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년, '1세기'에 해당하는 시간이다. 평균수명이 늘어났다고는 하지만 100세를 맞이하는 것은 흔한 일이 아니다. 인간으로서 누릴 수 있는 연수를 가득 채운 시간이다. 그렇기에 100년, 한 세기가 지났다는 것이 특별하게 다가온다. '한때 시간과 장소를 공유했던 이들과 작별한다'는 의미이자 '새롭게 태어난 이들에게 역사의 다음 페이지를 맡긴다'는 뜻처럼 말이다.
충북 옥천에는 올해로 100주년을 맞은 안내초등학교와 군서초등학교를 포함해, 100년 이상의 역사를 지닌 초등학교가 총 다섯 곳 있다. 설립순서대로 청산초, 죽향초, 이원초, 안내초, 군서초다.
한 세기를 잘 견뎌냈지만, 이들은 지금 큰 위기를 맞이했다. 인구 감소로 학생 수가 점점 줄어들기 때문. 5곳 중 3곳이 전교생 40명 이하의 '작은 학교'다. 학교는 저마다 숙제를 안고 학교를 살리기 위한 노력을 이어간다. 이들의 100년 이야기 그리고 새로운 100년을 준비하는 오늘을 들여다봤다.
[청산초] 청산면은 청산초로 연결됐다
□ 청산초등학교
설립년도 : 1905년 4월 1일 청산사립신명학교 개교
주소 : 충청북도 옥천군 청산면 지전길 36-19
전교생 : 39명(병설유치원 10명 미포함)
청산초등학교는 옥천에서 가장 먼저 설립된 학교로, 충북에서는 세 번째로 오랜 역사를 지녔다. 청산초 전신인 청산사립신명학교는 을사늑약이 체결되던 1905년에 설립됐다. 조국이 일제에 자주권을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위기의식이 높아지던 때였다.
위기 속에서 선각자들은 교육을 대안으로 꼽았고 국권회복과 애국계몽운동 일환으로 '신학문을 배워서 나라를 지켜나가자'는 학교설립운동이 거세졌다. 전국 방방곡곡에 5천여 개의 사립, 사설 학교가 설립될 정도였다.
"외국에서 유학하며 신문물을 접했거나 독립운동하던 인물들이 학교 건립에 뜻을 모았죠. 그를 바탕으로 생각이 깨인 청산 부자들이 학교를 짓는 데 필요한 비용을 기부하면서 청산초(청산사립신명학교)가 세워진 거예요. 처음에는 서당 같은 모습의 학교였겠죠." (청산초 38회 졸업생 안철호씨)
청산사립신명학교는 이후 시대 흐름에 따라 청산공립보통학교(1912), 청산공립심상소학교(1938), 청산국민학교(1941)로 달리 불리며 명맥을 이어왔다. 1995년 8월 11일, 교육부가 "일제의 잔재를 깨끗이 청산하고 민족정기를 바로 세운다"는 목적으로 국민학교의 명칭을 초등학교로 바꾼 뒤부터 지금의 이름인 청산초등학교로 불리게 됐다. 학생 수가 늘어 교실이 부족하던 무렵에는 예곡·대월분교가 설립됐다가 다시 통합되기도 했다.
2005년 4월 3일. 한 세기를 훌쩍 보낸 청산초에서는 한바탕 잔치가 벌어졌다. 식전행사로 재학생 학예발표회가 열렸고 이후 창씨개명 졸업장을 새로 수여하는 행사가 이어졌다. 일제강점기, 26회부터 30회까지 일본식 이름으로 졸업장을 받은 졸업생 600여 명 중 연락이 가능한 105명에게 본명이적힌 졸업장을 전달한 것.
