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뉴욕에서 찍은 민영익 사진. 1883년
 뉴욕에서 찍은 민영익 사진. 1883년
ⓒ 뉴욕 스미스소니언 박물관 소장

관련사진보기

 
김옥균과 주도세력은 구체적인 거사 계획을 논의했다. 수구파의 눈을 피해 동대문 밖 탑골승방과 압구정변 등으로 장소를 옮겨 다니면서 준비를 하고, 김옥균은 박영효와 함께 병중의 유홍기를 방문하여 의견을 들었다. 개화파 형성의 선구적 역할을 했던 박규수·오경석·이동인은 이미 타계하고 유홍기만 생존해 있었다.

유홍기가 "일본 공사가 귀임한 후에, 세상이 온통 떠들썩하여 물정은 바다와 구름같이 동요하고 있으니 제군도 심히 위험하다 하겠다. 당면 계책으로서는 하루라도 빨리 일을 도모하는 것인데, 일본 정부의 정략을 제군은 깊이 알고 있는가" 하고 묻기에 내가 대답하기를 "일본 정부가 물론 의사가 있는 듯 하지만, 설사 그들의 원조가 없더라도 우리들의 뜻은, 나라가 이미 배수무량(背水無糧)의 절박한 지경에 달하였으니, 우리가 일본정부의 움직임을 기다릴 수 만은 없습니다. 마침 죽첨(다케조 신이치로)이 귀임할 때부터 그 기색으로 추찰하건대, 오히려 지나치게 과격해서 우리에게 재난이 덮칠 듯 하여 더욱 그러합니다. 운을  하늘에 걸로 사보국(死報國)의 결의가 되어 있으니, 선생님은 아무쪼록 안심하시고 몸조리를 하시옵소서. (주석 8)

김옥균은 거사를 며칠 앞둔 11월 25일 귀임한 일본 공사 죽첨을 만났다.

"내정개혁 및 간신들을 제거하는 방책은 오로지 우리가 맡는다. 사건 발생 후 군대를 출동하여 폭발을 막는 것은 공사가 담당하기로 하고, 이것을 서약하였다." (주석 9) 
일본 공사에게 사전에 거사를 통보하였고, 당일 질서유지에 나서 줄 것을 다시 요청했던 것이다. 

김옥균은 11월 29일 고종을 알현, 프랑스·청국·일본·러시아 등 조선을 둘러싼 여러나라의 정세를 설명하고, "당오전 및 간신배들의 폐해를 지적하면서 구태를 고수할 수 없는 상황, 안으로는 제도를 혁신하여 민력을 양성하고 밖으로 독립을 선언하고 문호를 개방하여, 이로써 개화문명을 섭취하면 몇 해 지나지 않아 국력이 증강될 것이라" (주석 10) 피력하였다.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서광범, 세 번째가 민영익이다. 네 번째 어린이는 박용화다.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가 홍영식이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유길준이다. 한 자리에 모여 사진을 찍었지만 급진 개화파는 갑신정변을 통해 민영익을 비롯한 민씨 정권에 칼끝을 겨눴다.
▲ 갑신정변 전에 찍은 개화파 사진 앞줄 오른쪽에서 두 번째가 서광범, 세 번째가 민영익이다. 네 번째 어린이는 박용화다.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가 홍영식이다. 뒷줄 왼쪽에서 네 번째가 유길준이다. 한 자리에 모여 사진을 찍었지만 급진 개화파는 갑신정변을 통해 민영익을 비롯한 민씨 정권에 칼끝을 겨눴다.
ⓒ 국사편찬위원회

관련사진보기

 
거사를 앞두고 김옥균은 국왕을 비롯하여 주요 인사들과 면담을 갖는 등 결전의 준비를 한 것이다. 그리고 동지들과 거사의 방법으로 세 가지 방안이 논의되었다. 

1안 : 우정국의 창립 축하연에서 수구파를 처단하는 방법.
2안 : 경상감사 심상훈을 달래서 북유(北由)에 있는 홍영식의 별장인 백록동 정자에서 연회를 베풀고 수구파를 처단하는 방법. 
3안 : 자객에게 청복(淸服)을 입혀 일거에 민영목·한규직·이조연 등 사대당을 죽이고 민태호·민영익 부자에게 죄를 씌워 함께 궤멸시키는 방법. (주석 11)

결국 제1안이 채택되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근대적인 우편제도로 마련된 우정국의 개설 축하연에 수구파 수뇌들을 초치하여 처단하기로 방침을 짠 것이다.

윤치호의 기록을 통해 거사 당일의 생생한 실상을 알아본다.

마침내 1884년 12월 4일 저녁 예정대로 축하연이 홍영식이 총변으로 있던 우정국에서 열렸다. 홍영식은 후덕한 사람이어서 누구나 그를 믿었다. 따라서 그의 초청장을 받고 모두들 모였다. 단지 외교사절로 일본 공사 죽첨과 독일 총영사 젬부쉬 만이 병을 칭하며 불참하고 조선측 인사 중에는 후영사 윤태준이 숙직으로 불참하였다.

모인 사람은 총 19명이었다. 긴 책상 좌우편에 손님들이 앉고 책상 동쪽에 주빈인 홍영식, 서쪽에 박영효가 앉았다. 그러나 별궁에 불을 지르기로 한 당초의 계획이 마음대로 안 되었다. 별궁에 불이 잘 붙지 않아 자리에 앉아 있던 김옥균에게 사람들이 찾아와 귓속말로 보고함에 참석자들이 의심하였다. 

김옥균은 찾아온 사람에게 우정국 옆 초가집에 불을 질러 정변에 차질이 없도록 하라고 명하였다. 얼마 뒤 "불이야"하는 소리가 나자 좌중이 소란해졌다. 이때 푸트 미국 공사가 좌중을 안정시키기 위해 미국의 속담을 이야기하였다. 그 내용은 어떤 사람이 침착하게 자기 집 벽을 어루만지며 벽이 차니 우리 집에 불이 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고 하면서 그곳에 모인 손님들에게 안심시키고자 하였다.

이 말을 통역하려고 윤치호가 일어섰을 때 밖에 나갔던 영사 민영익이 자객에게 칼을 맞아 피투성이가 되어 우정국 안으로 들어왔다. (주석 12) 


주석
8> <갑신일록>, 11월 16일 조. 
9> 앞의 책.
10> 앞과 같음.
11> <갑신일록>, 11월 4일 조. 
12> <윤치호 일기>, 1884년 12월 4일 조.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혁명가인가 풍운아인가, 김옥균 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


태그:#김옥균, #김옥균평전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군사독재 정권 시대에 사상계, 씨알의 소리, 민주전선, 평민신문 등에서 반독재 언론투쟁을 해오며 친일문제를 연구하고 대한매일주필로서 언론개혁에 앞장서왔다. ---------------------------------------------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