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처럼 서울 나들이는 낯설다
오랜만에 친구를 만나러 가는 중에 지하철에 올랐다. 어리바리한 늙어가는 청춘은 모든 것이 낯설었다. 지하철 노선을 찾는 것도 낯설고, 표를 발급받고 오가기도 버거운 발걸음이다. 친구에게 배운 것을 기억해 가며 간신히 무임승차권을 발급받았다. 무임승차권이 부담스러워 늘 후불 교통카드를 사용한 것은 '아직은 젊다'는 생각에서였지만, 한 번은 해봐야겠다는 생각에 친구에게 학습한 기술(?)을 동원한 것이다. 시골사람이 오랜만에 구차한 짜릿함을 맛보며 지하철에 올랐다.
사람에 밀려 오른 지하철은 추울 정도의 썰렁함이 다른 세상임을 알려준다. 더위에 지쳐있는 몸에 썰렁한 내부 온도는 '불평등'이라는 단어가 퍼뜩 떠 오른다. 시골사람의 질투일까 아니면 편견일까? 하나마나한 생각을 얼른 접고 둘러본 지하철은 평일 한 나절이라 그런지 한가하다. 대부분 사람들은 앉아 있고 얼마간의 사람들이 서 있는 풍경에 말 한마디 없는 공간은 낯선 이방인에게 두렵기도 했다.
순간적으로 고민이 생겼다. 나는 어떻게 몸을 간수해야 할까? 많은 사람들처럼 핸드폰을 꺼내 뒤적여야 할까? 아니면 손잡이를 잡고 무심한 척 서 있어야 할까? 핸드폰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들은 무엇이 그렇게도 할 것이 많을까 의심하고 있는 사이에 대단한 풍경을 만났다. 한 손은 손잡이를 잡고 서 있는 젊은이, 다른 손에 핸드폰을 들고 문자를 보내고 있다.
어느 순간 핸드폰과 한 몸이 됐다
핸드폰을 손바닥에 놓고 엄지 손가락 하나만으로 현란하게 문자를 보내고 있다. 사람의 손이 저렇게도 쓰일 수 있다는 것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손바닥에 놓인 핸드폰은 그렇다 하더라도 엄지손가락으로 문자판을 오가는 손놀림은 가히 예술이었다. 굵은 엄지 손가락이 날아다니는 모습을 한참을 바라봤다.
오래전부터 사용한 핸드폰, 독수리타법으로 보내는 문자가 불편해 가끔은 양손을 사용한다. 문자를 보내는 속도도 느리지만 아직도 서툴러 이웃 자판을 건드리는 실례를 늘 범한다.
핸드폰으로는 자유롭게 글을 쓸 수 없으니 늘 아쉬워함은 변해가는 세월 탓일까? 왜 내 손가락은 굵은 것인가도 생각해 보고, 핸드폰 자판이 너무 작다고도 원망해 본다. 핸드폰에 몰두해 있는 아이들을 싫어하던 사람, 핸드폰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세월이 됐다.
아침에 잠에서 깨자마자 핸드폰을 찾느라 더듬거린다. 졸음에 눈이 감기면서도 이곳저곳을 휘저으며 찾아낸 핸드폰은 특별히 할 것도 없다. 그냥 찾아 이곳저곳을 휘젓고 다닌다. 잠시 후엔 아무 쓸데없는 짓이라며 침대에 휙 집어던지고 잠을 청한다.
몇 분 지나지 않아서 날씨가 궁금해 핸드폰을 찾는다. 이왕 핸드폰을 들었으니 프로야구 소식도 궁금하고, 혹시 문자가 와 있지 않은가도 궁금하다. 잠을 조금 더 자고 싶어 얼른 핸드폰을 던져 놓지만, 몇 초가 지나고 또 손이 가고 만다. 이때쯤엔 나만의 삶이 그렇게 사는 것이 아니라는 비겁한 합리화도 해보는 아침이다.
모두는 핸드폰이 중독됐다
자전거를 타고나서는 길, 동네 할머니가 울밑에 풀을 뽑고 계신다. 무더위에 어떻게 일을 하시나 걱정하는 사이 깜짝 놀랐다. 할머니 옆에는 자식들이 마련해 준듯한 빨간색 핸드폰이 누워있다. 울너머에서 잠시 풀을 뽑고 있으신 할머니가 전화를 멀리 할 수 없었나 보다. 멀리 사는 자식들에게서 전화가 올 수도 있고, 경로당 친구에게서도 올 수가 있다. 전화가 오면 받아야 하기에 당연하지만, 우리의 삶은 그렇게 바뀌고 있다. 어느새 전화기와 한 몸이 돼 온종일 함께하고 있다. 가끔은 고개를 갸우뚱하게 하는 것은 왜일까?