이날을 계기로 교정에 새롭게 생긴 건축물도 있다. 100주년을 기념하는 기념조형물 그리고 기존 도서관을 정비한 향토사료관이다. 기념조형물은 청산초 졸업생인 박수용 조각가의 작품이고 향토사료관 역시 졸업생 장용호 씨가 도서관으로 기증한 건물이다. 식후행사로 노래자랑까지 이어지며 왁자지껄, 청산초는 온종일 떠들썩했다.
청산초 졸업생을 만나다
청산초등학교는 이제 청산면 유일한 초등학교다. 전교생 39명의 작은 학교라지만 병설 유치원을 갖췄고 면 소재지에 있어 접근이 편리하다. 게다가 뒤편으로 청산중학교, 청산고등학교가 위용 있게 서 있어 든든하다. 옥천에서 면 단위로는 유일하게 초·중·고교가 모두 갖추어진 것. 청산이 고향인 주민 다수가 청산초 졸업생이니 이들이 청산초로 연결됐다 해도 과언이 아닐 테다. 이를 바탕으로 청산면은 최근 '청산지역살리기 추진위원회'를 만들고 학교를 살리려 노력하고 있다.
학교 인근에서 네 명의 청산초 졸업생을 만나볼 수 있었다. 현재 청산에 거주하는 청산초 졸업생 중 최고령자인 남한우씨(29회 졸업)를 비롯해 3년 이상 청산초 배움터지킴이로 일하는 박영곤씨(52회 졸업), 전 청산면장을 역임하고 지금은 '청산지역살리기 추진위원회' 위원장을 맡은 이은승씨(53회 졸업)와 역시 '청산지역살리기'에 열정을 지닌 청산신협 김석환 이사장(52회 졸업)이다.
29회 졸업생 남한우(95)씨 : "처음 학교 다닐 적에는 청산심상소학교였지. 12살 때 소학교에 입학했어. 본래 8살 입학인데, 한참 나중에 들어간 거지. 그때 학교 들어가려고 호적도 바꿨어. 덕분에 호적에서는 삼촌이 보호자이고 내 나이도 본래보다 적어. 당시에는 대전 법원에 가기만 하면 호적 바꾸는 게 쉬웠다고. 나같이 뒤늦게 입학한 친구들이 많았어.
그때는 학교에서 지정한 교복이 있었어. 그거 입고 점심은 보리밥에 된장 도시락 싸서 다녔지. 수업시간에 국어(일본어), 조선어, 지리, 산수, 도덕(수신) 이런 과목을 배웠어. 일본인 선생이 많았지. 한 반에는 학생이 72명 정도 있었던 것 같아. 기와지붕에 교실이 6-7개 됐지. 교실이 모자라서 나중에는 농기계 창고, 지전리 마을회관도 교실 삼았어.
소학교 학생이래도 나이가 많아서 다들 장정 같았지. 2학년 때 나랑 친구들이 작업 시간에 뒷산에서 소나무를 캐다가 교정에 심었을 정도니까. 그 소나무가 아직도 학교에 있어. 아주 크게 잘 자랐대. 학교 다니면서 일을 참 많이 했어. 각종 밭작물 농사하고 녹차나무 가꿨던 것이 기억이 나네. 건설공사도 많았지. 부지를 다지는 일이 대부분이었어. 그때 학생들은 완전히 일꾼이었다고.
그렇게 6년 국민학교(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나니 해방이 왔어. 졸업할 때 나이가 18살이었지. 그러다 20살 됐을 때 청산중학원(현 청산중)이 생기면서 중학교에 진학할 수 있게 됐어. 6·25전쟁이 난 건 내가 중학생 때의 일이지."
52회 졸업생 박영곤씨 : "3년 전부터 청산초 배움터지킴이로 있지요. 교문 앞을 지키며 재학생, 가끔은 졸업생을 만나기도 하죠. 배움터지킴이로 있으니 인사도 가장 먼저 할 수 있어요. 매일 유치원생부터 6학년까지 학생들을 만나는데 다 손자·손녀 같죠. 얼마나 귀여운지 몰라요. 그런데 점점 학생들이 줄어드니 앞으로가 걱정될 뿐이죠.
