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베이비부머의 집수리>는 오래된 집을 수리하며 느낀 점을 정리한 기록이다. 노후를 위해 집을 수선하는 과정에서 발견한 여러 생각과 시행착오들이, 베이비부머 등 고령자와 그 가족들에게 공감이 되고 도움을 줄 수 있길 바란다.[기자말] |
집수리하면서 큰 작업 하나가 남았다. 그동안 갖고 있던 옛살림과 물건들을 정리하는 것이다. 말이 정리지 웬만하면 거의 폐기하는 수준이었다.
우선 옷가지와 책은 공사를 시작하기 한 달 전부터 정리했지만, 원체 많아서 여전히 시간이 빠듯했다. 옷은 동네 의류 수거함에 10여 차례 갖다 버리고 책은 다시 볼 몇 권만 고르고 책장을 폐기하면서 폐지 줍는 분이 모두 가져갔다.
버리는 데 '결심' 필요했던 물건들
옷과 책 이외의 버릴 세간 살림을 모아보니, 1톤짜리 차량으로 총 3대분이 넘게 나왔다. 폐기물 업자도 놀랄 정도였다. 그는 눈을 크게 뜬 채 "웬만한 이사도 이 정도는 나오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부모님 살림과 우리 살림, 아이들이 결혼하면서 남기고 간 것까지 방과 지하실, 화장실에서 오랫동안 자리를 차지했던 것들이다.
아이들 물건도 상당히 많았다. 옷가지와 책 이외에 아이들이 어릴 적 잘 가지고 놀던 프라모델과 레고 장난감들도 몽땅 버렸다.
특히 두 아이가 취미 삼아 모은 새 운동화와 구두 등 신발 60여 켤레는 아이들도 아쉬워했지만, 결국 박스채 버리거나 처분했다. 추억이 많고 아깝더라도, 보관하기 어렵거나 당장 쓰지 않는 것은 다른 데 보내자는 게 이번 리모델링과 정리의 취지였다.
그럼에도 정리할 것이 또 남았다. 집에서 나름 귀한(?) 대접을 받아오던 물건들로, 어느 정도는 우리 집 정체성을 대변해온 것들이다. 그간 이것들을 버린다고 몇 번이나 시도했지만 그때마다 마치 죄를 짓는 기분 같아 포기했었다.
버리면 다시는 찾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지만, 정작 버릴 기회가 오면 자주 머뭇거리곤 했다. 이번에야말로 결단이 필요했다. 바로 실행에 들어갔다.
가장 먼저 정리한 것은 서예 글씨, 그림, 족자, 병풍 등이다. 집에는 각방과 거실 등 벽면에 이런저런 서예작품과 족자들이 걸려있었다. 95세인 아버지가 수십 년에 걸쳐 수집한 작품들이다. 작품마다 의미를 담고 있다.
나 또한 이런 작품을 감상하는 게 싫지 않았다. 예전에는 집마다 가풍을 나타내는 서예글씨 표구 한두 개쯤 걸어두는 게 유행이었다. 그런데 우리 집은 다른 집보다 유독 많았다.
손때 묻은 작품들을 보고 만지며 고민하다가, 결국 서예글씨와 그림만 따로 모으고 이를 디지털 사진으로 찍어 따로 보관하기로 했다. 아버지는 주저 앉아 표구를 해체하는 나를 발견하고는 실망하는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언젠가 아파트 쓰레기 집하장에 서예글씨가 담긴 족자와 그림들이 빗속에 나뒹구는 장면을 본 적이 있다. 아마 집에서 천덕꾸러기로 전락한 서예작품을, 가족과 후손들이 무심코 폐기했을 것으로 짐작된다.
모아보니 20여 권이나 되는 '벽돌 족보'
문제는 이번에 정리할 대상 하나하나가 아버지의 입장과 심기를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들이란 거다. 모두 나름의 사연이 있고 부모님 입장에선 추억이 담긴 것들이기 때문이다. 아버지에게도 정리할 여유와 시간이 필요했다.
족보도 폐기대상이 됐다. 우리 집 족보는 말 그대로 '가보 중의 가보'라 할 수 있다.
