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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세상에 라면같이 감사한 음식이 또 있을까. 우선 싸다. 그리고 맛있다. 조리 과정이 간단하다. 아무리 요리를 못하는 사람이라도 라면 포장지 뒤에 적힌 레시피대로만 하면 실패할 확률이 거의 없다. 요즘은 라면 종류도 다양해져서 입맛에 따라, 기분에 따라 골라 먹을 수 있다. 전 국민의 소울푸드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라면의 고마움은 몇 년 전 세계여행을 할 때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3개월 가족 여행을 가는데 생각보다 챙길 게 많았다. 아이와 함께 가는 여행이라 짐이 많아 음식은 고추장 튜브 몇 개만 겨우 넣었다. 출국 전날, 여행을 좋아하는 친구와 통화하다 세계여행갈 때 대용량 라면스프는 필수라는 꿀정보를 얻었다.

"끓는 물에 라면스프를 넣기만 하면 거기에 뭘 더 넣어도 한국의 맛이 난다니까!"

난 그 말에 무릎을 탁 쳤다. 온라인으로 구매하기는 이미 늦은 상황. 우리 가족은 하던 모든 일을 멈추고 대용량 라면스프를 구하려 집 근처 식자재마트를 돌았다. '이대로 찾지 못하는 건가' 하고 낙담할 즈음 네 번째로 간 가게에서 카레 봉지만한 쇠고기 라면스프를 구할 수 있었다. 그때의 그 감동이란! 친구의 말대로 라면스프는 한국 음식이 절실하게 생각날 때마다 우리를 구해 주었다.

라면은 워낙 대중적인 음식이라 그에 얽힌 추억 하나 없는 사람이 드물 것이다. 요리를 잘 못하는 나는 항상 라면이 고마웠는데 엄마가 되고 나서는 조금 달라졌다. 라면에는 영양소가 골고루 들어있지 않다는 생각에 식탁에 올리지 않게 된 것이다. 회사에서 일하다 들어와 간혹 아이에게 라면을 끓여주더라도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가끔 만나는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라면은 꼭 이런 식으로 등장했다.

"아휴, 내가 약속이 있어서 남편에게 애를 맡기고 나왔는데 글쎄 라면을 먹인 거 있지."
"진짜? 냉장고에 반찬 다 있는데?"
"그러니까. 정말 못 살아."


가끔 아이에게 라면을 끓여주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아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고 난 마음대로 시간을 쓸 수 있는 프리랜서가 되었다. 엄마가 집에 없어서 친한 친구들을 집에 초대하지 못했던 아이는 신이 났다. 친구들을 집에 데려와도 되냐고 묻는다.

"당연히 되지. 엄마가 간식도 해 줄게. 어떤 간식 줄까?"

내 물음에 아이는 바로 "라면!"이라고 한다. 라면이라고? 난 고개를 갸우뚱했다.

"이제 초등학생인데 라면 정도는 먹어줘야지."

아이의 어깨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다. 허세가 가득한 그 몸짓이 귀엽다. 우리 집에 놀러 온 딸의 친구도 딸의 꼬임에 넘어간다.

"저도 가끔 라면 먹어요, 라면 좋아해요" 하고 환하게 웃는다. 난 조금 머뭇거리다가 딸 친구 엄마에게 전화해 허락을 받은 후 라면을 끓이기 시작한다. 허세 가득한 초등학교 1학년들이지만, 그 기세와는 달리 라면을 끓일 때 내 옆에 딱 붙어서 "매우니까 라면스프는 반만 넣어주세요"라고 요청한다.

몇 해가 더 지나고 올해 아이는 11살이 되었다. 아이는 새해가 되자 "아, 이제야 진짜 십 대가 됐다!"라고 말했다.

"어? 작년에 십 대가 됐다고 좋아했잖아."
"뒤에 0이 붙은 건 아무래도 좀 찜찜하잖아. 이제 진짜 십 대야."

 
 '오 나의 귀신님' 한 장면.
'오 나의 귀신님' 한 장면. ⓒ tvN
 
진정한 십 대가 돼서 하고 싶은 게 뭔지 물으니 의외의 대답이 돌아왔다.

