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숫물 소리는 마음속에다 고요를 떨어트리고

비오는 날 찾은 공주 태화산 자락의 작은 암자 백련암

등록 2007.07.11 20:57수정 2007.07.13 09: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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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암 가는 길. ⓒ 안병기

백련암을 향해서 천천히 발길을 옮긴다. 봉우리와 봉우리 사이로 보이는 저 봉우리가 소라 껍데기처럼 틀어 만 부처님의 머리카락을 닮았다 해서 나발봉이라 부른다는 그 봉우리인가.

문득 왼쪽 언덕을 올려다보니 수십 기의 부도가 있는 부도밭이 보인다. 태화산 자락엔 삼나무밭에 빼곡히 들어찬 삼대처럼 영은암, 내원암, 은적암, 백련암 등 암자가 수두룩하다. 저 부도밭은 어느 암자에서 속하는 부도밭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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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암 가는 길 좌측 언덕에 있는 부도밭에 있는 3기의 옛 부도중 하나. ⓒ 안병기

왼쪽으로 난 길을 통해 부도밭으로 올라간다. 부도밭에는 옛 부도 3기와 줄잡아 스무 개가 넘는 새 부도가 섞여 있다. 근래 우리나라에 이렇게 고승이 많이 나왔더란 말인가. 옛 부도의 하대석에 새겨져 있는 복련이 비를 맞아 싱싱하게 살아난다. 때마침 앞 산봉우리 흰 구름이 일어나는 풍경이 겹쳐져 이 부도에 신비감을 더한다.

만일 죽음 뒤에 다른 세상이 있다면 흰 구름 한 조각 있고 없음의 차이가 극락과 지옥을 가르는 기준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러고 보면 오늘 나는 흰 구름이 오락가락하는 극락에 들어와 있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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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양옆으로 원추천인국(루드베키아)이 피어 있다. ⓒ 안병기

부도밭을 내려와서 다시 허위허위 산길을 걸어간다. 아무래도 오늘 내리는 비는 나와 끝까지 동무하려나 보다. 내가 종종걸음을 치면 비도 따라서 종종걸음을 치고 내가 쉬엄쉬엄 걸어가면 비도 따라서 팔자걸음으로 따라온다.

조금 더 가자 계곡이 나온다. 굽어보니 제법 깊은 소가 있고 그 아래로 폭포가 있다. 소에 모였던 물들이 한꺼번에 폭포로 굽이쳐 떨어지면서 휘몰이 가락을 연주한다. 음표가 하얗게 쏟아져 내린다.

노래가 도대체 무엇인가. 마음속에 오랫동안 고여 있다가 밖으로 쏟아져 나와 굽이치는 것이 노래 아닌가. 그러므로 지금 자신의 마음속에 혹은 삶 속에 노래가 없다고 자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먼저 마음속에다 사물이 만드는 온갖 감흥이 머물다 갈 수 있는 깊은 소(沼)를 만들어야 하리라.

꼭대기를 향해 달려가느라 그런지 길의 고도가 사뭇 가팔라진다. 길 양 옆으로는 비 맞은 루드베키아가 함초롬히 피어있다. 원추천인국, 양노랭이라 불리는 북미 원산의 국화과에 속하는 꽃이다. 한 번 꽃이 피면 석달 이상 가는 끈질긴 면모를 지닌 식물이다. 객지밥 먹는데 이골이 난 녀석이다.

사물의 허물을 덮어주는 고요와 적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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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암.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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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암 요사채. ⓒ 안병기

고갯마루에 올라서는 순간 아주 그친 줄만 알았던 비가 다시 세차게 몰아친다. 오늘 내리는 비는 아무래도 무대가 무엇인지 피날레를 장식한다는 게 무엇인지를 아는 비 같다. 아무도 커튼콜을 청하지도 않았는데 슬그머니 산 뒤에서 다시 걸어 나오더니 길게 노래 한 곡조를 뽑아 제친다. 오늘도 걷는다마는 정처 없는 이 발길….

비가 와도 나그네는 결코 쉬지 않는다. 소나기가 부르는 속절없는 노랫가락에 등산화 속이 젖고 우비 속에 감춰진 옷까지 흠뻑 젖는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고 어느 시인이 그랬던가.

이제 백련암에 거의 다 온 것 같다. 팔작지붕을 이고 있는 백련암이 삐죽이 고개를 내민다. 암자 이곳저곳을 둘러본다. 아무리 주변을 둘러보아도 백련암에는 백련이 보이지 않는다. 불전 옆에는 다섯 개의 함지박이 놓여있고 그 속에서 왜개연꽃 몇 송이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외고 있을 뿐이다.

