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덥습니다. '온열질환' '폭염' 같은 걱정이 여름이 상징이 된 듯도 합니다. 그럼에도 역경을 딛고 자라나는 생명을 느낄 수 있는 것 또한 여름입니다. 이상기온을 뚫고 결실을 맺은 여름 농산물과 알알이 담긴 이야기를 소개합니다. 더 많은 기사는 <월간 옥이네> 8월호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기자말] |
여름. 옥수수가 뜨거운 햇빛을 먹고 시원한 비를 마시며 쑥쑥 자라나는 계절이다. 밭 곳곳에 높다랗게 자란 옥수수는 저마다 알을 빼곡하게 채워 날마다 살을 찌운다. 한 끼 식사로도 충분한 찐 옥수수. 푹 쪄낸 옥수수를 잘근잘근, 앞니로 갉아 먹는 재미도 빠질 수 없다. 농민 정일영, 윤종순, 이철승씨를 만나 옥수수 이야기를 들어봤다.
[안남면 정일영] 초당, 미백, 대학찰, 흑찰… 네 가지 옥수수
20년째 안남면에서 옥수수를 키운 정일영(71)씨는 안남면 일대 1300여 평의 밭에서 네 종류의 옥수수를 재배한다. 가장 먼저 수확하는 하얀 '미백', 하얗고 쫄깃한 맛이 매력인 '대학찰', 찰기가 가장 높고 보랏빛이 매력적인 '대학흑찰', 가장 최근에 국내에서 재배되기 시작한 '초당옥수수'까지. 6월 말부터 7월은 다채로운 옥수수를 만날 수 있는 계절이다.
"미백을 제일 먼저, 그다음에 초당, 대학찰, 흑찰 순으로 수확해요. 옥수수는 햇빛을 듬뿍 먹고 자라지요. 그렇다고 봄에 너무 햇빛이 강하면 옥수수가 다 타버려요. 이전에는 7월 초에 수확했는데, 요즘은 조금 빨라져서 6월 말부터 옥수수를 따요."
제주에서 국내 재배가 시작된 초당옥수수. 정일영씨는 5~6년 전 처음 초당옥수수 농사를 시작했다. 진한 노란색과 높은 당도가 특징. 수매가도 평균 1400원으로 다른 종자보다 100원가량 높은 편이다.
"이제 전국적으로도 많이 보급됐죠. 초당옥수수는 생으로도 많이들 먹어요. 다른 종자보다 당도가 높아서 병충해 피해도 크다는 게 아쉬운 점이에요."
병충해 피해는 옥수수 농가에서도 큰 고민거리 중 하나다. 멸강나방을 비롯한 나방류와 노린재가 가장 대표적인 해충인데, 나방류가 파먹은 옥수수는 그 수염이 다 녹아버린다. 멧돼지와 오소리, 너구리 등 산짐승에 의한 피해도 있다. 멧돼지는 옥수수를 넘어뜨려 먹어치우고, 오소리와 너구리는 비바람에 넘어진 옥수수를 갉아먹곤 한다.
기후위기로 시기에 맞지 않게 너무 뜨겁거나 추운 날씨, 비 피해 등도 수확에 이르기까지의 큰 어려움이다. 정일영 씨는 수많은 장애물을 거쳐 수확한 옥수수를 농협, 대전공판장 혹은 개인소매상에게 판매하는 방식으로 납품하고 있다.
[장야옥수수 윤종순·이철승] 흑찰옥수수팝콘, 옥수수호떡... 모든 것을 한 자리서
옥천읍 장야리, 옥천장야주공아파트 인근. 포장천막 아래 여러 사람의 손길이 바쁘다. 한쪽에서는 트럭에서 갓 따온 옥수수를 운반하고, 껍질을 까고 수염을 제거하고, 일부 옥수수는 알알이 분리하고, 물에 쪄내고, 판매하고… 여러 작업이 한 곳에서 이루어지는 이곳은 2004년부터 20년째 옥수수를 직접 생산·판매한다는 장야옥수수 윤종순 씨의 공간이다. 이곳에서 윤종순(62) 씨와 이철승(57) 씨를 만났다.
"옥천읍 일대에 옥수수밭이 1000평가량 있는데, 흑미찰옥수수가 가장 쫄깃하고 맛있어서 이 종자를 생산·판매하고 있어요."