실향민이신 아버지가 수십 년을 신주처럼 보관해 왔다. 아버지는 추석이나 시제를 앞두고 족보를 다시 보곤 하셨다. 족보마저 버린다고 하니 아버지 안색이 돌변했다. '어이없다'는 표정이다. 그걸 보는 내 마음도 무거웠다.
가문과 종중마다 차이가 있지만 한 세대가 지나면 족보를 개정하거나 증보하는데, 아버지는 이 작업에 늘 참여했다. 족보를 아끼는 분이기에 처음 발간한 족보부터 1985년 발행족보까지 모두 가지고 있다.
아버지만큼 우리 집 내력과 족보를 상세히 아는 분도 드물다. 아버지는 '족보를 모신다'고 표현했다. 해박하신 아버지 덕분에 나는 족보를 읽는 방법을 전수받기도 했다.
이런 '벽돌 족보'는 모두 20여 권이나 됐다. 이제 더 이상 보관하는데 어려움이 많다며 족보 중에서 최종 간행본만 보관하고 나머지는 처분하겠다고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조금 더 생각해 보시고 아버지 결정에 따르겠다고 했다.
다음날 아버지는 무거운 심정으로 내게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다. 다만 족보는 보자기에 잘 싸서 버리라고 했다. 일반책과 달리 취급해 마지막까지 족보에 대한 예를 갖추라는 뜻이다.
유품인 장롱마저 처분... 아버지 표정은 일그러졌지만
안방에 있던 '자개장롱'도 이번에 처분했다. 장롱은 어머니가 1980년대 초 이곳으로 이사 온 기념으로 거금을 들여 장만했던 것이다. 지금도 생전의 어머니가 틈만 나면 장롱을 닦던 모습이 손쉽게 떠오른다. 어머니 유품인 자개장롱도 버리겠다고 하니, 그걸 들은 아버지 얼굴은 또 일그러졌다.
짐을 정리하면서 가장 고민했던 것은, 부모님이 아끼던 물건들을 처분할 때였다. 그러나 자식인 내 마음대로 버리기보다는, 일단 살아계실 때 뜻을 물어서 정리하는 것이 순리라 생각했다. 아버지는 용케도 우리가 말씀드린 거의 모든 것을 수용하셨다.
이참에 우리 부부의 세간살이들도 많이 정리했다. 20~30년 된 낡은 냉장고와 가구들은 리모델링하면서 모두 폐기했다. 대부분 결혼 무렵 장만한 것들로 손때 묻고 추억이 담겼지만, 새 것으로 바꾸기로 했다.
그럼에도 아직도 버려야 할 것들이 적지 않다. 앞으로 계속해 정리할 계획이다. 특히 오래된 물건은, 나는 보관하고 싶어도 어차피 후손들이 그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니 지금처럼 잘 관리할 리 만무하다. 집수리만큼이나 세심한 짐 정리가 필요한 이유이다.
리모델링 이후 공간은 밝아지고 넓어졌지만, 옛날 흔적들이 사라지니 솔직히 허전하고 아쉬운 게 사실이다. 하지만 앞으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면서 재밌게 살기에도 시간은 부족하지 않은가.
끝으로, 새 집 입주를 며칠 앞두고 안방을 우리 부부가 사용할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실 것을 아버지께 어렵게 말씀드렸다.
내 얘길 듣는 아버지 표정에는 섭섭함과 서운함이 역력히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안방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후 아버지가 30년 이상 혼자 쓰셨고, 그간 우리는 작은 방을 사용했었다.
집수리를 계기로 어렵게 꺼낸, 안방을 사용하는 문제. 이 또한 아버지가 마음 먹고 통 크게 승낙하셨다. 그렇게 리모델링 한 뒤 내부 짐을 정리하면서 우리가 살던 집 내부 공간은 훨씬 넓어지고 환해졌다(관련 기사:
집 고칠 때 화장실에 '이걸' 설치하면 좋습니다 https://omn.kr/29xx3 ).
화장실에 안전바가 설치되고 천장 높이가 조율되면서, 동선도 전보다 더욱 안전하고 쾌적하게 바뀌었다.
지금 생각하면 이러한 변화에는 아버지의 고뇌와 배려가 크게 작용했던 것 같다. 한동안은 아버지의 허전한 심정을 다독이는 데 가능한 시간과 정성을 다하려고 한다. 역지사지의 교훈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브런치에도 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