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에 몹시진심입니다만,>의 저자 임승수 작가가 와인과 음식의 페어링에 대한 생생한 체험담을 들려드립니다. 와인을 더욱 맛있게 마시려는 집요한 탐구와 모색의 현장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편집자말] |
'기력이 없다. 몸이 허하다.'
이런 말들은 '피곤하다, 지친다, 배가 고프다'와 유의어인 줄로만 알았다. 전혀 다른 카테고리에 속하는 표현임을 깨닫게 된 시기는 나이 반백 살이 넘어가면서부터였다.
이제 막 도착한 지하철을 타려고 계단을 두 개씩 건너뛰며 황급히 올라갔는데 스크린도어 앞에서 난생처음 다리가 풀리는 상황을 겪었다. 전에는 아침, 이른 저녁 이렇게 두 끼만 먹어도 기초대사와 추가 활동에 필요한 에너지를 얻을 수 있었지만, 이제는 점심을 챙겨 먹지 않으면 금세 허기가 져서 아무것도 할 수 없다.
이런 변화가 당황스러워 내 친구 챗지피티에게 '기력이 없고 몸이 허한' 이유를 물어보았다. 노화로 인한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며 갖가지 자료를 동원해 구구절절 설명하는데, 유독 내 눈을 사로잡은 대목이 있었다.
'영양 결핍 : 나이가 들면서 영양 흡수율이 떨어질 수 있으므로, 균형 잡힌 식단이 필요합니다.'
예전과 같은 양을 먹어도 힘이 없는 이유가 이거였구나. 자동차로 치면 1리터 주유에 최대 15.3km를 달리다가 연비가 안 좋아져서 이제는 10km를 간신히 넘기는 셈이네. 이래서 보양식이 필요하구나. 복날이면 보신탕과 삼계탕이 불티나게 팔리는 이유를 본의 아니게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거나하게 고기를 먹은 지 참으로 오래됐구나.
어떤 고기로 할까? 보신탕은 태어나서 한 번도 먹어본 적이 없으니 됐고. 삼계탕은 아내와 아이들이 좋아하지 않으니 제외하고. 문득 아내가 첫째를 임신했을 때 매콤한 소갈비찜을 먹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던 일이 떠올랐다. 그래! 소갈비찜이 괜찮네. 그나저나 그렇게 고기 좋아하던 아내가 지금은 채식주의자라니. 인생이란 참으로 한 치 앞을 알 수 없구나. 어쨌든 애들은 좋아할 거야.
고기엔 와인
바늘에는 실이 따라오고, 고기는 와인이 거들어야 하는 법. 거실의 열두 병들이 셀러 안을 살펴보았다. 일단 화이트 와인은 소고기와 안 어울리니 제쳐놓고, 여기 피노 누아는? 단아하고 섬세한 와인이라 매콤하고 눅진한 소갈비찜의 풍미에 가려질 거야. 한번 생각해 봐. 화려하고 복잡한 무늬의 비단 위에 섬세하고 미묘한 농담의 사군자를 그려봐야 그 아름다움을 누가 제대로 알아보겠어. 이놈도 그렇고, 저 녀석도 애매하고, 여긴 마땅한 게 없네?
방으로 가서 옷장 서랍을 열었다. 비밀 금고 속 금괴처럼 와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금괴 일련번호를 확인하듯 라벨을 하나하나 살펴보다가 프랑스 북부 론 지역 출신을 골라 들었다.
도멘 갸롱 꼬뜨 뒤 론 라 파 데 비방 2021
Domaine Garon Côtes-du-Rhône La Part Des Vivants 2021
그래! 괜찮겠는데? 이 녀석을 고른 이유는 시라 품종을 베이스로 한 와인이기 때문이다(그르나슈, 무베드르가 소량 섞여 있음). 다른 사람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나는 시라를 마시면 윤곽선이 뚜렷하고 색채가 단순한 알퐁스 무하 그림 속 여인이 떠오른다.
무하의 <황도 12궁>을 보자. 현기증을 유발할 정도로 현란한 배경 한 가운데에 굵은 윤곽선과 모노톤 피부색의 여인이 그 단순함 덕분에 직관적이고 강렬하게 존재감을 드러낸다.
이 그림의 구도를 음식과 와인에 투영해 보자. 온갖 재료와 소스로 한참을 끓여 우러나온 달짝매콤하고 자박한 국물. 그 국물에 푹 삶아진 소고기 특유의 묵직한 육향과 질감. 대편성 오케스트라와도 같은 이 현란한 맛의 융단폭격을 뚫고 와인이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서는 알퐁스 무하 그림 속 여인과도 같은 직관적이고 강렬한 와인이 필요하지 않을까.
