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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로나의 긴 터널을 지나고 있다. 마음이 힘들다고 말하는 이들이 많다. 집에 있는 시간은 갇힌 시간이 되고, 가족 모두가 같은 공간에 있는데 각각 외롭다고 말한다. 

코로나가 사람들을 깊은 외로움으로 내몬 것은 분명하겠지만, 외롭고 힘든 이유가 모두 코로나 때문일까. 적어도 내게 외로움의 시작은 코로나보다 먼저였다. 이후 코로나 상황이 되며 외로움에 잠기도록 만들었겠지만, 코로나는 우연히 시기가 맞았기 때문에 덤터기를 쓴 면도 있는 것 같다. 코로나가 아니었어도 나의 2019년과 2020년은 외롭고 힘든 시간이었다.

얼마 전, 스승의 날을 지나며 몇몇 아이들로부터 문자가 왔다. 초등학생 티를 갓 벗어났던 아이들이 하나둘씩 군대에 입대한다는 소식은 건너 건너 들었는데, 군에서도 잊지 않고 문자를 보내주어 반가움이 컸다. 취업에 성공했다는 기특한 소식도, 직업 전선으로 첫 발을 내딛는 두려움을 스승의 날 인사와 함께 전해오기도 했다. 

아이들과 연결될 때마다 과거의 기억을 소환하곤 한다. 학교에서 나는 부모의 위치를 자처했다. 내게 맡겨진 아이들을 위한 시간을 살았다. 가르치고 상담하고 성취에 기뻐하고, 사고를 수습하고 대신 용서를 구하며 아이들과 남이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지난 시간을 돌아보니 아이들에게도 나를 위해서도 좋은 방법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흔들림 없는 어른의 모습으로 보이고 싶었던 것 같다. 늘 같은 자리에서 아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였고, 장점을 찾아 부단히 칭찬했다. 사고 없이 무탈하게 상급학년으로 올려 보내는 것이 일 년의 목표였고, 목표를 이루기까지 학교에서는 아이들을 우선해서 생각했다.

출퇴근 15년,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에서는 조금 달랐다. 나는 평화주의자(?)였고 안전 주의자(?)였다. 어느 집단에나 있는 분쟁이나 다툼에 휘말리지 않도록 조심했다. 학교도 사회니 다양한 일이 많았다. 튀지 않는 사람이었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방법은 '둥글게 둥글게'였다. 이 관계도 나를 위해 현명한 방법은 아니었던 것 같다. 

그 과정에서 상처 받지 않은 척하며 나를 숨겼고, 흔들리지 않은 척하며 나에게 무심했다. 그러다 그만둔 직장, 감췄던 상처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마음이 무너졌다. 자유가 찾아왔는데 자유롭지 않았다. 자유를 만끽할 수 없었다. 혼자서만의 자유는 의미가 없었다. 눈뜨고 나서부터 종일 혼자인 삶은 무료했고, 의미 없이 흐르는 시간은 중년의 방황과 만나 삶의 회의까지 느껴졌다. 

다른 이를 위해 주어진 삶은 익숙했지만 나를 위해 만들어 가는 삶에는 초보였던 것 같다. 할 일이 없는 나와 갈 곳이 없는 나, 몸까지 아파왔다. 그렇게 마음 둘 곳 없는 내가 몇 달의 방황 끝에 처음 선택한 것이 도서관이었다. 책과 함께라면 견딜 것 같았다. 그곳에서라면 몸이 흐트러질 수 없으니 마음도 잡을 것 같았다. 

처음엔 수많은 책들 사이를 걸었다. 다음엔 여러 가지 문화 프로그램을 만났다. 독서 토론 모임을 시작으로 그림책 모임, 글쓰기 모임, 평생교육활동가들을 위한 모임까지. 하나 둘 시작했던 프로그램을 통해 지금은 다양한 소속이 만들어졌다. 강의는 도서관뿐만이 아니었다. 문화재단, 만화영상진흥원, 여성청소년회관 등 다양한 곳에서 나를 기다렸다. 

