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 세계여행을 나섰습니다. 여행지에서의 한 끼 식사를 기록해 보려고 합니다. 음식 한 접시는 현지인의 환경과 삶의 압축판이요 정체성이라 여기기 때문입니다. 매일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음식을 먹는 즐거움을 독자들과 공유하고 싶습니다.[편집자말] |
디종(Dijon) 기차역에서 차를 렌트했다. 디종 숙소를 찾다가 쿠체이(Couchey) 마을의 전통 메종(Maison 와인 양조장)을 개조한 숙소 사진 한 장에 훅 넘어가 내가 무슨 짓을 한 걸까.
프랑스에서 50대 아줌마 셋이 차를 덜컹 빌려 버렸다. 디종 숙소에서 시작한 나비의 날갯짓은 차를 빌려 부르고뉴의 와인루트를 따라가다가 본느(Beaune), 마콩(Macon), 안시(Annecy)를 거쳐 리옹(Lyon)까지 내려간다는 태풍 계획을 가져왔다.
디종에서 10km도 채 안 떨어진 쿠체이 숙소까지 어떻게 차를 몰아 왔는지도 모르겠다. 차를 받아 든 순간 묵직한 걱정 덩어리까지 같이 안겨 받았다. 차가 내 발에 자유를 달아준 게 아니라 족쇄를 달아 준 기분이다.
과연 운전만 할 줄 안다고 도로 사정도 교통 문화도 다른 남의 나라에서 운전할 수 있을까? 그렇게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실험 대상으로 만들어버렸다.
디종은 보르도 지역과 함께 프랑스 양대 와인 산지인 부르고뉴 지역의 최북단 지점이다. 디종을 막 벗어나니 일명 와인 루트로 알려진 그랑 크뤼(Grand Cru) 표시가 나왔다. 그랑 크뤼 도로는 작은 와인 마을들을 거치며 포도 산지를 연결하고 있었다. 한적한 도로라 걱정했던 것보다 운전이 어렵지 않았고 핸들에 들어간 힘이 조금씩 빠지기 시작했다.
우리나라에 논 평야가 있다면 부르고뉴에는 포도밭 평야가 있다. 눈앞은 포도밭 지평선과 포도밭 구릉뿐이었다. 이른 봄이라 무릎 아래의 키 낮은 포도나무가 끝도 없이 펼쳐져 있었다. 울퉁불퉁한 근육질의 포도나무 밑동에서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포도밭 사이사이에 노란 물감을 부어 놓은 듯 유채밭도 눈이 부셨다.
쿠체이 마을에서 출발해 본느를 거쳐 두 시간쯤 달렸을까. 식당이 있을 법한 마을로 들어갔다. 골목 입구에서 요리 2개에 30유로라는 입간판을 보고 식당에 들어갔다. 명색이 와인 루트를 달리는 중이니 와인도 한 잔씩 주문해야지!
셋이서 각자 스타터와 메인 메뉴를 하나씩 고르고 기다리니 시키지 않은 음식 하나가 나왔다. 이것이 주방장이 알아서 내어 준다는 한입거리 애피타이저, '아뮤즈부쉬(Amuse-bouche)'인가? 또 수프 비슷한 것이 나왔다. 그렇다면 이건 애피타이저 '앙트레'? 시골 식당이라 파리보다 인심이 좋은지 식전에 뭘 자꾸 준다. 고맙게도.
드디어 내가 주문한 푸아그라와 관자 요리를 포함해 음식이 나왔다. 우리에게 서빙되는 건 음식이 아니라 예술이었다. 먹는 게 이렇게 예쁜 건 반칙이 아닐까 싶을 만큼 데코레이션이 섬세했다.
커피를 시켰더니 달콤한 후식까지 앙증맞게 나와 끝까지 우리를 감동시켰다. 셰프가 음식 설명과 와인 추천을 해주는가 하면 와인도 직접 따라 주는 등 기본 30유로 식사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서비스도 품격 있었다.
프랑스 여행 와서 최고의 식사라고 추켜세우며 즐겁게 식사를 마쳤다. 계산서를 보니 불길하게도 뭔가가 잔뜩 적혔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큰 금액, 와인과 커피값이 더해져 총 180유로가 청구되었다. 스타터 요리 전에 먹은 것과 커피에 곁들여 나온 후식이 다 더해져 있었다. 왜 우린 이걸 다 공짜라고 생각했을까. 한국 돈으로 환산하니 1인분에 무려 9만 원짜리 식사가 되었다.
계산을 치르고도 믿기지 않아 영수증과 메뉴판을 번갈아 보았다. 아하! 우리가 먹은 메뉴는 1인당 30유로가 아니었다. '2개 요리 30유로'란 말 뒤에 적힌 '평일 점심만 가능'이란 말을 놓친 것이었다. 그날은 일요일 점심이니 우리는 3코스짜리 38유로 식사를 제공받은 것이었다.
어쩐지 이것저것 많이 주더라. 우리는 와인과 함께 아뮤즈부쉬, 앙트레, 스타터, 플라(메인요리), 카페 구르망을 먹은 것이다. 나중에 알았지만 우리가 점심을 먹은 곳은 명품 와인 '지베리 샹베르탱(Gevery Chambertin)'을 생산하는 지브리(Givry) 마을이었고, 그날 마신 와인은 상위 1.4%의 와인에게만 부여한다는 최고 등급 그랑 크뤼까지는 아니어도 상위 10%에 들어가는 2등급 프리미어 크뤼의 와인이었다.
한 마디로 오늘의 과(過)한 다이닝은 프랑스어 문맹이 가지고 온 행복한 참사였다. 그동안 열흘 넘게 단품 식사와 직접 해 먹은 끼니로 절약한 식비를 오늘 점심으로 보상받았다고 쳤다. 맛있게 폼나게 기분 좋게 먹었으니 파인 다이닝(Fine Dinning) 아닌가.
파인 다이닝 효과인지 차도 잘 달려 주었다. 유료도로 톨비 내는 방법이 무서워 무료 도로만 돌아다니다가 실수로 유료도로를 타게 되었다. 닥치니까 다 하게 되더라. 통행권 뽑고 카드 꼽고 요금 내고... 안시에서는 셋이서 주차 기계랑 삼대일로 씨름한 끝에 주차비 내고 차도 세웠다. 그리하여 렌터카 빌린 지 삼일 만에 종착지 리옹역까지 달려 간신히 차를 반납했다.
차를 돌려주고 나니 어찌나 홀가분한지 날아갈 것 같았다. 차 없으니 이렇게 좋은데 왜 사서 고생을 했을까. 단언컨대 인간은 절대로 합리적인 동물이 아니다. 그래도 포도밭은 원 없이 봤으니 됐다. 최고의 점심도 먹었으니 됐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