학교에 대한 추억이라면 친구들과 배구하고 어울려 놀던 일이 가장 먼저 생각이 나요. 나도 옥천군 대표로 청주까지 갔었죠. 도시락 싸 들고 학교 다녔어요. 가난한 시절이라 학교에서 강냉이죽 나눠줬던 것도 기억나네요. 그때는 그게 왜 그렇게 맛있었나 몰라.
우리 52회 졸업동문들은 지금도 잘 모이는 편이에요. 지역에 따라서 동문모임이 청경회, 오이회, 청우회, 해외로 나뉘어 있을 만큼 활발하죠. 2018년에는 52회 졸업앨범에 최근 동문모임 사진을 추가해서 새로 '청경회 추억의 앨범'을 엮어내기도 했지요. 서울에 있는 동문 안영구, 전대식이 책자 만드느라 애를 써주었어요."
53회 졸업생 이은승씨 : "올해 8월 발대식을 열고 '청산지역살리기 추진위원회'를 꾸렸습니다. 37명이 뭉쳐 초중고와 지역경제를 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지요. 내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할 것 같습니다. 위원회도 청산초를 비롯한 학교 살리기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학교가 사라진다면 지역도 오래가지 못할 테니까요.
'아이 키우기 좋은 청산'을 구호로 내세우고 교육이주 가정이 잘 살아갈 수 있게 주거환경과 일자리를 만들고 문화 시설을 갖추려는 계획입니다. 주민들도 여기에 힘을 합치고 있어요.
청산초는 저에게도 추억이 참 많은 장소입니다. 특별히 운동회가 기억이 나네요. 2천 명이 넘는 사람이 한자리에 모였었죠. 콩나물시루처럼 빽빽하게 사람이 있어서 당시 키가 작았던 저는 행사를 보려고 나무 위에 올라갈 정도였어요. 지금도 학교에 그 느티나무가 있지요?
어릴 적 다니던 학교가 지금도 있다는 것, 그것도 100년 넘는 역사를 지녔다는 것은 정말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재학생들에게 '작은 학교라고 기죽지 말아라. 너희는 모두 자랑스러운 지역의 꿈나무들이다. 꿈을 마음껏 펼쳐라. 선배들이 응원하겠다' 이렇게 이야기해주고 싶네요."
52회 졸업생 김석환씨 : "돌아가신 저희 조부 김용분 어른이 청산초 1회 졸업생, 제가 52회 졸업생이죠. 학교에 대한 애착이 커요. 얼마 전에도 동창들이 모였었어요. 올해부터는 청산지역살리기 추진위원회 활동을 하는데 청산면은 초·중·고교 심지어는 어린이집, 유치원, 아동센터까지 모두 갖추어졌다는 장점이 있어요. 이런 교육 시설의 장점을 잘 살려서 앞으로 청산면이 더 발전됐으면 합니다."
우리 지역 알아가는 기쁨, 동동동 청산 프로젝트
청산초에서도 주민들의 노력에 발맞춰 마을 기반의 교육 활동을 올해 시작했다. '동동동 청산 프로젝트'는 아이 동(童), 마을 동(洞), 움직일 동(動)을 뜻하는 교육 활동으로 학생들이 마을과 더 가까워지도록 한다.
학생들은 40시간의 꿈자람, 행복채움 주간을 활용해 청산 내 다양한 장소를 방문했다. 1학기에는 백운리 박선옥 이장이 '청산 3.1독립만세운동 기념탑' 등 역사 장소를 찾아가 청산 독립운동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과거 독립운동가들이 먹었던 음식, 태극기 변천사, 독립운동 방법 등 교과서에서는 배울 수 없는 이야기였다.
