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날 민씨정권의 세도가들이 모인 회의에서는 청군을 차용해서라도 반란군을 토벌하자는데 의견이 합치되었다.
외군이 들어왔을 때의 문제보다 자신들의 권력을 지키는 일이 더욱 시급했던 것이다. 그러나 워낙 민심이 떠나있던 권력이라 회의가 끝난 뒤에 돈명 김병시(金炳始)에게 청국에 원병을 요청하는 문제에 대한 의견을 물었다. 김병시는 단호한 어조로 이를 반대하였다.
비도(동학군) 들의 죄야 용서할 수 없지만, 그들도 모두 우리의 백성이니 어찌 우리의 군사로 다스리지 않고 다른 나라의 병력을 빌려 이를 토벌한다면 백성들의 심정이 어떻겠는가? 민심이 동요할 것이니, 이는 삼갈 일이다. 일본도 역시 염려가 없지 않다. 청국대사관에 사람을 보내어 잠깐 멈추게 하고 우리 경군을 출동시켜 토벌 중에 있으니 그 하회(下回)를 지켜보는 것이 좋을까 한다. (주석 2)
당시 민씨 정권의 주위에 이런 사람이 있었다는 것이 이상할 정도이다. 김병시는 상황을 정확히 내다보고 있었다. 청군이 출병할 경우 톈진조약에 따라 일군도 출병하게 될 것이라는 점을 예상한 것이다.
조정에서 청군의 원병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 것은 홍계훈이 전주성 함락 뒤에 '외병차용(外兵徣用)'을 품의한 것이 크게 작용하였다. 다음은 홍계훈이 조정에 품의한 내용이다.
가만히 엎드려 생각하니 난(亂)에는 병란과 민란이 있고, 학(學)에는 정학과 곡학이 있는 것으로 안집(安集)의 방법과 막는 계책이 이 조가(朝家)의 그 의를 얻는 데서 나온 것이 아닌가 생각되도다. 지금 동학이 창궐하여 양남에 굴하고 무뢰청탁하여 의부(蟻附)하며 조수외축(操守畏縮) 하여 호시(虎視)하도다. 큰 것은 만으로 헤아리고 작은 것은 천으로 헤아리도다. 처음에는 수령들의 탐묵(貪墨)으로 인하여 생령이 도탄 되었도다.
배운 바가 부족하나 난은 실로 근심되도다. 스스로 적은 방어의 군대가 있거늘 사도(師道)의 신이 어찌 좌시함에 이르러 이 자만을 이루게 되었는가. 후회 막급이로다. 지난해 귀가한 자가 금일에 다시 일어나니 이는 비단 우리 조정의 먼 염려일 뿐 아니라 또한 인국의 수치가 되도다.
작년 금년 양년에 멀리 왕사(王師)를 일으켜 영송에 피곤함과 군대가 왕래에 피곤함을 이루 다 말할 수 없도다. 성도(聖度)가 천대(天大)하여 깊은 죄로써 아니하고 다시 신을 보내어 초토케하고 이어 윤음(綸音)하여 은위를 아울러 베풀었으나 일향방진하도다. 만약 장차 놀음으로써 노(勞)를 기다리게 한다면 이는 소위 삭(削)하여도 반(反)이요, 불삭(不削)하여도 반이니, 초멸할 길이 만무하여 신의 죄가 크도다.
복명의 날에 자승대죄하여 왕법에 순응하겠도다. 그러나 오늘의 사세를 보면 우리는 적은데 그들은 많아 분병(分兵)하여 추격하기가 어려우니 엎드려 빌고 청컨대 외병을 빌려 도와주도록 하면 그 무리로 하여금 그 수미(首尾)를 불접케 하고 그 음신(音信)을 불통케 하겠으니, 이로써 그들은 반드시 세력이 외로와져 흩어지고 힘이 궁하여 자해하리라. 일거하여 만전함은 오직 이 일조(一條) 뿐이로다. 그러나 두렵기는 처분이 어떠하올는지 알 수 없도다. (주석 3)
정부는 외군을 불러왔을 때 생기게 될 여러가지 상황전개를 헤아리지 않고 이번에도 청국에 병력을 요청하기로 하였다. 1882년 (고종 19) 구식군대가 임오병란을 일으켰을 때 민씨 정권은 청국군을 끌어들여 이를 진압시키고, 1884년 (고종 21) 개화당이 이른바 갑신정변을 일으켰을 때에도 원세개의 청국군을 출동시켜 이를 진압하였다. 두 차례의 출병으로 청국의 내정간섭이 더욱 심해졌음은 물론이다.
민영준은 고종의 재가를 받고 당시 서울에 체류 중이던 원세개를 찾아가 원병을 요청하기에 이르렀다. 청국에 보낸 국서의 내용이 또한 비굴하고 치졸하기 그지 없었다. 자기나라 지역과 주민을 폄훼하는 내용까지 담고 있었다.
조회(照會) 하는 일은 폐방(弊邦, 우리나라) 전라도 관내의 태인 · 고부 등 지방의 민습이 흉한 (凶悍, 흉하고 사나운 것) 하고 성정이 험휼하여 본래 다스리기가 곤란하다고 일컬으더니 요새 와서 동학교비(東學敎匪)와 부동하여 만여 인의 군중을 모아 현읍 10여 곳을 공함하고 이제 또 북상하여 전주 영부가 함락되었습니다.
앞서 연군(鍊軍)을 파견하여 초무에 힘썼으나 이들이 마침내 죽기로써 거전(拒戰)하여 연군은 패하고 대포 등 군기도 많이 잃었습니다. 이 흉완(凶頑)으로 소요가 오래 가게 되면 특히 염려될 뿐 아니라 항차 서울과의 거리는 겨우 4백 수십 리 밖에 되지 않는데 저들의 북상하는 대로 맡겨둔다면 서울까지 소동되어 손해되는 바가 적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조선의 새로 훈련된 각 군의 현수(現數)는 겨우 서울을 호위할 정도이고 또 전진(戰陣)의 경험도 없어 흉구(凶寇)를 소탕하기 곤란하고 이런 일이 오래가면 중국정부에 걱정을 끼침이 클 것입니다.
임오 (고종19년 군란을 말함) 갑신 (고종 21년 정변) 두 변란 때에도 청국군이 감정(戡定)해 준 것을 힘 입었는데 이번에도 그때 일을 참작해서 귀 총리에게 청원하는 바이니, 신속히 북양대신에게 전간(電懇)하여 군대를 파견토록 하여 속히 와 초렴하여 주면 우리나라도 각 장병으로 하여금 군무를 수습케 하여 좌진(挫殄)시킨 뒤에는 곧 철회하여, 감히 계속하여 유방(留防)을 요청하여 귀국의 군대를 오랫 동안 수고롭게 하지 않겠습니다.
아울러 청하노니 귀 총리께서는 빨리 구조하여 급박함을 구제하여 주기를 바라면서 이에 조회하는 바입니다. (주석 4)
주석
2> 최현식, 앞의 책, 103쪽.
3> 문순태, 앞의 책, 137~138쪽.
4> 최현식, 앞의 책, 103~104쪽, 재인용.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