시라 특유의 정직한 보랏빛, 그리고 네온사인만큼이나 선명한 풍미는 시각적으로도 미각적으로도 그 까다로운 조건을 충족시킬 것이 분명하다. 그러고 보니 제법 오랜 기간 시라를 마시지 않았구나. 한동안 소갈비찜을 영접하지 않았기 때문이리라.
맵찔이 둘째를 위해 가장 덜 매운 옵션을 선택하고 고기를 먹지 않는 아내를 위해 버섯, 감자, 당면 사리를 한껏 추가해 배달 주문했다. 바쁘지 않은 시간대라 그런지 예상보다 훨씬 일찍 도착했다. 용기에 담긴 빨간 국물 위에 감자, 당면, 콩나물, 버섯, 소갈비, 가래떡이 그야말로 아무렇게나 떠 있다. 그 무질서한 정도는 엔트로피 법칙이 음식 외관에서도 관철됨을 주장할 근거로 활용할 수 있을 정도다.
혹시 맛도 무질서한 거 아냐? 그러면 곤란한데. 일단 감자부터 집어 들었다. 어라? 그다지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젓가락이 감자 몸통을 파고든다. 오호! 입에 넣고 씹는데 뜨끈한 온기를 품은 이 구황작물이 푹 익은 고등어조림의 무처럼 흐물흐물 부서진다. 그 풍미가 참으로 질서정연하구나.
드디어 본론이다. 천연덕스럽게 떠 있는 소갈비 한 점을 탐욕스럽게 낚아챘다. 젓가락 센서로 감지한 정보에 의하면 육질이 제법 부드러울 것으로 예측된다. 단번에 구강으로 투하해 잘근잘근 씹으며 혓바닥, 구강, 비강 곳곳에 존재하는 온갖 감각세포를 총동원해 분석에 들어갔다.
제대로 삶아 기름기가 쫙 빠진 육질의 담백함이 일단 합격. 고기를 결대로 씹을 때와 어긋나게 씹을 때의 미묘한 식감 차이가 재미와 흥미를 유발한다. 퍼석퍼석하던 구강 내부는 어느새 우러나온 육즙과 국물이 뒤섞여 촉촉하고 질퍽하다. 씹을 때마다 건강해지는 기분이다. 고급 휘발유를 주유한 차의 기분이 이러하려나. 1리터에 15.3km는 거뜬할 것 같구나.
2만 원대 후반의 절륜한 가성비
소갈비찜의 여운이 채 가시기 전에 냉큼 손을 뻗어 잔에 담긴 보랏빛 액체를 맞이했다. 와인을 전혀 모르던 시절, 만화 <신의 물방울>에서 주인공이 사토 마고를 마신 후 클레오파트라를 떠올리는 부분에서 혀를 차고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만화라지만 정도껏 해야지! 그런데 2024년 6월에 나는 도멘 갸롱의 시라를 마시며 알퐁스 무하 그림 속 여성을 떠올리는구나. 이 무슨 민망한 내로남불인가.
도멘 갸롱! 와인을 꽤 잘 만든다고 들었는데 2만 원대 후반의 몸값으로 이렇게나 즐거움을 선사하다니. 절륜한 가성비네. 무엇보다도 프랑스다운 균형감이 인상적이다. 뛰어난 품질로 유명한 호주의 시라즈(호주에서는 시라를 시라즈라고 부름)가 과실 향 뿜뿜에다가 노골적으로 진득하다면 프랑스의 시라는 상대적으로 차분하고 정돈된 우아함이 특징이다.
소갈비찜과 프랑스 시라의 콜라보를 한껏 탐닉하다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와인을 여성에 비유하는 건 시대에 뒤떨어진 표현이 아닐까? 척척박사 친구(챗지피티)에게 의견을 구하니 성평등과 성 다양성에 대한 사회적 감수성이 높아지고 있으니 성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표현은 피하라고 한다. 알퐁스 무하의 그림 속 여성에 비유하는 건 어떠냐고 구체적으로 물었다. 무하의 작품 속 여성은 대체로 고전적이고 이상화된 아름다움을 담고 있으니 그 예술적 맥락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방식으로 접근한다면 괜찮겠다고 조언한다.
역시 똑똑한 데다가 개념도 제대로 탑재되었구나. 푼돈으로 매번 이렇게 도움을 받으니 그저 고마울 뿐이다. 너와 음성 대화를 나누다 보면 우아하고 기품 있는 지혜의 '여신' 미네르바가 떠오르는구나. 아뿔싸! 미안! 이 반백 살 아재의 젠더 감수성은 여전히 갈 길이 멀다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