"편의점에서 친구들하고 컵라면 먹는 거."

아이가 다니는 학원 일 층에는 편의점이 있는데 나도 가끔 그곳에서 컵라면을 먹는 학생들을 본 적이 있다. 아이는 내심 그 언니 오빠들이 부러웠나 보다. 그러나 코로나19로 아이는 실행 날짜를 한없이 미뤄야 했다. 코로나19가 조금 진정세로 바뀌고 다시 학원과 학교를 가게 되자 아이는 잊지 않고 자신이 말한 바를 바로 실행에 옮긴다. 친구들에게 전화를 해 같이 실행에 옮길 동지를 찾는다.

"너 다음 주에 학원 끝나고 나랑 편의점에서 라면 먹을 수 있어?"

다 거절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한 명이 손을 들어 주었다. 그 주 주말, 마트에서 아이는 안 매워 보이는 여러 종류의 컵라면을 카트에 넣었다. 자기 입맛에 맞는 컵라면을 모르니 친구와 편의점에 가기 전에 미리 알아놔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편의점에서 컵라면을 먹는 건 아이에게 정말 의미 있는 행사인가보다. 그 시간을 기대하는 딸의 마음이 느껴졌다. 마트에서 사 온 컵라면을 집에서 먹으며 난 아이에게 컵라면 뚜껑 사용법을 알려주었다.

"컵라면 뚜껑을 버리면 안 돼. 뚜껑을 뜯은 다음 반으로 접고 또 반으로 접어. 그다음 한쪽을 벌리면 이렇게 깔때기 모양의 그릇이 되지. 여기에 뜨거운 라면을 덜어 식혀 먹는 거야."

난 엄청난 기술을 알려주는 듯한 기분이었고 그 기술을 전수받는 아이의 표정은 사뭇 진지했다.

"오! 알았어. 나도 한 번 해볼래."

아이는 내가 접은 뚜껑을 다 펼쳐 다시 처음부터 접는다. 깔때기 모양의 그릇을 만들고 나서는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는다. 아이의 성장과 함께 하는 라면을 생각하니 나의 성장과 함께했던 라면도 생각난다.

고등학교 매점에서 쉬는 시간에 후다닥 먹던 라면, 선생님 몰래 수업시간에 먹던 생라면, 대학교 학생식당에서 천원이면 밥까지 리필해서 배부르게 먹을 수 있던 라면, 회사에서 야근하면서 먹던 라면.

코로나19로 아이가 집에서 끼니를 다 먹는 경우가 많아지니 일주일에 한두 번은 라면을 끓이게 된다. 그냥 라면만 끓이는 건 좀 찔려서 라면에 콩나물을 듬뿍 넣고 비싼 파도 송송송 많이 썰어넣고 계란은 필수로 넣는다. 아이 그릇에 라면을 떠줄 때 콩나물이 라면의 면보다 더 많이 떠지도록 신경을 쓴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면 매일 세끼를 차려야 하는 요즘, 뭘 해 먹냐는 질문이 꼭 나온다. 카레를 해 주지, 장조림을 해 주지, 그냥 고기랑 야채를 주지, 이런 말들이 오고 가는데 난 고해성사를 하는 기분으로 툭 말했다.

"난 일주일에 한두 번은 라면을 끓여주게 되더라. 힘들어서 다 못 차리겠어."

핀잔을 받을 줄 알았는데 친구들의 반응이 전과 다르다.

"나도 그래. 일주일에 한두 번은 그렇게 되더라고."
"맞아, 맞아. 맛있고 편하고 그런 음식이 드물지."


마음이 편해졌다. 싸고 맛있고 끓이기 편한 라면. 나의 성장과 또 우리 아이의 성장과 함께 하는 라면. 역시나 라면은 고마운 음식이 분명하다.

##라면스프##컵라면##편의점 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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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 책을 만드는 일을 하고 있습니다. 아이들이 살아 갈 세상이 지금보다 조금 나아지기를 바라며 내 생각과 행동이 일치하는 삶을 살기 위해 노력 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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