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은 13세에 고성 이씨 이난희(李蘭俙)와 혼인하였다 원나라(몽고)의 지배를 받던 시절 공녀로 뽑혀가는 것을 피하고자 택했던 조혼제의 유습이었다. 남달리 총명했던 소년 유림은 17세 때에 경술국치를 당했다. 나라가 망한 것이다.
13세에 이난희를 부인으로 맞이하고 대지주의 대를 이을 도령으로서 무엇하나 부족함이 없었을 유림 소년도 그 시대의 암울한 먹구름을 피부로 느꼈을 듯하다. 이러한 추론은 그가 17세 때인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에 관한 조칙·조유 및 합병조약문이 공포되자, 손가락을 끊어 '충군애국(忠君愛國)'이란 넉자를 혈서로 쓰고 국권회복에 몸 바칠 것을 다 잡았다는 데에서 비롯한다. (주석 1)
17세 갓 청년이 손가락을 잘라 충군애국의 혈서를 쓸 만큼 그는 깨어 있었다. 그의 정신적인 스승은 고향의 한학자인 동산(東山) 유인식(柳寅植)으로 그의 가르침을 받았다.
유인식은 유림의 4종질이었으나, 나이와 학문에서 유인식은 그의 큰 스승이었다. 동산은 안동지역의 근대화를 이끌어낸 인물이면서, 성장 과정에서 단주에게 절대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다. 그 아래에서, 또 유인식이 중심이 된 협동학교에서 그는 서양문화를 접하는 첫 걸음을 맞았다.
1907년 시작된 이 학교가 외국지리·화학·생물 등 서양문화를 교과과정으로 담아냈기 때문이다. (주석 2)
1910년 8월 29일 한일합병조약으로 대한제국은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하였다. 한 해 전인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고, 12월 20일 이재명이 이완용을 습격했으나 미수에 그쳤다.
합병 소식이 알려지면서 9월 초 박병하가 단식하다가 순국하고, 매천 황현이 자결한 데 이어 의병장 이근주의 자결, 예안 의병장을 지낸 향산 이만도의 순국, 유림의 삼종질인 전 사간원 지평 이중언의 단식 순국 등이 잇따랐다. 그의 혈서는 이같은 분위기에서 향한 의협심의 발로였다.
한창 감수성이 예민한 17세의 나이로 혈서를 쓴 이래 3.1운동 직후인 19년 봄 고향을 떠나 멀리 만주로 망명하기까지 유림은 인근 안동·대구지역에서 청년들을 규합, 일종의 비밀결사들을 통해 국권회복에의 의지를 나름대로 불태웠다.
안동에서는 정진택을 비롯한 청년들과 더불어 부흥회를 결성하였고, 대구에서는 김용하 등과 더불어 자강회의 조직을 확대시켜 나갔다. 이런 과정에서 한때 유림은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시달림을 당하기도 했다. 그가 22세 되던 해인 1915년의 일이다.(피체 당시 그가 어느 정도의 기간 동안 갇혀 있었는 지는 분명치 않다.) (주석 3)
젊은 시절 유림의 이같은 활동은 평생 동안 일제와 싸우는 항일전사의 길을 걷게 만들었다. "될성부른 나무는 묘목 때부터 알아본다"는 말이 있거니와, 그는 소년기부터 국권회복에 뜻을 두었고, 한눈 팔지 않고 평생 이 길을 걸었다.
오랜 세월이 지난 후 한 문인은 <추모시>에서 다음과 같이 썼다. 앞 부분이다.
혁명아는 하늘이 내는
섭리 이거니
십칠 세 혈서 넉자
충군애국(忠君愛國)
약관에 형극의 길 면류관
으로 여기고
중원의 넓은 땅을 한 조각
구름되어
간곳 마다 자유 평등 평화
외로움은 조국과 민족
눈물로 달래고
황하진서 만리길
한발 한발 중경가는 길
한민족 한정부 한이념
구호로 삼아…… (주석 4)
주석
1> 김재명, 앞의 책,
2> 앞의 책.
3> 앞의 책.
4> 황빈, <추도시>, <단주 유림 자료집(1)>, 247쪽.
덧붙이는 글 | [김삼웅의 인물열전 -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 단주 유림평전]은 매일 여러분을 찾아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