6월 말부터 서리가 오기 전까지가 옥수수를 수확할 수 있는 시기다. 옥수수가 다 자라기까지 보통 90~120일가량 소요되고, 유기질비료를 활용해 2·3모작을 하는 방식으로 농사를 짓고 있다. 손님이 끊이지 않는 이곳 옥수수 맛의 비결은 다름 아닌 당일 생산·소비다.
"옥수수는 갓 수확해 먹을 때가 가장 맛이 좋거든요. 그날 판매할 만큼 수확해 당일에 모두 판매해요. 부족하다 싶으면 그때그때 밭에 나가 더 따오죠. 우리 옥수수는 그냥 쪄먹어도 맛있는데, 물에 적당한 간을 해서 찌니 더 맛있어요(웃음)."
중간상인 없이 생산자가 직접 판매·가공하는 방식도 눈에 띈다. 한쪽에는 흑찰옥수수 팝콘, 옥수수속대, 볶은 옥수수 등 옥수수 가공식품이 가지런히 포장된 모습이다.
"직접 가공해 판매해보면 좋겠다 싶어 시도했죠. 수입 옥수수 팝콘과 달리 흑찰옥수수로 만든 팝콘은 조금 더 작고 거무스름하게 생겼어요. 옥수수속대와 볶은 옥수수는 차로 우려먹는 용도예요. 옥수수속대 차는 치주질환에 특히 좋다고 알려졌는데, 찾는 분들이 종종 계시죠."
손질 후 생긴 옥수수수염은 금산한약시장에 판매, 옥수수껍질은 옥천 내 염소 농가에서 염소 먹이로 사용할 목적으로 직접 찾아와 자루에 넣어간다. 그야말로 하나부터 열까지 버릴 것 없이 알뜰히 활용하는 셈이다.
알알이 분리한 옥수수알은 쌀밥에 넣어 먹을 용도로 옥천살림협동조합에 납품한다. 서리가 내리고, 더 이상 옥수수 농사를 짓기 어려워지는 겨울이 오면 호떡을 판매하는데, 이때도 저장해둔 옥수수를 넣어 '옥수수호떡'을 내놓곤 한다고.
"옥수수 안 나올 적에 호떡장사를 하는데, 옥수수호떡도 많이 좋아하시더라고요."
이제는 보기 힘든 재래종 옥수수
이철승씨와 윤종순씨는 어릴 적 먹던 옥수수는 지금의 품종과는 사뭇 다른 모습이었음을 이야기한다. 과거 옥수수는 재래종으로, 지금보다는 크기가 훨씬 작았더라고.
"10cm 남짓 되었을까. 크기가 지금보다 한참 작은 옥수수였어요. 요즘 먹는 옥수수는 다 개량된 종자지. 수확한 옥수수에서 씨앗을 받아 다시 심으면 품질이 50% 수준밖에 되지 않아요. 그 씨앗을 받아다 다시 심으면 거기에서 또 품질이 50% 이상 떨어지고요. 재래종은 그런 시행착오 과정을 무수히 거쳐서 정착된 종자인 거죠. 요즘은 매년 개량된 새 씨앗을 받아다가 옥수수를 심는 방식이에요."
윤종순 씨는 재래종 옥수수는 지금과 달리 속대가 더 달고, 옥수수알의 찰기가 매우 강했다고 회상했다.
"어릴 때 이후 성인이 돼 우연히 재래종 옥수수를 받아다가 맛을 본 적이 있어요. 그때 평소 옥수수 삶는 것처럼 쪘더니, 못 먹겠더라고. 찰기가 어찌나 강한지 터질 때까지 푹 쪄야 먹을 수 있을 정도였어요. 또 속대에서 달콤한 맛이 나지. 요즘 옥수수는 속대가 그리 달지 않아요."
두 사람 역시 기후위기와 외래종 해충으로 인한 농사의 어려움을 호소하기도 했다.
"병충해로는 탄저병이 제일 무섭죠. 옥수수한테는 '암'과도 같은 질병이에요. 비가 많이 오면 탄저병이 심하고, 비가 오지 않으면 해충 문제가 심하죠. 나방이나 노린재 종류가 많은데, 최근엔 미국선녀벌레·꽃매미·깍지벌레 등 외래종 해충 때문에 농약도 잘 들지 않아 걱정이에요. 농약을 안 치면 좋겠지만, 말처럼 쉽지 않은 일이죠."
애타는 농부의 마음을 안고, 이 여름의 끝까지 옥수수가 알알이 익어간다.
월간옥이네 통권 86호(2024년 8월호)
글 사진 한수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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