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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 윗집 보일러에 문제가 생겨 우리 집 천장으로 물이 새는 통에 한바탕 난리가 났었다. 하필이면 서재로 쓰는 방에 사달이 나서 서책 수십 권이 물에 젖었다. 절판된 책들도 더러 섞여 있었다. 차마 버릴 수가 없어서 젖은 책들을 여러 날 햇볕에 널어 거풍을 시킨다고 야단법석을 떨었다.

그때 방 정리를 하면서 묵혀 두기만 하고 몇 년째 거들떠보지 않는 물건을 대대적으로 색출했다. 그리고 과감히 처분했다. 그 속에는 내 리즈 시절을 대변하는 수백 개의 비디오테이프도 끼어 있었다. 일본 드라마, 영화, 광고, 다큐멘터리... 장르를 가리지 않고 일본 관련 자료를 집요하게 모으던 시절이 고스란히 투영된 것들이라 수 없이 갈등했고, 칼로 심장을 도려내는 심정으로 떠나보냈다.

'푸른 산호초' 교차편집을 보게 될 줄이야

한창 일본어 공부를 하던 1990년대 초반, 교본 이외의 자료를 구하려고 필사적이었다. 친인척 중에 누가 일본에 나간다 하면 얼굴에 철판 깔고 부탁을 일삼았다. 아무개가 녹화 뜬 드라마나 영화를 갖고 있다더라 들리는 날에는 물어물어 찾아가서 비굴할 정도로 매달려 빌려다 보곤 했다. 

당연히 그렇게 죽기 살기로 좋아한 일로 평생 먹고 살 줄 알았다. 잠시 강단에 서기도 했지만, 원하던 길을 계속 걷지는 못했다. 이후 어른이 됐다는 의무감으로 돈 버는 일에 매달리다 보니, 나름 화려했던 젊은 날은 점점 기억 속에서 멀어져만 갔다. 

그러다 유튜브를 만났다. 능력치를 깨닫고는 구독자로 돌아섰지만, 어쭙잖은 크리에이터로 입문했었다. 구독자로 전향한 초기에는 주로 키워드를 입력해서 필요한 정보를 얻었다. 그런데 최근에는 알고리즘이 이끄는 대로 맡기는 편이다.

가끔 뜻하지 않게 관심 없던 분야에서 양질의 콘텐츠를 만나 새로운 세계를 접하는 재미가 쏠쏠해서다. 오마이뉴스 '오늘의 기사 제안'으로 '유튜브 알고리즘 때문에 생긴 일'이 올라왔을 무렵이다. 그날도 유튜브 알고리즘에 의탁해 게시물을 훑고 있었다.

'아니, 이게 뭔 일여!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더니... 이런 어마어마한 자료를 누가 방출했지!'
 

1980년 일본 가요계에 그야말로 혜성처럼 등장해 이후 수십 년간 업계를 평정한 마츠다 세이코(松田聖子)의 '푸른 산호초'(靑い珊瑚礁)가 교차편집 영상으로 올라와 있는 게 아닌가. 구독자가 수십만 명이 되도록 모르고 있었다니... 분통스러웠다. 뒤늦게 알게 됐지만 "알고리즘 알랴뷰! 땡스 알고리즘!" 외칠 만큼 너무나도 반가운 게시물이란 얘기다. 
 
내가 살다 살다 푸른 산호초 교차편집을 다보넼 ㅋㅋㅋㅋㅋ.
아....젠장....또 왔네 이 섬.
작년에 겨우 탈출했는데.... 알고리즘이 또 가두는구나....
어른제국의 대역습에서  왜 20세기로 돌아가고 싶어하는지 알겠넼ㅋㅋㅋㅋ.
꼭 일본에서 80년대를 보낸 것만 같은 묘한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곡...

게시물에는 내 심정을 고스란히 옮겨 놓은 댓글이 수천 개나 달려 있다. 이후에는 80년대부터 일본 가요계의 양대 산맥을 이뤘던 나카모리 아키나(中森明菜)의 히트곡도 교차편집으로 계속해서 올라왔다.

다른 꿈을 꿀 수 있게 힘을 주다
 
 1980년대 일본 가요계를 강타한 마츠다 세이코(松田聖子)의 싱글 앨범을 찾다 수십 년 잊고 지내던 J-pop을 다시 듣게 됐다.
1980년대 일본 가요계를 강타한 마츠다 세이코(松田聖子)의 싱글 앨범을 찾다 수십 년 잊고 지내던 J-pop을 다시 듣게 됐다. ⓒ 박진희
 
나는 그렇게 며칠 내내 유튜브 알고리즘이 영도(領導) 하는 대로 J-POP 향수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그러다 결국 어디에 뒀는지도 기억 못 해 온 집안을 이 잡듯 뒤져서 박스 하나를 찾게 된다. 몇 년에 한 번씩 잠시 꺼내 보고 말지만, J-POP CD 백여 개가 들어 있는 그 박스는 내게는 보물단지 버금간다.

박스 지분이 가장 큰 건 일본 지인들이 보낸 준 CD다. 자신들이 갖고 있던 것과 주변인들에게 사정 얘기를 하고, 한 개 두 개씩 모아서 국제우편으로 부쳐준 것들이다. 웃돈 얹어주고 몇 주씩 기다렸다 일본에서 직접 공수한 CD, 유학 중에 생활비 쪼개가며 중고거래점에서 사 모은 CD까지 어느 것 하나 사연 없는 게 없다. 플레이하지 않고 바라만 봐도 흐뭇해지는 애장품들이다.

지난 가을 버릴까 말까 잠시 고민을 하기도 했지만, 도저히 CD만큼은 버릴 수가 없었다. J-pop CD의 존재는 점점 잊히는 가장 영롱하게 빛났던 일순을 기억하게 하는 메모리 저장소다.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게 힘을 주는 에너지 충전소이기도 하다.

유튜브 알고리즘에 이끌려 1980~1990년대 복고 감성을 제대로 누리고 산다. 결핍된 것이 많아 불편했지만, 생각하면 그래서 또 행복했던 시기였다. 중년에게 최상의 컨디션을 되찾아준 유튜브 알고리즘의 이런 초대라면 앞으로도 쭈욱~ 대환영이다.

덧붙이는 글 | 오늘의 기사 제안


#알고리즘#J-POP#싱글 앨범#키트 앨범#CD 앨범
댓글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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