이 외에 동학농민운동 유적을 찾아가거나 도덕봉 등산, 마을에 관한 1인 프로젝트 발표회도 연다. 학생들은 청산 구석구석 숨겨진 장소와 이야기를 알아가며 지역과 가까워지고 있다.
"마을에 과거 교직에 계셨던 주민, 음악 활동을 하는 분도 계세요. 기회가 된다면 이분들이 또 학생들에게 좋은 경험을 만들어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백운리 행복센터를 학습장소로 제공할 수도 있을 테고요. 함께 봉사활동을 하는 것도 좋을 거예요." (백운리 박선옥 이장)
박선옥 이장은 "마을은 학교를 도울 준비가 되어있다"고 말했다. 그는 "학생들이 지역 주민들과 더 어울릴 기회가 생겼으면 한다"면서 "마을 어르신은 학생들과 소통하면서 우울감을 줄이고 성취감을 느끼고, 학생들 정서에도 좋은 영향이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자신이 살아가는 동네를 알아간다는 것을 아이들이 무척 기뻐했어요. 독립운동이나 동학농민운동과 같은 청산의 중요한 역사에 대해 대부분이 잘 모르고 있었더라고요. 가까이 도덕봉에 가보지 않은 학생들도 무척 많았죠. 이런 경험을 통해 학생들이 지역에 더 관심 갖게 되리라고 기대합니다." (청산초 이정은 교사)
이정은 교사는 "올해는 첫 해여서 마을을 이해하는 '마을에 관한 교육'과 '마을을 통한 교육'이 주를 이루었는데, 내년에는 마을과 협력해서 '마을을 위한 교육' 프로그램을 활발하게 운영하고자 한다.
올해 학생자치회가 플로깅(환경정화), 알뜰시장을 열어서 기부하는 활동이 있었듯, 학생들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지역 기반 프로그램을 더 만들 계획"이라고 전했다. 그는 "학교가 이를 지원해 줄 지역 자원과 인사를 찾고 연결해서 주민과 함께 프로그램을 계획·운영해 청산에 더욱 도움을 주기를 바란다"고 덧붙였다.
청산초 이종욱 교장은 "청산지역을 살리고자 여러 지역 인사들이 힘쓰고 계신 것 알고 있다. 누가 시켜서 하는 것이 아니라, 힘을 모아 변화 만들어내려는 것이기에 무척 의미 있고 감사한 일"이라면서 "학교에서도 지역 기반 프로젝트를 통해 학교와 청산 살리기에 노력하고 힘쓰겠다"고 말했다.
[죽향초] 구읍의 중심, 죽향초등학교의 111년
□ 죽향초등학교
설립년도 : 1909년 10월 1일 사립 창명보통학교 설립인가
주소 :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향수1길 26
전교생 : 298명(병설유치원 56명 미포함)
정지용 시인의 모교로 잘 알려진 죽향초등학교 역시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죽향초등학교의 전신은 사립창명학교로, 범재 김규흥 선생이 학교설립에 힘을 쏟았다고 전해진다.
옥천읍 문정리 문향헌에서 태어난 김규흥 선생은 중국을 주 무대로 활동한 독립운동가로, 신해혁명에 참여한 최초의 한국인이다. 그는 일본에서 유학하며 신문물을 접한 후 1901년까지 외국어 전문 교육기관인 서울 중교의숙에서 교원으로 활동하는 등 교육에 큰 관심을 가졌다.
고향에도 근대 교육기관을 설립하고자 세운 것이 사립창명학교다. 창명학교에 관한 기록은 황성신문, 대한매일신문에 1906년부터 1909년까지 남아있는데 이에 의하면 창명학교는 1906년 12월 이전에 설립, 1909년 10월 1일 정식 인가를 받아 개교했다.
김규흥 평전에서 그의 손자 김한영씨는 "유족들이 선대로부터 들어온 말에 의하면 현 죽향초등학교 터는 범재공의 집안에서 목화밭으로 경영하던 것을 아낌없이 기증한 것"이라고 증언했다.
