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통해 책 너머의 세상을 봅니다. 서평 쓰는 사람들의 모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 북클럽' 3기입니다.[편집자말] |
험한 세상, 웬만하면 착하게 살려고 애를 쓰는 편이다. 하지만 연일 쏟아지는 부정적 뉴스들은 선하게 살려는 마음을 자주 쪼그라들게 만든다. '나만 착하면 뭐해! 다들 자기 이익만 좇는 세상에.' 억울한 생각이 불쑥불쑥 든다. 세상에 대한 비관과 냉소가 짙어져 가던 요즘, 답답한 푸념을 일시에 멈추게 하고 사람에 대한 희망을 다시 심어주는 책 한 권을 우연히 만났다.
바로, 아름다운 부자 김장하 선생의 삶을 다룬 <줬으면 그만이지>란 책이다. 이 책은 기자 출신 김주완이 사회에 귀감이 되는 김장하란 인물의 평생 선행을 발굴, 추적하여 기록한 취재기로 23년 1월 출판되었다. 책의 구체적 내용에 앞서 우선 30여 년 간 지역 언론사에 몸담았던 저자가 이 책을 집필하게 된 동기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사회의 부정한 일들을 파헤치고 폭로하는 기자의 직분에 충실했던 저자는 한 세대가 지나고 또 다른 세력들에 의해 부정적 상황이 비슷하게 반복됨을 보며 회의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러던 중 존경할 만한 어른들을 찾아 그분들의 선행을 알리는 기사를 마침 쓰게 되었는데, 그런 글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꾸는 또 다른 방법임을 깨닫게 되어 기자로서의 보람과 효능감을 회복했다고 고백한다.
그렇잖아도 변하지 않는 세상을 원망하던 터라 저자가 느낀 회의감에 십분 공감되었음은 물론, 악의 응징보다 선의 발굴과 전파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 도움 될 수 있다는 발상 전환이 더할 나위 없이 신선했다. 우울하고 답답했던 속을 시원하게 씻겨 내려주는 차가운 물 한 바가지를 들이켠 듯했다. 그런 그가 심혈을 기울여 책으로 소개한 인물, 김장하 선생의 행적은 참으로 놀라웠다.
그의 선행이 심오한 울림을 주는 이유
1944년 경남 사천출생의 김장하 선생은 19세 때 취득한 한약업사 자격으로 사천과 진주에 한약방을 내어 큰 재산을 일구었다. 그는 모은 재산을 어려운 학생들과 진주시의 여러 분야에 평생 동안 기부했는데, 그 범위와 규모가 실로 대단하다. 하지만 그의 선행이 심오한 울림을 주는 이유가 그저 많은 돈을 기부했다는 데서 비롯된 것만은 아니었다.
돈 많은 사람이 사회의 어려운 곳에 돈을 기부하는 일은 훌륭한 일이긴 하나 감동까지 주는 것은 쉽지 않다. 김장하 선생의 삶이 묵직한 감동의 파문으로 다가오는 특별한 이유는 평생 대가를 바라지 않고 묵묵히 진심을 다해 도와준 그분의 겸손한 성품과 철학 덕분이다. 저자 김주완은 그분이 가장 오랫동안 공들인 장학사업을 통해 그 면모를 밝혀내고 있다.
김장하 선생은 한약방을 개업하고 얼마 안 된 20대 중반부터 이미 주변에 어려운 학생들의 공납금을 대납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1984년에는 아예 명신고등학교를 설립하고 장학회를 운영하였다. 1991년 학교를 국가에 헌납한(당시 110억 원 규모) 이후에는 남성문화재단을 통해 장학생 선발과 지원을 지속했다. 그렇게 2021년까지 그의 지원을 받은 총 장학생의 숫자는 대략 1000명은 족히 넘고, 금액 또한 30억~40억 정도로 추산된다고 한다(116쪽).
김장하 선생이 자신의 선행 드러내기를 극도로 꺼리는 탓에 저자는 선생의 과거 행적들을 밝혀내는 데 애를 먹었는데, 저자가 어렵게 밝혀낸 '김장하 장학금'에는 몇 가지 특징이 있었다.
장학금 수여식 또는 전달식 같은 생색내기 행사를 철저히 배격, 성적보다는 가정형편이 어려운 학생을 우선 선발, 가급적 1회성이 아닌 졸업할 때까지 전액 지원, 등록금뿐 아니라 생활비 등 각종 경비까지 지원한 점이다.(117쪽)
또한 드물게 재수생에게 입시학원비와 하숙비까지 지원하였고, 살 곳이 마땅찮은 아이는 아예 자신의 집에 들여 함께 살면서 돌봐주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학교와 재단을 통한 공식루트뿐 아니라 개인적으로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여 돌봐 준 장학생들도 셀 수 없었다는 점이다.
이에 관한 기록은 전혀 남겨지지 않아 저자가 김장하 어른의 주변 인물들을 인터뷰하거나 취재 과정에서 우연히 드러난 인물들을 통해 파악할 수 있었다고 한다.
