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이 눈독들이던 오키나와, 일본이 먼저 합병하다

등록 2007.10.01 12:04수정 2007.10.01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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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문부과학성의 역사교과서 왜곡에 반대하는 오키나와 주민 11만 명이 지난 9월 29일 섬 내에서 대규모 항의집회를 열었다. 오키나와 출신 국회의원들은 물론 41개 기초자치단체 의회가 모두 참가했을 정도로, 이번 집회는 오키나와 차원의 대규모적인 것이었다.

태평양전쟁 막바지에 미군의 오키나와 점령이 확실해지자 일본군이 오키나와 주민들에게 명예로운 옥쇄(자결)를 강제함으로써 많은 오키나와 주민들을 죽음에 이르게 했던 역사적 사실과 관련하여, 문부과학성이 “일본군에 대한 부정적 인상을 심어줄 수 있다”면서 금년 3월 교과서 검정에서 ‘일본군이 집단 자결을 강요했다’는 부분을 삭제하도록 한 데에 따른 집단적 반발이다.

이번 교과서 문제에서 부각된 바와 같이, 오키나와는 태평양전쟁 당시부터 미국과 일본이 모두 첨예한 이해관계의 대립을 보이던 곳이었다. 그런데 오키나와에 눈독을 들인 강국은 비단 미국이나 일본만이 아니었다. 이곳은 이미 19세기 후반부터 영국도 눈독을 들이던 곳이었다.

그런 오키나와가 어떻게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는지 하는 점과 관련하여, 미국 캘리포니아대학 출판사가 1980년에 발행한 한국인 역사학자 김기혁의 책 <동아시아 세계질서의 최종 국면>을 살펴보기로 한다. 책의 원제는 The Last Phase of The East Asian World Order이다.

오키나와의 원래 이름은 유구(琉球)였다. 이 유구는 1372년부터 명나라의 번속국이 되었다. 명나라의 책봉을 받는 나라가 된 것이다.

그런데 대륙에서 명나라가 임진왜란의 후유증에 시달리고 여진족(청나라)이 급거 흥기하고 있던 기회를 활용하여, 일본 사쓰마번(藩)이 1609년부터 유구에게 조공을 강제함으로써 유구는 이른 바 양속(兩屬)의 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중국에도 조공하고 일본에도 조공했다는 의미에서 역사학자들이 그런 명칭을 붙인 것이다.

중국과 일본이 모두 유구에 대해 영향력을 행사하는 양속의 상태를 종결시키기 위해 일본측은 메이지유신(1868년) 이후부터 유구에 대해 본격적인 전략적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하였다.


그러던 차에 일본에게 좋은 빌미가 하나 생겼다. 1871년 11월 27일 69명의 유구인이 탑승한 선박이 풍랑을 맞아 대만 동해안에 표류했다. 3명의 익사자를 제외한 66명의 상륙자 중에서 54명이 대만 원주민들에게 살해됨에 따라 이 문제는 국제적 사건으로까지 비화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일본 외무대신 소에시마 다네오미는 유구의 외교권을 일본 외무성으로 이관시키고 규수의 군대를 유구에 주둔시키는 등 유구 점령을 위한 준비작업에 본격적으로 돌입했다.

한편, 일본은 이 기회에 중국과 유구를 분리시키기 위하여 이른 바 성동격서(聲東擊西)라고 불릴 만한 전략을 구사했다. 일본은 1874년 2월 6일 대만 출병을 결정하고 5월에는 대만에 군대를 상륙시켰다. 유구인들의 한을 갚아주겠다는 것이 그 명분 중 하나였다.

일본이 대만에 출병한 진짜 의도는 대만을 차지하거나 유구인들의 한을 갚아주려는 데에 있었다기보다는 유구를 점령하려는 데에 있었다고 보는 편이 타당하다. 유구를 차지하기 위해 대만에 군대를 보냈으므로 성동격서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다음과 같은 사건 경과과정을 볼 때에 그러하다.