체육관에 운동을 하러 새벽에도 가고 조금 늦은 시간에도 간다. 수많은 운동기구가 갖추어져 있고 서늘한 에어컨이 주는 공간은 운동하기에 안성맞춤이다. 순번에 따라 유산소운동과 근력운동을 하기도 하고, 근력운동도 하는 순서를 나름대로 정해 놓고 한다. 시원한 체육관은 운동하기도 좋지만, 핸드폰과 어울리기도 안성맞춤이다. 운동을 하러 온 사람이 운동기구에 앉아 핸드폰과 놀고 있다. 몇 분이 아니라 한 동안 움직임이 없으니 어떻게 해야 할까? 모르는척하며 운동의 순서를 바꾸어야 한다.
고개를 숙이고 있는 사람과 고개를 들고 있는 허수아비는 차이가 난다고도 한다. 단지 고개를 들고 숙인 모습이 사람과 허수아비의 구별법이라는 우스갯소리다. 언제나 휴대폰과 어울림을 못 마땅해했지만 어느 순간 같이 살아가고 있다. 운전을 하면서 정지 신호가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핸드폰으로 가는 것은 내 손이었다. 깜짝 놀라 핸드폰을 놓고 옆차를 보자 핸드폰에 고개를 숙이고 있다. 출발 신호가 들어왔어도 요지부동이다. 뒤차가 경적을 울려주자 미안한지 쏜살같이 달려 나간다.
핸드폰과의 현명한 동거는?
일상이 된 핸드폰을 적당히 절제하며 살아가야 하지만, 핸드폰 없는 삶은 나도 어렵고 모두가 어려운 삶이 됐다. 언제나 고개를 숙이고 살아가는 현대인들, 거북목 증후군이 나타나고 손목터널 증후군이 악화될 수 있다 한다.
가끔은 목이 뻐근하고 눈이 침침하며, 손목이 뻐근한 것은 어찌 된 일인가? 혹시, 핸드폰이 주는 불편함은 아닐까? 근래에 문제가 되고 있는 교육현장에서도 그리고 군대 내에서도 핸드폰은 논란거리다. 일상생활에서 떼어 놓고 생각할 수 없는 휴대폰이다. 어떻게 해야 핸드폰과 현명하게 살아갈 수 있을까?
핸드폰으로 쓰는 것이 불편해 컴퓨터 신세를 진다. 핸드폰으로 이곳저곳에 올라온 글을 읽지만, 컴퓨터로 글을 쓰고 글을 송고하며 블로그를 뒤적거린다. 기어이 할 일이 끝난 듯 하지만 쉽게 인터넷을 떠날 수 없다. 안 되겠다 싶어 얼른 인터넷을 닫고 거실로 내려오는 길, 손엔 어느새 핸드폰이 들려있다. 컴퓨터를 멀리 하자는 생각이었지만 혹시 전화가 오면 어떻게 하나라는 어리석은(?) 생각에서다.
나는 은퇴하고 골짜기에 숨어 사는 사람이다. 가까이에서 소주 한잔하던 친구들도 이젠, 전화도 뜸하다. 기껏해야 여론조사나 대출 홍보 전화가 대부분이다. 얼마나 불쌍한지 보험을 찾게 해 준다는 전화요, 아니면 상조회에 가입하라는 친절한(?) 전화가 대부분이다. 엄청난 사업을 하는 사람도 아니고, 많은 친구들이 있어 전화가 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전화기가 옆에 있어야 마음이 편한 이유는 무엇일까?
이층 서재에서 글을 정리하는 중에 식사를 하라는 아내의 부름이다. 핸드폰을 어떻게 할까를 순간적으로 고민한다 핸드폰을 놓고 내려가는 어리석은 용기(?)를 낸다. 하지만 빈손으로 내려가는 마음이 편한 것은 아니다. 오지도 않을 전화받을 것을 걱정해서다. 바쁘게 살아가는 어느 순간에도 어느새 핸드폰과 한 몸이 된 중독자가 되고 말았다. 핸드폰은 이제 뗄 수 없는 삶의 일부분이 됐지만, 핸드폰과 함께 살아가는 현명한 방법은 어떤 것일까를 늘 고민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