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일보 7월 13일자 사설
나는 조선일보 사설자가 이름 붙인 대로 선생의 이런 ‘치열한 자기성찰’에 경의를 표합니다. 반성하지 않고, 성찰하지 않는 너무나 많은 사람들 속에서 치열한 자기성찰은 언제나 빛나는 것이지요. 설사 그 성찰이 섣부르고 성숙하지 못한 것이라고 할지라도 성찰과 반성 그 자체는 언제나 아름다운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나는 선생의 성찰과 그 성찰을 표백하는 용기, 그리고 그 성찰을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려는 뜻 자체는 높이 평가합니다.
문부식 선생, 그런데 나는 선생의 성찰 행위 그 자체에는 이처럼 경의를 표하지만 불행히도 그 성찰의 내용에도 또 그 형식에도 동의할 수는 없습니다. 여기서 입장이 갈리는군요.
나도 개인적인 이야기로부터 시작할까요? 선생이 부산 미문화원에 불을 질러 ‘반미의 봉화’를 높이 올렸던 1982년, 나는 전주교도소에서 2년째 징역살이를 하고 있었습니다. ‘부미방’만큼은 충격적이지는 못했겠지만 아시겠지요? ‘무림사건’이라고. 그 사건의 주동자가 되어 ‘이근안 경감’의 손을 거쳐 국가보안법 사범이 되어 있었지요.
그때 ‘부미방’ 소식을 들었습니다. ‘반미자주화운동의 선구’라구요? 내가 보기보다 심약한 편이어서이기도 하지만, 나는 솔직히 말해 그 소식을 듣는 순간 바로 지금 선생이 말하고 있는 ‘폭력’을 먼저 느꼈습니다. 그것도 ‘성숙하지 못한’ 폭력을 말입니다. 물론 ‘광기’까지는 아니었지만요. 다만 나는 그때 선생과 동갑내기로서 선생 그룹의 ‘내면의 불가피성’을 이해했기 때문에 하나의 상징적 사건으로 ‘수리’하기로 했을 뿐 그 사건을 그때부터 지금까지 ‘반미자주화운동의 선구’로 생각한 적은 없었습니다.
교도소 안에서 나와 같은 ‘학생 사범’들의 도를 넘는 ‘투쟁’에도 늘 못마땅했던 나로서는 이미 ‘우리 안의 폭력’에 대해서는 일정한 거부감이 있었던 것 같았군요. 물론 나는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한편으로는 내가 진정한 ‘혁명적 인간’이 못되는 것을 자책하기도 하고 부끄러워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시위 중에도 전경의 곤봉에 맞으면 맞았지 돌 한번 제대로 겨누어 던지지 못했던 나는 이른바 ‘우리 안의 폭력’에 대한 거부감에 관한 한 선생보다는 20년은 더 선배인 것 같군요.
문부식 선생, 이렇게 보면 선생과 나는 이제 같은 생각을 가지게 된 것 같군요. 하지만 선생과 나는 많이 다릅니다. 나는 선생이 저지른 ‘부미방’에 대해서 선생처럼 우리 안의 ‘폭력’을 읽어냈고 그것 때문에 그 사건을 적극적으로 평가하는 데 매우 주저했던 것이 사실입니다(그런데 나는 동의대 사건에 관해서는 선생과 조금 다른 견해를 가지고 있습니다. 선생이 ‘목적범’이라면 동의대 사건 관계자들은 일종의 우발적 ‘과실범’아니었던가요. 이 문제는 달리 이야기할 기회가 있겠지요).
하지만, 나는 인간이란 원래 불완전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합니다. 그리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인간은 늘 행동 앞에서 주저할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불완전성과 결락이, 그 존재의 틈새가 인간을 행동으로 몰고 갑니다. 상황이 너무나 압도적으로 자신을 짓누를 때는, 그 틈새만이 인간을 움직이게 합니다. 그 틈새와 결락과 불완전성에 대한 충분한 인식에 도달하는 순간, 그는 성숙할 수는 있어도 그 상황에 대해서는 패배자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은 40대의 자기 자신으로 20대의 자기 자신을 학대하고 있습니다. 2000년대의 인간으로서 80년대의 인간을 몰아붙이고 있습니다. 불행히도 20대의 자신과 80년대의 삶들을 못 견디게 했던 그 거대한 폭력에 대해서는 마치 남의 일처럼 멀찍이 관조하면서 말입니다.
민주화운동 보상이라는 것, 개인적으로는 명예로울 것도 자랑스러울 것도 없습니다. 오히려 지금 선생이 그런 것처럼 부끄럽고 때로는 욕된 것이지요. 다만 그것은 역사의 몫일 뿐입니다. 망각이 심한 역사에서 상대적으로 조금 더 옳았던 일들과 그렇지 못한 일들을 변별해 남기는 일에 불과합니다.
선생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는, 적어도 80년대를 그래도 엄청난 폭력과 맞서 싸워 온 모든 사람들은 나뿐만 아니라 대부분 그 시절 자기 안에 들어있던 폭력과 심지어는 광기와 때로는 어설픔에 대해 다들 나름의 성찰과 반성을 지불했거나 지불하고 있습니다. 다만 드러내 중뿔나게 말하지 않을 뿐이지요.
지금 만일 한국사회가 조금이라도 성숙했다면 그것은 민주화 ‘투쟁’의 결과일 뿐만 아니라 이미 그에 대한 성숙한 성찰의 결과이기도 할 것입니다. 아무래도 선생은 조금 늦었군요. 혹시 선생 안에 특별히 많이 내장되어 있던 폭력과 광기에 새삼 눈이 뜨이면서 세상사람 모두가 선생과 같은 수준인 것처럼 보이는 일종의 착시는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엄살떨지 마세요. 다들 선생만큼은 아프고 힘들었습니다.
더 많은 말을 나누기에는 이 지면은 너무 짧습니다. 다른 지면, 다른 자리가 필요할 듯합니다. 하지만 꼭 한 마디 더 하고 싶은 게 있습니다. 아니 하나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선생과 김기철 기자 사이에 이루어진 이 7월 12일자 조선일보 인터뷰는 물론 조선일보 측의 요청에 의한 것이겠지요?
그런데 어떻게 해서 조선일보의 인터뷰 요청에 응하게 되었는지 알고 싶군요. 폭력에는 국가의 폭력과 나의 폭력만 있는 것이 아니겠지요. 폭력을 사주하는 말과 글의 폭력도 폭력이라면, 폭력을 문제 삼는 인터뷰를 수 십 년간 파시즘적 폭력의 사주와 고무, 최소한 묵인에 앞장서온 조선일보의 기자와 마주앉아 진행하는 동안 좀 불편하지 않았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