코로나 이전엔 시간을 널찍하게 잡아야 했지만, 요즘은 촘촘히 선택한다. 온라인으로 만나는 모임은 시간만 맞으면 오전 오후를 가릴 것도 없다. 다이어리에는 수강 계획으로 칸칸이 채워진다. 일상이 바빠졌고 낯선 만남이 새롭다. 틈틈이 그런 나를 기록한다. 의욕만 있으면 언제든 어디서든 무엇이든 가능하다. 얼굴만 보이면 되니 편한 복장도 괜찮다. 화장도 필요 없다. 다소 칙칙한 얼굴 대신 환한 미소를 보여주면 된다.

본격적으로 마음이라는 것을 챙긴다. 간단하게라도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내, 어떤 집단의 내가 아닌 나를 만들어 간다. 내가 인지하지 못했던 내밀한 나와의 관계 속에서 나를 찾는다. 나를 잘 드러내기 위해, 내가 회피했던 감정들과 화해도 한다. 

코로나 초기 많이 회자된 책이 까뮈의 <페스트>다. 코로나로 갇힌 상황에서 랑베르처럼 도피를 선택할지 파늘루 신부처럼 신에 기댈지, 코로나와 싸울지는 각자의 선택에 달렸다. 나의 선택은 정면대결이었다. 나는 나와 싸우고 있다. 치열하게 나를 들여다보고 내 안의 외로움과 아픔과 상실 등을 돌본다. 그렇게 해서 새로운 나의 이력을 만들어 가는 중이다. 

세계적 팬데믹 상황 속에서 마음 돌봄, 마음 챙김이 나만의 화두는 아닌 것 같다. 여러 곳에서 공개되는 강의의 대부분은 심리, 치유, 돌봄 같은 것들이 많다. 발맞추어 그러한 강의를 기획하기도 하고 남들이 기획한 강의에 참여하기도 한다. 
 
이석구 <두근두근> 표지 주인공 브레드 씨처럼 쟁반을 걷어 내고 세상과 마주하려 합니다.
이석구 <두근두근> 표지주인공 브레드 씨처럼 쟁반을 걷어 내고 세상과 마주하려 합니다. ⓒ 장순심
 
참여한 강의에서 그림책을 만났다. 이석구의 <두근두근>에는 수줍고 부끄럼 많은 주인공 브레드씨가 나온다. 그의 성격은 나와 닮아 있다. 남들이 다가오는 것도 남들에게 다가가는 것도 힘들다. 너무 부끄러운 나머지 그는 좋아하는 빵 만들기도 아무도 다니지 않는 밤에 혼자 몰래 만든다. 처음엔 문 두드리는 소리에도 깜짝 놀라던 소심한 브레드씨가 변해가는 과정은 놀랍다. 

책의 후반부에 보면, 이제 브레드씨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놀라지 않는다. 나를 감추던 쟁반을 걷어내니 상대방이 보인다. 그들을 마주하고 살피고 챙기고 각각 필요한 빵을 만들어 주며 소통한다. 쟁반으로 얼굴을 감추기 급급하던 브레드씨의 치유 역시 정면 승부 같다. 피할 수 없다면 즐기라는 말은 역시 진리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누르며 숨기에 급급했던 브레드씨가 세상을 향해 마음을 연 것처럼 나도 변하고 싶다. 나의 두근거림의 정체를 찾고, 두려움, 낯섦을 극복하려고 노력한다. 마음속까지 꿰뚫어 볼 것 같은 세상을 향해 나도 천천히 조금씩 소통의 단계로 나가는 중인 것 같다. 쟁반으로 가리기에 급급하던 내가 스스로 쟁반을 걷어내는 중이다.

<페스트>의 마지막 부분에 이런 말이 나온다. 
 
"페스트와 싸우는 유일한 방법은 성실성입니다."
"성실성이 대체 뭐지요?"
"일반적인 면에서는 모르겠지만 내 경우로 말하면, 그것은 자기가 맡은 직분을 완수하는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내게 다가온 상실을 꾸준함으로 대처한 것은 아닐까. 상실이라고 느낀 감정들이 나의 성실함을 이끌어내도록 해준 것 같기도 하다. 그렇게 해서 삶이 바뀌고 관점도 바뀌고 세상에 나를 드러내는 방법이 바뀐다. '좋은 게 좋다'거나 '둥글게 둥글게'의 방식은 사양한다. 솔직함을 나의 무기로 장착하고 세상에 발을 뻗어 본다.

#마음 돌봄#외로움 #코로나#치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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