아마도 이런 외진 암자에서는 설령 왜개연꽃이 백련 행세를 하더라도 용서가 되리라. 아니 이곳에선 개망초꽃이 백련 노릇을 한다 치더라도 결코 흉이 되지 않을 것이다. 암자를 둘러싼 고요와 적막이 주변의 모든 사물의 허물을 덮어주고 흠을 감싸 안기 때문이다.

불전을 들여다보니 부처님 옆에 김구 선생을 모신 사진틀이 있다. 마곡사에서 원종이라는 법명을 받은 후 사미승으로 3년을 은거하시던 선생께서 이곳 백련암에서도 잠시 은거하셨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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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신각. ⓒ 안병기

빗방울이 연주하는 음악은 점점 포르테시모가 되어간다. 요사채 마루에 걸터앉아 내리는 빗방울을 바라본다. 산을 오를 때는 빗방울이 마음을 적시더니 이젠 낙숫물 소리가 마음을 적시누나. 요사채 안에서 보살이 나오더니 "어디서 오셨느냐"라고 말을 건다. "김구 선생이 여기 계셨던 것이 맞느냐"라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대답한다. 그러면서 요사채는 개조를 거듭해서 그때와는 다른 구조라고 귀띔한다.

산 아래 마곡사에선 오늘이 마침 음력 18일 지장제일이라고 제법 떠들썩하게 법회가 열리던데 이곳은 어찌 이리 조용하냐고 물었더니 오늘이 지장제일이냐고 오히려 되묻는다. 이 보살은 게으른 것인가 아니면 태평한 것인가. 그러나 그 경계를 어찌 알겠는가. 만일 그 경계를 아는 사람이 있다면 평생 그의 상좌가 되어 모셔도 후회 없으리.

비가 그칠 기미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도대체 언제쯤이면 이 비가 그칠는지 산신에게 물어봐야겠다. 산신각으로 다가가서 쭈뼛쭈뼛 안을 들여다본다. 산신의 얼굴에 김구 선생의 얼굴이 겹친다. 이 나라 산천을 사랑하는 넋이 산신이니 선생이 산신이 되셨다 한들 하등 이상할 리 없을 것이다.

과정의 미학이 돋보이는 산사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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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련암 마애불. ⓒ 안병기

퍼붓는 비를 무릅쓰고 저 마애불이 있는 곳까지 다녀오기로 한다. 100여m나 더 올라갔을까. 거기 바위에 새겨진 마애불이 있다. 마치 외계인을 연상시키는 모습이다. 서툰 손놀림으로 보아 아마도 근래에 조성한 것인가 보다.

여기까지 와서 산을 오르지 않은 채 발길을 돌린다는 건 마음이 허락지 않는다. 마애불을 떠나서 활인봉(423m)을 향하여 산을 오르기 시작한다. 고개에 올라서자마자 이전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세차게 비가 쏟아진다. 할 수 없이 등산을 포기한 채 다시 백련암으로 내려온다.

요사채 마루에 걸터앉은 내게 백련암 보살이 따뜻한 커피 한잔을 끓여다 준다. 커피를 마시며 처마 끝에서 떨어지는 낙숫물 소리를 듣는다. 소리는 본디 고요를 깨트리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는 듣는 사람의 마음을 오히려 고요 속으로 한없이 침잠하게 한다. 마음이 그 어느 때보다 고요하고 평화롭다. 이 몇 마장의 평화를 얻으려고 비를 맞고 허덕거리면서 여기까지 온 것이다.

산사는 우리에게 과정의 아름다움을 느끼게 해준다. 거기에 이르는 과정 자체만으로도 완벽한 여행이다. 거기 가서 문화재나 혹은 다른 무엇인가를 바라보는 것은 덤으로 얻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오늘은 마음속에서 맘껏 고요를 꽃 피웠으니 발길이 터럭보다 가벼우리라. 그렇구나. 백련이란 마음속 고요를 말하는 것이었구나. 자리를 털고 일어나 보살에게 합장하고 나서 천천히 백련암을 떠난다.

덧붙이는 글 | 지난 7월 2일에 다녀왔습니다.

덧붙이는 글 지난 7월 2일에 다녀왔습니다.
#공주 #태화산 #백련암 #마애불 #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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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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