였습니다. 서울대 학생이란 특혜에서 벗어나려고 그렇게 노력했는데 도저히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후배들에게 알리는 게 불편해서 몰래 지하철 행상을 했는데 이런 과정을 통해 들키고 말았습니다. 후배들은 공부방 운영비를 마련하기 위해 대학 축제에서 주점을 운영하기도 했습니다."빈민 운동하는 선배가 행복해보여 못 떠났습니다!
그는 '특별함' 혹은 '특혜'라는 단어를 몹시 싫어합니다. 주변의 서울대 공대생들은 군 입대 대신에 연구원을 선택했지만 그는 평범해지고 싶어 군 입대를 선택했습니다. 더 이상 입대 연기를 할 수 없었던 그는 후배들에게 공부방을 물려주고 1998년 입대했다가 2001년 제대했습니다. 봉천동을 다시 찾아갔더니 재개발이 되면서 달동네와 공부방이 없어졌습니다. 이제 그만 떠나도 누가 뭐라고 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가난한 동네를 떠나지 못했습니다.
"이 사람 때문에 못 떠났습니다. 지금은 부부지만 그때는 선배였습니다. 선배는 그때 '관악사회복지'에서 활동했는데 주민들이 무척 좋아했습니다. 물론, 지금도 주민들에게 인기가 많습니다. 그렇게 사랑하며 사는 모습이 행복해보여서 '홍선 선배처럼 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선배였다가 아내가 된 홍선(46)씨는 시골교회 목회자의 딸로 서울대 농대 91학번입니다. 대학 새내기 시절에 봉천동 공부방 활동을 하다 빈민운동에 뛰어든 홍선씨는 활동가로 눈여겨 두었던 후배 남일(44)씨를 '관악사회복지'에 끌어들이기 위해 영화를 함께 보러갔습니다.
"영국 북부 탄광촌 출신 소년이 발레의 꿈에 도전한다는 내용의 <빌리 엘리어트>라는 영화를 보러갔는데 남일씨가 막 울었어요. 꿈을 펼치지 못하는 공부방 아이들이 연상돼서 그랬을 거예요. 남일씨는 겉으론 무뚝뚝하지만 가난한 사람들 특히, 아이들에겐 무척 따뜻한 사람이에요. 일을 하면 몸을 사리지 않고 묵묵히 해내는 사람이에요. 그래서 폐병에 걸리고 말았어요."
이들의 빈민운동은 철저했습니다. 자신보다 가난하고 병든 이웃을 더 섬겼습니다. 가난한 주민들보다 잘 먹거나, 잘 입거나, 잘 살거나, 잘난 체 하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었습니다. 자발적 가난을 선택한 이들은 성직자 못지않게 경건했습니다. 그렇게 절제하고 헌신하다 남일씨가 쓰러진 것입니다.
"선배(홍선)가 일을 무지하게 시키기도 했지만 일에 몰두하면 먹는 것을 신경 쓰지 않을 정도로 혹사시키는 습관이 문제였습니다. 다를 힘들게 일하는데 저의 몸만 관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러다 폐병에 걸렸습니다. 그러자 선배(홍선)가 침구를 배워가지고 와서 2년 동안 매일 뜸을 놔주었습니다. 병이 들어서 외롭고 힘들어 그랬는지 사랑의 감정이 생겼습니다."홍선씨는 결혼하면 빈민운동에 방해가 될까봐 결혼하지 않으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사랑이 마음대로 되던가요. 사랑이 아니면 어떻게 폐병 걸린 사내를 2년 동안이나 간병할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을 온전히 사랑하지 않으면서 어떻게 만인을 사랑할 수 있을까요. 두 사람은 동지애 속에서 사랑을 싹 틔웠고 그 사랑이 폐병으로 쓰러진 순정의 사내를 일으켜 세웠습니다. 남일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누이처럼 웃음을 머금고 있던 홍선씨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남일씨가 아니었으면 결혼하지 않았을 거예요."천년 후쯤에 누군가 우리의 사랑을 이야기해주면 좋겠습니다
1995년 빈민운동 현장에서 만난 두 사람은 '관악사회복지'에서 선후배로 함께 활동하는 등 15년간 함께하다 연인이 됐습니다. 그리고 2009년 12월 12일 가족친지만 모신 가운데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폐백과 예단은 생략했습니다. 동지들과 주민들에게 결혼식을 알리지 않은 것은 가난한 그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습니다. 대신에 두 사람은 이렇게 혼인서약을 했습니다.
때로는 마주 보면 가슴 뛰는 연인으로때로는 시대가 던지는 질문에 고민하는 동지로때로는 마음을 기대 쉴 수 있는 친구로그리고 어떤 힘든 일도 함께 책임지는 부부로선이와 일이는 함께 길을 걷는 동행이 되겠습니다. 하나, 서로의 가족을 자신의 가족과 같이 공경하겠습니다.하나, 소외받는 약자의 편에 서서 봉사하겠습니다. 하나, 풀뿌리운동의 가능성을 믿고 이웃과 더불어 살겠습니다.하나, 생명의 근원인 환경을 오염시키지 않겠습니다.하나, 검소하고 소박한 생활을 하겠습니다.홍선씨는 현재 '관악사회복지' 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관악공동조직준비위' 활동가로 일하고 있습니다. 남일씨는 마을연예기획사 '놀자엔터테인먼트협동조합' 이사장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말이 좋아 이사장이지 돈을 별로 못 버는 동네기획사입니다. 하지만 두 사람은 혼인서약을 잘 지키며 살고 있습니다. 길냥이었던 '누리'와 '주니어'를 잘 돌보면서….
학벌공화국 대한민국에서 서울대 출신은 특별 대우를 받습니다. 받는만큼 사회에 기여하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두 사람은 특별하게 혜택을 누리는 삶을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서울대 출신 누구도 누리지 못하는 아주 특별한 삶을 살고 있습니다. 가난한 이웃을 사랑하는 아주 특별한 삶, 운동에 지치고 힘들 때 서로를 위로하며 지켜주는 아주 특별한 사랑을 나누며 삽니다. 그 특별한 사랑과 삶에 대해 물었더니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천년 후쯤에 누군가 우리의 사랑을 이야기해주면 좋겠습니다. '이렇게 사랑했던 사람이 있었어?'라고 물음표를 가져주면 좋겠습니다. 사랑하고 결혼하고 미워하고 헤어지는 그런 사랑이 아닌 가난한 이웃과 연대하며 서로를 책임지는 사랑을 죽는 날까지 나누다 떠나면 좋겠습니다.가난한 이웃과 그냥 사는 게 빈민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 부부가 '가난한 사람을 위해 희생하고 헌신한다!'고 하는데 그 말은 틀린 말입니다. 사실은 우리 부부의 삶을 성장시키면서 인간답게 살도록 만들어 준 스승들이 가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 부부는 가난한 이웃들과 함께 사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저희 부부는 이런 삶이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합니다."▶'관악사회복지' 사무실 마련과 재정난 해소를 위한 '조호진 시인의 활빈(活貧) 프로젝트'에 참여하실 분들은 '관악사회복지' 홈페이지(www.kasw21.or.kr)를 방문하시거나 전화(02-872-8531/070-7568-8531)로 문의해주십시오. 여러분의 소중한 참여와 후원을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