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훈련된 일본군의 신식 무기에 동학농민군이 훈련도 받은 적 없이 구식 화승총이나 칼, 창으로 대결한 이 싸움은 처음부터 상대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동학농민군은 오직 '제폭구민(除暴救民)'의 명분과 '척왜(斥倭)'의 의기로 싸움에 나섰다가 신식 무기의 위력 앞에 일패도지, 폭풍우에 흩날리는 낙엽과 같이 많은 희생을 치러야 했다.
우금치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은 충청감사 박제순(朴濟純 : 나중에 외부대신으로 을사오적의 일원) 휘하의 관병에게 "총부리를 왜놈들에게 겨누어라. 왜 동족을 살상하느냐"고 외쳤지만 돌아오는 응답은 빗발치는 총알뿐이었다.
우금치전투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룬 동학농민군은 퇴각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일본군과 관군은 쉴새없이 뒤쫓았다. 일본군은 삼남지방을 휩쓸고 들판에서, 두메에서 닥치는 대로 동학농민군을 잡아 학살하였다. 이날의 전황을 다시 이규태의 기록을 통해 알아본다.
적들은 동, 서, 남 삼면을 둘러싸고 있는데 수미(首尾)가 동(東)에서 서(西)까지 30리 지경이나 뻗쳐 서로 호응하고 있었다. 동쪽의 효포(孝浦) 능치(崚峙)에서 공주영(公州營)을 육박해 오고 있지만, 실은 남쪽의 우금치를 목표로 하고, 또 호남의 전봉준군이 우금치로 육박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금치의 방어가 공고하자 서쪽의 주봉(周峰) 쪽에서 공격해 왔으나 역시 우금치를 노리는 전략이었다.
우금치의 성하영군(成夏泳軍)이 홀로 감당하기 어렵게 되자, 일본 병관 삼미(森尾)는 우금치의 견준봉(犬蹲峰) 사이의 능선에 일본군을 배치하고, 공격해 오는 전봉준군을 향해 일제 사격을 가했다. (기관총 사격인 듯?) 그리고 능선에서 몸을 감추었다. 일본군의 맹렬한 공격을 받은 동학농민군은 공격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또 적군이 산마루를 넘으려하면 능선에 올라서 다시 일제사격을 가하고 몸을 감추었다. 이렇게 반복하기를 4, 50 차례를 거듭하니 적의 시체가 온 산에 쌓여져 갔다.
관군은 일본군 사이에 끼어 사격을 가했다. 적군은 좀 떨어진 건너편의 언덕으로 후퇴하며 저항했으나, 관군이 언덕 밑으로 기어서 사격해 가니, 적군이 공격해 오려 했지만 능선에서 내려 쏘는 기관총 사격이 두려워 진지를 버리고 후퇴했다. 이에 관군이 함성을 지르며 추격하여 대포와 군기 기치(旗幟) 60여 간 (竿)을 노획하고 일본군 대위와 경리병(經理兵) 50명이 10여 리를 추격했다. (주석 3)
이날 전투에서 2만 여 동학농민군은 살아남은 자가 불과 3천 여 명이고, 2차 접전 뒤에는 5백 여 명만 살아남았다. 우금치전투는 동학농민군에게 최대의 희생이고 참담한 패배였다.
전봉준은 싸움에 앞서 관군에게 동족끼리 상잔을 막자는 간절한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제2차 봉기 때부터 '척왜'의 기치를 들었던 그로서는 관군이 일본군의 전위가 되어 동학농민군과 싸우게 된 처지를 가슴아프게 여겼던 것이다.
고시(告示) 경군 여영병(京軍與營兵) 이교시민(而敎示民)
무타(無他)라. 일본과 조선이 개국 이후로 비록 인방(隣邦)이나 누대 적국이더니 성상의 인후(仁厚) 하심으로 삼항(三港)을 허개(許開)하여 통상 이후 갑신 시월의 사흉(四凶)이 협적(俠敵)하여 군부(君父)의 위태함이 조석(朝夕)에 있더니 종사의 흥복으로 간당(奸黨)을 소멸하고, 금년 시월의 개화간당이 왜국(倭國)을 체결하여 승야입경(乘夜入京)하여 군부를 핍박하고 국권(國權)을 천자(擅恣)하며 우항 방백 수령이 다 개화 중 소속으로 인민을 무휼(撫恤)하지 아니하고 살육을 좋아하며 생령을 도탄하매,
이제 우리 동도가 의병을 들어 왜적을 소멸하고 개화를 제어하며 조정을 청평(淸平)하고 사직을 안보할 새 매양 의병 이르는 곳의 병정과 군교(軍校)가 의리를 생각지 아니하고 나와 접전(接戰) 하매 비록 승패는 없으나 인명이 피차에 상하니 어찌 불상치 아니 하리요.
기실은 조선끼리 상전(相戰)하자 하는 바 아니어늘 여시(如是) 골육상전(骨肉相戰)하니 어찌 애닯지 아니하리요. 또한 공주(公州) 한밭(大田) 일로 논지하여도 비록 춘간의 보원(報怨)한 것이라 하나 일이 참혹하며 후회막급이며, 방금 대군이 압경(壓京)에 팔방이 흉흉한데 편벽되이 상전(相戰)만 하면 가위 골육상전이라.
일변 생각건대 조선사람끼리야 도는 다르나 척왜(斥倭)와 척화(斥華)는 기의(其義)가 일반이라. 두어자 글로 의혹을 풀어 알게 하노니 각기 돌려 보고 충군우국지심(忠君憂國之心)이 있거든 곧 의리로 돌아오면 상의하여 같이 척왜척화(斥倭斥華)하여 조선으로 왜국(倭國)이 되지 아니케 하고 동심합력하여 대사를 이루게 하올새라.
갑오 십일월 십이일
동도창의소(東徒倡義所) (주석 4)
주석
3> 이규태, 앞의 책.
4> 『동학란기록』하권, 379~380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동학혁명과 김개남장군‘]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