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 연휴가 지나갔다. 우리 가족은 늘 그랬듯이, 연휴의 시작 전날 시댁으로 향했다. 출퇴근이 비교적 자유로운 남편은 항상 오전에 일찍 출발하지만, 이번에는 수업을 마치고 아이를 데려가느라 오후 4시 반쯤에야 출발했다. 연휴 전날 오후가 가장 길이 많이 막히는 걸 잘 알면서도 굳이 그날 출발한 건, 남편의 다소 융통성 없는 성격과 시댁에서 최소한 두 밤은 자야 하는 정서 때문이었다.
도시에서 나고 자란 나에게 시골에 있는 시댁은 너무나 낯설고 불편한 곳이었다. 방에 들어갈 때마다 머리를 숙이지 않으면 번번히 문틀에 머리를 찧게 되는 좁고 낮은 여닫이문들과 누우면 발이 벽에 거의 닫을 정도의 좁고 불편한 잠자리는 그런대로 참을만했다.
하지만, 아래가 훤히 들여다보이고 네모난 구멍에 맞춰 쪼그려 앉아 볼일을 보아야 하는 재래식 화장실은 내겐 단순한 불편을 넘어서 거의 공포 수준이었다. 갈 때마다 몇 번씩 이마를 찧고 밤중에 화장실을 가는게 무서워 물도 안 마시는 며느리와 손주들. 우리의 고충을 덜어주기 위해 아버님은 몇 년 전 문을 바꾸고 주방 옆 수돗가 한 귀퉁이에 양변기를 들여놓으셨다.
여기에다 명 절내내 이어지는 시어머님의 과한 아들 사랑과 걱정을 섞어 늘어놓으시는 끊임없는 잔소리는, 내게는 시댁에 가고 싶지 않은 또 하나의 이유가 되었다. 그래서 명절이 다가오면 점점 기분이 가라앉았다. 또 너무나 다른 환경 탓에 내가 느끼는 불편함을 이해하고 공감해주기보다는, 시댁을 그저 시댁이라 싫어하는 것으로 오해하는 남편과의 갈등을 극복하기가 가장 힘들었다.
부담스럽기만 하던 시어머니, 동그랗게 말린 어깨를 보니
장장 8시간이 걸려서 밤늦게 시댁에 도착했다. 보통 초저녁부터 주무시는 부모님은 그때까지 주무시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고, 집에 들어서자마자 휴게소에서 저녁을 먹었다고 하는데도 밥상부터 차리시려고 했다.
다음 날에는 아침 일찍부터 전을 부치고, 오후에는 어머님과 읍내에 나가 장을 보며 분주한 하루를 보냈다. 다른 때는 아들 돈 쓰는 것이 걱정스러워 뭐든 필요없다고만 하시던 어머니가 어쩐 일인지 마트 구석구석을 돌며 카트에 가득 물건들을 고르셨다. 알고 보니 명절을 앞두고, 그 지역에서 쓸 수 있는 복지카드를 집집마다 나눠주었단다. 그래서인지 계산대에서 당당히 카드를 내미시는 손길에 자신감이 넘쳐났다.
아들에 대한 어머님의 극진한 사랑은 27년 동안 하나도 변한 게 없다. 온 가족이 둘러앉은 저녁상에서 어머님은 늘 그랬듯이 맛난 반찬들을 죄다 아들 앞으로 밀어놓으셨고, 자식들에게 아버님의 흉을 보시다가도, 며느리인 내가 당신 아들에 대한 작은 불만이라도 얘기하려고 하면 "세상에 숭 없는 사람이 어디 있간디?"하시며 말을 끊어버리셨다.
아들 넷 중에서 둘을 먼저 떠나보내신 어머니에게 막내아들은 당신의 심장과도 같다. 아들이 건강하고 무탈하게 지내는 것만이 어머님의 유일한 삶의 의미이고 희망이라는 걸 잘 알면서도 그런 어머님의 넘치는 아들 사랑이 며느리인 나에게는 늘 부담스럽고 버겁기만 했다. 나도 우리 집에서는 귀한 딸인데 시댁에 오면 남편에게 밀려 상대적으로 홀대받는 기분이 들어 서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이번 추석날 아침, 어머님은 미리 준비해 놓으신 음식들로 차례상을 차리셨다. 건강 문제로 무릎이 잘 펴지지 않아서 기다시피 하시는 어머님이 언제 그렇게 하셨는지 탕이며 나물이며 갖가지 음식들을 내놓으셨다. 힘들어서 못하겠다고 하시면서도 명절마다 매번 정성을 다해 차례상을 차리시고는 조상님께 자식들의 안녕을 비신다.
차례를 지내는 동안 멀찌감치 떨어져 앉아 계시는 어머님의 동그랗게 말린 작은 어깨가 눈에 들어왔다. 그건 내가 그동안 부담스럽고 버겁게만 느껴왔던 힘 있는 시어머니의 모습이 아니었다. 어느새 너무 많이 늙어버린 어머님의 모습이 짠하게 느껴졌다.
이번엔 시댁을 나서며 전동차를 타고 대문 밖까지 배웅 나오신 어머님을 꼭 안아드렸다. 집에 돌아온 뒤 다음날에도 어머님께 전화를 드렸다. 아들을 올려보내고 시골집에 두 분만 남으신 부모님이 적적해하실 것 같아 마음이 쓰였다. 결혼 뒤 처음으로, 시부모님들이 친정 부모님과도 같은 마음이 들었다.
결혼한 지 27년이 되어서야 불편하기만 했던 시골집이 조금씩 정겨워지고, 시부모님이 진짜 내 부모님이 되어 가는 것 같다. 여기 오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개인 블로그와 브런치스토리에도 실릴 예정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