이에 감사하고자 해방 후 개교기념일에 죽향초(당시 교장 전병석)에서 은수저 한 벌을 선물한 이야기도 함께 전해진다. 정식 인가를 받은 창명학교는 이후 1910년 공립옥천보통학교로 거듭났고 옥천공립심상소학교(1938)로, 죽향국민학교(1941)로, 죽향초등학교(1996)로 교명을 바꾸며 역사를 이어왔다.
가장 어두운 시절에 세워진 죽향초등학교는 그동안 터널을 여럿 지나왔다. 일본인이 교장을 맡았던 일제강점기도, 폭격으로 12개 교실이 소실됐던 6·25 전쟁도 지났다. 목조 건축물은 벽돌로, 또 콘크리트로 바뀌어나갔고 어렵던 와중에도 학교는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졸업생을 배출했다. 그리고 마침내 2009년, 죽향초등학교는 개교 100주년을 맞이했다.
죽향초 100주년 행사가 열린 것은 2009년 10월 17일. 정지용 생가 앞마당에 졸업생이 모였다. 이들은 정지용 시인의 시에 음률을 붙인 '향수'를 합창하고 32사단 군악대가 앞장서 육영수 여사 생가에서부터 죽향초까지 행진했다.
그 뒤를 따라 졸업생들이 걸었다. 대부분 50년 만에 다시 걷는 '학교 가는 길'이었다. 감회가 새로운 듯 모두 한껏 상기된 표정이었다. 학교에서는 공들여 만든 '100주년 기념탑' 개막식과 함께 한바탕 축제가 벌어졌다. 돌아가는 졸업생들의 손에는 총동문회가 100년 역사를 갈무리해 만든 기념 책자 '죽향교육 100년사'가 쥐어졌다.
총동문회 결성부터 100주년 행사 열리기까지
성황리에 마무리된 듯한 100주년 행사였지만, 행사를 열기까지 우여곡절이 많았다. 죽향초등학교 총동문회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100주년을 9년가량 남긴 2000년. 당시 학교운영위원장으로 있던 송명석씨는 100주년이 머지않았음을 알았을 때, 당연히 총동문회가 있으리라 생각했지만, 총동문회는 없었다. 이에 몇몇 졸업생들을 모아 총동문회 모임을 만들 것을 이야기했다.
"100주년 행사가 있기 전에 한 자리에 모이는 게 꼭 필요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18명이 자리에 모였는데, '내년에 만들자'며 생각보다 호응이 약했지요. 지금 하지 않으면 영영 못 하겠다는 생각이 들어 모임을 밀어붙였어요." (송명석씨)
그는 2000년 12월 17일로 1회 총동문회 날짜를 정하고 홍보물을 2천 장 인쇄했다. 100주년 행사 추진위원장을 맡았던 고 전영이씨도 소매를 걷었다.
"전영이 선생님이 동문 18명 모인 자리에서 현금 50만 원을 딱 올려놓으시면서 '이 행사 적극적으로 도울 테니, 할 사람만 참여해라' 말씀하셨죠. 그분의 한 마디가 총동문회 결성에 큰 기폭제가 됐어요. 결국 이야기를 들은 18명 동문 모두가 행사를 도왔죠."
초대 총동문회 회장으로는 고 유봉열 전 군수가 선출됐다. 첫 동문회에 모인 동문은 120명가량. 예상보다는 적은 숫자였지만 값진 모임이었다. 이후 매년 10월 혹은 11월이면 총동문회가 열렸고 2008년부터는 100주년 행사를 본격적으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송명석씨는 사무국장을 맡아 행사를 기획하고 필요한 자금을 모으는 역할을 했다. 기수별로 약 200만 원씩, 20기수가 힘을 합했다. 그 외에 개인적으로 기부를 해준 동문도 있었다. 그렇게 마련한 약 7500만 원으로 100주년 기념 책자와 기념비를 만들고 행사를 꾸릴 수 있었다.
