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사람의 따뜻함이 마을을 바꾸다

[달내마을 111] 더불어 사는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준 마을 어른

등록 2007.07.17 11:57수정 2007.07.17 14: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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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식사하는데 예초기 돌아가는 소리가 들려왔다. 예초기 소리야 요즘 달내마을에서 늘상 듣는 소리라 신기할 게 없었으나 들려오는 위치가 조금 뜻밖이었다. 바로 우리 집 뽕나무 아래쯤에서 들려왔기에.

논밭이 죽 이어진 마을 쪽이 아니고 뽕나무 아래라면? 궁금증이 일었으나 그것 때문에 밥 먹기를 중단하고 나가기엔 조금 뭣하여 식사를 다 끝냈다. 그런데 예초기 소리는 계속 들려왔다. 그것도 점점 우리 집 쪽으로 방향을 잡으면서.

식사 후 마시는 커피도 중요했지만 궁금증은 커피를 넘어선지라 나가보았다. 그런데…. 산음어른께서 길가 풀들을 치고 있는 게 아닌가. 여름에 한 번씩 마을 사람들이 다 모여 길가 풀을 제거하는 작업을 할 때가 있어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분들은 보이지 않고 혼자였다.

"어쩐 일로 혼자서 이렇게 하셔요?" 했더니, "아 오늘 그냥 시간이 나서…" 얼버무리는 말에 다시 한 번 더 여쭈었더니 언젠가 시간 나면 한 번 해야지 했는데 그동안 어르신 집 일이 밀려서 못하다가 오늘 마침 시간이 나 내친김에 예초기를 들었다는 거였다.

"그래도 비가 내리는데 …."
"억수 같은 비도 아니고 고작 이슬빈데…. 이 비 정도면 땀 안 흘려도 되고, 일하기 딱 좋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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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 베기 전의 길 모습. 길 오른쪽처럼 풀이 늘어져 통행에 방해가 된다. 그러나 이 길은 어르신이 예초기로 자르기 전의 길이 아니라, 마을로 들어오는 길에 아직 풀을 자르지 않은 곳을 찍은 모습이다 ⓒ 정판수

핑계였다. 햇살이 내리쬐지 않으니까 땀을 흘리지 않아도 된다는 핑계. 얼핏 들으면 비가 오기에 땀을 덜 흘린다는 말이 이치에 맞을 것 같으나 비옷을 입으면 공기가 통하지 않기에 땀 흘리기는 마찬가지니 분명 핑계였다. 그러나 아름다운 핑계였다.

그래도 다른 분들과 함께 하시지 않고 혼자 하는 게 궁금하여 또다시, "어르신들과 함께 하시지 않고 왜 혼자서 하셔요?" 하니, 사실은 풀을 최소한 세 번은 쳐줘야 제대로 사람 다니는 길이 되는데도 다들 바빠 그동안 한 번씩밖에 하지 않았는데 오늘 길을 보니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나섰다는 거였다.

어르신 하는 걸 한창 젊은 사람(51세의 아내 호칭이 '새댁'이니 나도 그런 점에선 달내마을에선 젊은이다)이 그냥 지켜볼 수 없어 뭔가 도와줄 게 없나 하여 보니 예초기로 잘라낸 풀이 마구 흩어져 있었다.

얼른 집으로 가 갈쿠리(갈퀴)를 갖고 왔다. 어르신은 풀을 치고 나는 긁어 언덕 아래로 내던지고. 이렇게 제법 분업이 돼 일하는데 혼자 사시는 영산댁 할머니가 떡을 들고 오셨다. 우리 두 사람이 일하는 걸 보고 너무 보기 좋아 갖고 왔다고 하셨다.

어르신과 할머니가 가신 뒤 대빗자루로 마무리를 하는데, 마침 이장님이 탄 차가 지나가다 세우더니 눈을 크게 뜨며, "정 선생이 이걸 다 했어요?" 하기에 얼른, "아닙니다. 산음어른께서 예초기로 다 해놓고 가신 뒤 저는 쓸기만 했을 뿐입니다" "그래 놓으니 마을이 확 달라지네. 마을회의를 해서 한 번만 하지 말고 자주 치자고 해야겠네" 하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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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르신이 자르고 난 뒤 잘 정리된 길의 모습이다. 어르신 말씀대로 ‘제대로 사람이 다닐 수 있는 길’이다 ⓒ 정판수

우린 '한 사람의 뛰어난 천재가, 한 사람의 유능한 정치인이, 한 사람의 의지 굳은 혁명가가 세상을 바꾼다'는 말을 흔히 듣는다. 그건 분명히 옳은 말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이의 이야기를 듣고 보았다.

그런데 난 오늘 평범하면서도 따뜻한 마음을 가진 한 사람의 행동이 마을을 바꾸는 걸 보았다. 올해 일흔이신 한 시골 어른의 작은(?) 선행이 주변 사람들을 이끌어 내 그냥 무심코 지나쳤던 일을 깨우쳐 좀 더 나은 마을로 만드는 걸.

가만 보면 어른은 나보다 학교 교육도 덜 받았고, 나보다 생활도 여유롭지 않고, 나보다 젊지도 않지만 분명 나보다 훨씬 따뜻하고 넉넉한 마음을 가졌다. 산음댁 할머니도 마찬가지다. 언제나 도움을 청하면 당신 일을 뒤로 미루고 달려오신다. 그래서 내가 쓰는 달내일기에 가장 많이 등장한다.

그동안 난 솔직히 큰 사람, 큰 일, 큰 결과가 아니면 관심이 없었다. 적어도 누구나 그 이름을 듣고 고개를 끄덕일 만한 사람이 아니면 관심이 없었고, '몇 년 만에 가장'이나 '역사적'이란 말이 붙지 않은 뉴스는 그냥 흘려버렸다. 사람들마다 탄성을 지르는 업적을 거론할 때만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마을에 이사 온 뒤 아주 자잘한, 그냥 지나쳐버려도 좋을 일들에 관심을 갖게 된 건 다 두 분 덕이다. 두 분은 내가 읽은 어떤 책의 주인공들보다 더 많은 가르침을 준다. 책에서 만난 위인들은 그 나름의 가르침을 주지만, 곁에서 직접 '더불어 사는 삶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그 가르침에 비할 수 없다. 두 분은 바로 나의 참 스승이시다.
#달내마을 #예초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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