일본은 대만에 군대를 파견해 놓은 상태에서 청나라 정부에게 손해배상을 요구했다. 유구인들이 대만인들에 의해 살해된 사건을 두고 일본정부가 손해배상을 요구하다는 것은 유구가 일본의 관할 하에 있음을 전제로 하는 것이었다. 청나라로서는 원칙상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런데 일본군의 위협에 놀란 청나라측은 광동 병력 8천 명을 대만에 파견해놓고도 어떻게든 협상으로 문제를 마무리 지으려 하였다. 결국 청나라는 일본측에 손해배상금을 지급하기로 하고 일본 군대를 돌려보냈다. 이런 합의를 담은 것이 1874년 10월 31일의 베이징전약(北京專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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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4년에 청·일 간에 체결된 베이징전약의 영문본 및 중국어본. ⓒ 김종성

유구인들이 살해된 사건을 놓고 일본에게 손해배상금을 지급한 청나라의 태도는 ‘유구는 일본의 영향권 하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 것이다. 이것은 유구의 양속 상태를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이로써 유구는 국제적으로 일본의 영향권 하에 있는 지역임이 인정되었다. 청나라는 유구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는 대신 대만을 지키는 데에만 성공했다.

그런데 일본은 1874년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한동안 국내정세의 불안정 때문에 유구에 대한 공세를 더 이상 추진하지 못했다. 이 시기의 유구는 일종의 잠정적인 보호국 상태였다.
유구에 대해 관망의 자세를 취하던 일본을 자극한 결정적 계기가 하나 있었다. 1876년에 런던에서 발행된 잡지에 실린 기사 하나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기사에서는 ‘유구는 동아시아의 전략적 요충지이므로, 영국이 동아시아를 지배하기 위해서는 이 유구를 남보다 먼저 점령해야 한다’는 취지의 주장을 폈다. 당시까지만 해도, 일본이 유구를 확실히 지배하고 있는 것은 아니었으므로 영국 잡지에서 이 같은 주장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문제의 이 잡지는 1877년에 영국유학파 교육자인 모리 아리노리(훗날 제1차 이토우 히로부미 내각의 문부대신)라는 인물을 거쳐 일본 법무상 이와구라 도모미에게 전달되어 일본정부에까지 알려지게 되었다.

잘못하면 영국에게 유구를 빼앗길 수도 있겠다는 판단에 조급해진 일본은 서둘러 유구합병을 추진하게 되었다. 1878년 말부터 일본의 국내정세가 안정된 점도 일본 정부가 유구합병에 속력을 내도록 만드는 요인이 되었다.

청나라는 이미 1874년에 유구를 사실상 포기했고 영국은 아직 유구에 손을 뻗을 준비가 되어 있지 않던 1879년 3월에, 일본은 이토우 히로부미의 지휘 하에 유구합병을 전격적으로 성사시켰다. 그리고 유구를 오키나와로 바꾸고 일본의 행정단위인 현으로 편입시켰다.

이 유구합병은 청나라가 같은 해인 1879년부터 조선에 대한 영향력 강화를 시도하도록 만드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유구에 이어 조선마저 일본이나 러시아에 넘어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에 청나라가 조급해진 것이다. 지금이나 그때나 동아시아 정세는 일종의 도미노 현상을 보이고 있었던 것이다.

위와 같이 일본은 영국이 유구에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1870년대 중반 이후로 유구합병작업을 서둘렀으며, 결국 유구를 일본령 오키나와로 만드는 데에 성공하였다. 그리고 일본의 오키나와 지배는 일본이 조선과 대만으로 영향력을 팽창시키는 중요한 발판이 되었다.

오키나와가 일본에게 얼마나 중요한 지역인가 하는 점은 일본이 제2차 세계대전 패전에도 불구하고 오키나와를 전승국 미국으로부터 결국 되찾아왔다는 사실로부터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19세기 후반에는 영국이, 20세기 중반에는 미국이 눈독들이던 오키나와는 일본의 강한 집착과 적극적 태도로 인해 오늘날까지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다.   
#오키나와 #일본 역사교과서 #역사왜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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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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