"돌아보면 100주년 책자는 아쉬움이 많아요. 학교 사진 자료, 기수별 사진 자료를 받아 만들었는데 100주년 책자 내용으로 걸맞지 않은 부분도 있고 설명도 부족하죠. 나름대로 다른 지역 학교 사례도 알아보고 열심히 했지만, 100주년 행사에 맞춰서 완성해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했던 것 같아요. 지금은 1년쯤 더 여유를 갖고 완성했더라면 하는 생각이 들죠."
100주년 행사를 얼마 남기지 않았을 무렵 유행한 신종플루가 또 하나의 장애물이었다. 교육청은 학교에 행사를 연기할 것을 이야기했다. 하지만 그동안 들인 수고와 노력 또 수많은 동문과의 약속을 생각했을 때 이런 결정은 가혹한 것이었다. 죽향초 총동문회는 또 한 번 행사를 밀어붙였다. 당시 결혼식이 열렸던 것을 생각하면, 100주년 행사도 그와 다를 바 없다는 판단이었다. 옥천 시내 곳곳에 현수막을 걸고 예정대로 행사가 열렸다.
"학교 역사가 아무리 깊고 훌륭하다 하더라도 졸업생과 재학생이 기억하지 않으면 소용이 없어요. 게다가 100주년 행사는 수많은 이들과의 약속이죠. 졸업생으로서 후배들에게 본받을 만한 모습을 보이고 싶었고, 행사를 통해 후배들과 선배들 간 교감대를 만들고자 했어요."
송명식씨가 후배들에게 바라는 점은 "그저 건강하고 튼튼하게 자라는 것"이다. "현재 자신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간에 삶을 비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한다.
"어린 시절 저는 가난해서 제대로 배울 수 없었어요. 오랜 시간 그것이 제 발목을 잡았죠. 하지만 자라면서 다양한 사람을 접했고 저마다의 쓰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배우지 못했다' 해서 의기소침할 필요가 없다는 것도 깨달았고요. 후배들이 당당하게 살면서 스스로 귀하게 여기기를 바라요."
죽향초등학교 111주년
오늘 죽향초등학교는 100주년을 넘어 111주년을 맞이했다. 죽향초는 이번 111주년이 갖는 의미가 특별하다고 말한다.
"'111주년 역사를 기반 삼아 교육 3주체인 학생, 학부모, 교직원이 모두 1등인 학교로 성장하자'는 의미를 담았지요." (이정자 교장)
이기분 교감은 올해 학교에 코로나19 확진자가 발생했을 당시, 학부모로부터 받았던 전화 한 통이 그 의미를 더욱 실감케 했다고 이야기했다.
"학교에 민원전화가 많이 오겠구나 싶어 다들 긴장하고 있었어요. 곧 전화가 울렸고 그에 대처할 마음의 준비를 했죠. 역시 학부모님의 전화였어요. 그런데 그분이 예상치 못한 말씀을 하셨어요. '너무 서두르지 말고 침착하게 대응하시라. 용기를 가지시라. 저희가 응원하겠다'고요."
그동안의 어려움이 눈 녹듯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이기분 교감은 수화기를 내려놓은 뒤에 교직원들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 감격에 차 모두가 박수를 쳤다. 앞으로 남은 일을 잘 해결할 수 있으리라는 용기가 생기는 순간이었다.
"쌓인 역사가 있기에 오늘이 가능했다고 생각합니다. 죽향초가 111주년을 지나 1111주년을 맞이하기를 바라요. 그때는 학생, 학부모, 교직원 더 나아가 지역이 함께할 수 있을 테지요." (이정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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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궁 금메달' 김우진 모교의 고민 "폐교만은 안 되길...">(http://omn.kr/1wj0d) 기사로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