빗줄기는 은어 떼처럼 산마루로 밀려오건만

빗속에 묻힌 공주 태화산 자락 암자, 대원암과 은적암

등록 2007.07.13 15:27수정 2007.07.14 10: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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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내리는 절 마당. ⓒ 안병기


난 이래서 큰 절보다 암자가 좋다

백련암을 내려오는 길에 '오백나한기도도량 대원암'이란 표지판을 만난다. 오른쪽 숲길로 접어들어 조금 가니 마치 한옥을 개조한 듯한 소박한 암자가 길손을 기다리고 있다.

사천왕 노릇이라도 대신하는 것일까? 절 마당으로 들어서는 입구엔 커다란 느티나무가 버티고 섰다. 느티나무 옆구리엔 제단이 놓여 있고 그 앞에는 유리상자 속에선 촛불이 깜박거린다.

잠깐 요사채 처마 아래 비를 피해 있으면서 쏟아지는 비에 작은 도랑이 되어버린 마당을 바라본다. 앞산 자락에서 구름이 오락가락하고 있다. 우중충하긴 하지만 신선이 놀다 갈만한 탈속한 풍경임은 분명하다.

마당엔 아주 작아 앙증맞기까지 한 삼층석탑이 서 있다. 역시 작은 것은 아름답다. 공간을 장악하려 들지 않는 너그러움이 있고 군림하려 들지 않는 겸손함이 있다. 큰 절에는 없는 암자만이 가진 장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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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백나한전. 지장제일에 맞춰 대원암에 올라온 신도들이 기도드리고 있다. ⓒ 안병기

지장제일 법회중인가? 오백나한전 안을 슬그머니 들여다 보니 열기가 후끈 달아 있다. 드문드문 바라 부딪치는 소리도 들리고 사이사이 스님의 범패 소리도 들린다. 가만히 지켜보노라니 문득 신라 진평왕 때 융천사가 지었다는 향가 '풍요'가 떠오른다. 풍요란 넌지시 깨우쳐 경계하는 노래이다.

來如來如來如 (내여래여래여) 來如哀反多羅(내여애반다라) 哀反多矣走良(애반다의주간) 功德修叱如良來如(공덕수질여간래여)

오다 오다 오다 서럽더라 서럽다 우리네여 공덕 닦으러 오다


세상사 부질없으니 공덕 닦는 일밖에 더 있겠느냐. 난 이따금 향가인 '풍요'를 읊조리곤 한다. 내게 '풍요'는 결코 유통기한이 지나버린 고대 시가가 아니라 지금 읊조려도 나무랄 데 없는 시이다. 어쩌면 신라인의 가슴 속에 담겼던 생에 대한 근원적 서러움이 그렇게 아름다운 문화재를 남긴 힘이 됐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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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원암 부도. ⓒ 안병기

작은 암자라도 구색을 갖추려고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오백나한전 뒤 오른쪽엔 관음전이 모셔져 있고 그 옆엔 성냥갑만한 산신각도 있다. 산신각 왼쪽엔 올망졸망한 항아리가 모여 있는 장독대가 있다.

절의 장독대에는 일반 살림집보다 크기가 다양한 항아리들이 많다. 인연 따라 잠시 머물다 가는 대중의 몫까지 장만해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대원암을 내려오다가 길 왼쪽에 오래된 부도를 본다. 석종형부도 1기와 주인공의 이름이 새겨진 제액 부분은 사라진 채 복련이 새겨져 있는 하대석만 남은 부도와 비가 외로워 보인다. 죽음도 한군데 모여 있어야 외로움을 덜 타는 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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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적암 가는 길. ⓒ 안병기

처음 출발했던 삼거리로 돌아왔다. 오른쪽 길로 가면 아까 다녀왔던 백련암과 대원암에 닿고 왼쪽 길로 접어들면 은적암을 향해 가는 길이다. 길 양편으로 20~30년 가량은 됐을 법한 소나무들이 가지런히 서 있다. 이런 솔숲에 있으니 고요도 숨어 있다는 은적암이란 이름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란 예감이 든다.

내게 '은적'이란 절 이름은 그리운 이름이다. 내가 생애의 가장 소중한 한 때를 보냈던 군산에도 은적사란 고풍스런 절이 있어 마음이 심란할 적에 그곳에 들르곤 했다. 80년대 중반엔 시를 쓰시는 대우 스님이 주지로 계셨는데 그분은 시보다 말씀이 더 시에 가까웠던 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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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적암 산신각.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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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적암 장독대. ⓒ 안병기

가파른 고개를 올라서니 은적암이 나타난다. 긴 토담을 낀 법당으로 곧장 들어갈까 하다가 왼쪽 언덕에 있는 산신각을 향해 발길을 옮긴다. 맞배지붕을 한 건물이 마치 아이들이 소꿉장난하며 노는 '주주의 이층집' 처럼 아주 작다. 산신각은 비가 들이닥칠까봐 그러는지 문을 꼭꼭 닫아 두고 있다.

등을 돌려 아래를 내려다본다. 장독대도 널찍하고 항아리 개수도 제법 많다. 아까 다녀왔던 두 암자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규모가 큰 절집이다. 은적암 법당의 지붕이 한눈에 들어온다. 숲이 절집을 빙 둘러싸고 있고 그 뒤를 고요가 한 겹 더 둘러싼 아늑한 절집이다.

절,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세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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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적암 불전. ⓒ 안병기

장독대 옆으로 난 계단을 통해 법당으로 내려간다. 전등도 켜지 않은 채 촛불 몇 자루가 밝히고 있는 법당 안은 조용하기 짝이 없다. 가히 소리의 무덤이라 할 만하다. 마당을 바라보니 잔디 외엔 아무것도 심지 않은 텅 빈 공간이다. 마당은 법당의 외로움에 상관하려 들지 않고 법당은 마당의 쓸쓸함에 끼어들지 않는다.

고요란 이렇게 타 존재에 상관하지 않고 자기 영역만을 지킬 때 발생하는 현상이다. 잔디 위로 빗방울이 쏟아지고 있다. 마당이라는 존재에 가 닿으려고 안간힘을 쓰는 빗방울. 마당이라는 존재와 빗방울이라는 존재가 부딪치는 순간마다 고요는 산산조각나고 만다.

천천히 산을 내려간다. 비만 내리지 않는다면 쉬엄쉬엄 걸어가며 몽상에 잠기고 싶을 만큼 호젓한 길이다. 사실 내 여행의 목적에는 마음 안에도 이런 산길처럼 아늑한 길을 내는 것도 들어 있다. 결코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은 희망이다. 그 희망은 길 위에 있을 적엔 이루어지는 듯이 보이지만 일상으로 돌아가면 곧장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만다.

저만치 마곡사가 보인다. 아흐, 저 정다운 세속. 떠나고 싶지 않은, 오래도록 머물고 싶은….

덧붙이는 글 | 지난 7월 2일에 다녀왔습니다.

덧붙이는 글 지난 7월 2일에 다녀왔습니다.
#은적암 #대원암 #오백나한전 #태화산 #공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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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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