정작 김장하 선생 자신은 흔한 차 한 대도 평생 사지 않고, 최근까지도 급경사 계단의 오래되고 낡은 건물에서 기거하셨다고 한다. 장학생들이 한결같이 밝힌 바에 따르면, 그분의 태도가 남달라서 장학금을 주면서도 필요한 게 뭐냐고 물으실 뿐 아무런 간섭도, 당부도, 참견도 일절 없었다고 회고한다. 그의 청빈함은 물론 그가 그보다 어리거나 어려운 처지의 타인을 얼마나 존중하고 배려했는지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줬으면 그만이지'란 책 제목처럼 무주상보시를 그대로 실천하셨기에, 장학생들은 대가에 대한 부담 없이 자유롭게 자신이 하고 싶은 바를 마음껏 펼칠 수 있었다고 회고한다. 만원어치만 남에게 주어도 백만원어치의 생색을 내는 요즘 세상에 이런 분이 실제로 계시다니! 감동의 클라이맥스는 김장하 어른이 키워낸 인재들이 사회의 각 분야에서 그분을 길잡이 삼아 같은 길을 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장학금을 받은 이들 중엔 잘된 이도 있지만 잘 못된 이도 있기에 김장하 선생은 그들을 들춰내는 것에 극구 반대하지만 이미 알려진 분들이 있었다. 문형배 헌법재판관의 청문회 일화는 그중 대표적이다. 문형배 헌법재판관은 청문회 때 자신이 김장하 장학생임을 스스로 밝히며 "내게 고마울 필요가 없다. 나도 이 사회에서 받은 것이니 갚으려거든 이 사회에 갚으라"고 하신 김장하 어른의 말씀을 살아오며 한시도 잊은 적이 없다고 했다.
또한 은퇴 후 영리를 위한 변호사 활동을 하지 않겠다고 하신 말씀에는 김장하 어른의 청렴과 지조가 그대로 겹쳐 보인다. 사천에서 고등어파스타로 유명한 이탈리안 레스토랑 '비렌치아'를 운영하는 박영석 셰프도 김장하 선생에게 큰 힘을 얻은 분이라고 한다. 그는 지역의 어려운 이웃들을 정기적으로 초대하여 건강한 음식을 대접하는데, 그 또한 김장하 어른에게 감화되어 1/100, 1/1000의 김장하라도 되기 위해 그 길을 따르고 있을 뿐이라고 밝힌다.
후세들이 닮고 싶어하는 어른
김장하란 한 사람의 선한 씨앗이 세상에 이리도 향기롭게 퍼뜨려질 수 있다니! 책 속의 문장과 단어를 읽는 것만으로도 감정이 충만해진다. 저자 김주완이 취재하여 밝혀낸 김장하 선생의 선행은 장학사업뿐이 아니다. 그는 진주의 거의 모든 분야에 헌신하셨다. 지리산 살리기 운동 같은 환경 생태 운동에 앞장섰고, 권력과 재물에 휘둘리지 않는 지역 시민신문, <진주신문> 창간에 주주로 참여하여 후원하였다.
가을문예를 통해 가난한 문화예술인들을 배출하였으며, 특별히 차별에 민감하여 '형평운동기념사업회'를 직접 조직하고 회장을 맡아 공개적으로 시민운동에 나섰다. 가정폭력 피해 여성을 위한 쉼터건립에도 힘써 주셨다. 저자는 평생 동안 대가 없는 나눔, 간섭 없는 지원, 바라지도 기대하지도 않는 베풂을 실천해 온 김장하 선생의 철학을 어느 한 기념식에서 그분이 하신 말씀의 한 대목에서 찾는다.
"똥은 쌓아두면 구린내가 나지만 흩어버리면 거름이 되어 꽃도 피우고 열매도 맺는다. 돈도 이와 같아서 주변에 나누어야 사회에 꽃이 핀다."(341쪽)
살아온 날들을 뒤돌아 보게 되는 연말이다. 나는 얼마나 주변에 좋은 영향을 끼치며 살아왔는지 막상 돌아보자니 김장하 선생의 삶이 보석처럼 더욱 빛나 보인다. 세상을 아름답게 하려는 숭고한 지조와 신념을 묵묵히 펼쳤던 본인의 삶으로 여실히 증명해 보여주었기 때문이다. 책에는 이 글에 언급되지 않은 더 많은 부분이 놀람과 감동으로 흐르고 있으니 궁금한 분들은 꼭 책을 읽어보시기를 권한다.
저자 김주완은 '후세들이 닮고 싶어하는 어른이야말로 이 시대의 진정한 어른이 아니겠는가' 하는 심정으로 김장하 선생의 삶을 책에 담았다고 했다. 얼마 남지 않은 올해지만, 더 많은 사람들이 김장하 선생처럼 선하고 따뜻한 일에 함께하여 그 소식들로 전국 방방곡곡이 왁자지껄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