못 왼다고 때리고 웃는다고 때리고, 결국...

[제보취재-군대 내 사고, 이름없는 주검 ④] 97년 21사단 정찰대 위병소

등록 2005.07.13 08:45수정 2005.07.13 14: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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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전방 GP에서 일어난 충격적인 총기 사고와 유사한 사건은 과거부터 계속돼 왔습니다. 하지만 과거 독재 시절, 언론 등에 공개되지 못하고 사인조차 제대로 규명되지 못한 채 유가족들의 가슴 속에만 묻어야 했던 사건이 많습니다. <오마이뉴스>는 그간 본사에 접수된 군 관련 사건 제보 중 사실로 확인된 건에 대해 기사를 내보냅니다. 이번 기사에서 다루는 총기사고는 최근 육군본부측에서 최재천 열린우리당 의원실로 확인해준 사건입니다... <편집자주>
8개월 동안 온갖 구타와 언어 폭력에 시달린 김아무개 일병은 결국 총기의 방아쇠를 당겼다. 가슴에 총을 맞은 최아무개 상병은 몸부림쳤다. 그러자 김 일병은 다시 두 발을 더 발사했다.

군대 내 폭력이 심했다는 군사 정권 시절의 이야기가 아니다. 지난 1997년 9월 6일 새벽 5시 50분, 강원도 양구군에 위치한 육군 제21사단 정찰대의 한 위병소에서 일어난 사고다. 끝도, 탈출구도 보이지 않는 군 폭력이 불러온 사고였다.

"그것도 못 외우냐, 갈아 마시고 싶다"

"6일 오전 5시50분께 강원도 양구군 모부대 위병소에서 보초를 서던 김○○(22) 일병이 함께 있던 최○○(22) 상병을 총으로 쏴 살해했다. 육군은 김 일병이 위병소에서 근무도중 암기사항을 제대로 외우지 못해 고참인 최 상병으로부터 구타를 당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최 상병의 가슴에 K1소총 3발을 발사했다고 밝혔다.
- <문화일보> 1997년 9월 6일


당시의 사고를 유일하게 보도했던 신문 기사 전문이다. 딱 원고지 한 장 분량이 전하는 사고의 원인은 암기를 제대로 못하는 김 일병에게 가해진 최 상병의 구타다. 암기를 못한다고 구타한 선임병이나, 한 번의 구타로 총기를 발사한 후임병의 행위도 선뜻 이해하기 어렵다. 사회에 알려지지 않은 사건의 내막은 육군 조사기록문에 상세히 기술돼 있다.

김 일병이 사고가 일어난 부대에 배치를 받은 건 1997년 1월. 그 때 김 일병의 사수는 사망한 최 상병이었다. 최 상병의 폭력은 "더 이상 때리면 죽여버리겠다"는 김 일병의 협박에도 계속 이어졌다.

"그것도 아직 못 외웠냐? 쓰레기 같은 놈! 정찰대에 있으나마나다. 갈아 마시고 싶다!"

사고가 일어난 9월 6일 새벽, 함께 위병소 근무를 서던 최 상병이 김 일병에게 뱉은 욕설이다. 이어 20여분 동안 주먹과 소총 개머리판 등으로 무차별 폭력을 가했다. 폭력을 마친 최 상병은 잠들었다. 그 때 김 일병은 "죽여버리겠다"는 평소의 생각을 실행에 옮겼다.

밥 지저분하게 탄다고 때리고, 웃고 다닌다고 때리고

이 뿐만이 아니다. 사고가 일어난 부대에서 폭력은 일상처럼 만연돼 있었다. 군 조사 기록에 나타난 김 일병에게 폭력을 가한 선임병은 여럿이었고 그 이유도 다양하다.

박○○ 3소대 1반 부반장 - 1997년 4월 김 일병이 모스부호를 잘 모른다는 이유로 연습장을 말아 머리 구타. 7월, 밥을 지저분하게 탄다는 이유로 식판으로 머리 가격.

이○○ 1소대 2반 반장 - 2월, 김 일병이 근무 요령을 교육시켜도 잘 못하자 손으로 머리 구타. 군화로 정강이 가격. 3월, 근무시간에 잘 일어나지 못한다고 군 화이바로 머리 구타. 8월, 군기가 빠졌다는 이유로 김 일병 등 세 후임병들에게 머리를 땅에 박게 하고 직경 4cm 나무 몽둥이로 엉덩이 구타.

최○○ 3소대 2반 부반장 - 6월, 김 일병이 잠이 덜 깬 상태에서 불침번에 나왔다고 나무로 만든 상황판으로 머리 때려 부상 입힘. 8월, 김 일병 등 후임병들이 기상을 빨리 하지 못한다며 주먹과 운동화발로 가슴 폭행.

이○○ 정보작전병 - 3월, 김 일병이 웃고 다닌다는 이유로 보일러실로 불러 전투화발로 복부 구타.


이처럼 김 일병이 총기를 난사한 이유는 한번의 구타가 아니었다. 빠져나갈 수 없는 고질적인 폭력이 김 일병의 극단적 행위를 부른 것이다. 김 일병은 이 사건으로 1심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고, 후에 항소심에서 징역 15년이 확정됐다. 폭력을 저지른 위의 선임병들도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았다.

당연하다고 여기는 군대 내 폭력문화가 어떻게 사람의 영혼을 파괴하고 목숨을 앗아가는 지 21사단 정찰대 사건은 잘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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낸시랭은 고양이를, 저는 개를 업고 다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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