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85] 정약용 - 김옥균 - 안창호 - 이광수

김갑수 항일역사팩션 제2편 '중경에서 오는 편지

등록 2008.07.11 10:53수정 2008.07.11 10: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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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옥균의 최후

김옥균은 유폐 생활에서 벗어나 도쿄로 옮겨오게 되었다. 그가 혁명의 꿈을 포기했는지 아닌지는 알 수 없었다. 이쯤에서 그는 혁명의 꿈을 버리지 않을 수가 없었다고 보는 게 옳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여전히 무모한 꿈을 버리지 않고 있었다고 말할 수 있는 근거도 있다.

마침 오사카에서 온 안경수라는 한국인이 지독히도 요염하게 생긴 소녀를 데리고 김옥균에게 나타났다. 무슨 이유인지 김옥균은 소녀에게 최대한의 친절을 보인다. 그는 소녀를 자기 숙소에 묵게 하면서 한문과 붓글씨를 가르쳤다. 하지만 그는 소녀의 성적 매력에 관심을 나타내지는 않았다.

아마도 김옥균은 그렇게 해야 소녀를 자기 수중에 넣을 수 있다고 생각한 건지도 몰랐다. 그러나 소녀는 김옥균이 짜증스러웠다. 그녀에게 붓글씨 같은 것을 가르쳐 줄 남자는 김옥균 말고도 많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소녀는 도움을 받는 만큼 응당 대가를 치르고 싶었다. 그러나 김옥균은 소녀의 몸에 전혀 손을 대지 않았다. 소녀가 원했던 것은 그런 게 아니었다. 그녀는 권력이나 아니면 돈을 필요로 했던 것이다.

소녀는 얼마 더 참으며 기다려 보기로 했는데 기다림의 결실은 뜻밖에도 일찍 찾아왔다. 마침내 김옥균은 요염한 그녀를 더욱 요염하게 치장시키더니 도쿄의 유서 깊은 주택가 어느 저택으로 데려갔다. 김옥균은 소녀를 옆에 앉히고 50세가 다 되어 보이는 수염 난 일본인과 바둑을 두었다. 그날로 소녀는 저택에서 살게 되었다. 수염 난 일본인은 이토 히로부미였고 그 한국인 소녀의 이름은 배정자였다.

이토는 그녀를 양녀로 삼아 곁에 두었다. 그것은 어린 여자를 첩으로 삼는 일본 귀족들의 방식이었다. 조선 통감의 꿈이 있었던 이토는 배정자를 먼저 조선의 조정에 보내 분위기를 염탐케 하였다. 김옥균도 배정자에게 몇 가지 지령을 따로 내렸다. 그러나 배정자는 이토의 지시 사항은 열과 성을 다하여 수행했지만 김옥균의 지령은 받은 날로 잊어먹었다.

배정자가 만난 남자 중에는 김옥균 같은 유형이 의외로 많았다. 여자가 필요로 하는 것은 돈이나 권력인데, 쥐뿔도 없으면서 교양이나 지식으로 자기를 엮으려 하는 남자들을 그녀는 많이 겪어 보았던 것이다. 배정자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남자는 손도 안 대고 코 푸는 짓을 하려는 위인에 불과했다. 그래서 그녀는 김옥균에게 전혀 미안한 마음 같은 것조차 없었다. 김옥균은 그렇게 어린 소녀에게까지 이용당하고서도 여전히 자기는 비범한 사람인 줄 알고 있었다.   


바로 이때 김옥균에게 한 장의 초청장이 날아든다. 청나라 실력자 이홍장의 양자 이경방이 보낸 것이었다. 이경방은 일본 주재 공사로 재직한 적이 있어서 김옥균과는 안면이 있는 사이였다. 김옥균은 역시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었노라고 흡족해 한다. 그는 초청자인 이경방에게는 관심이 없었다. 어서 청에 가서 실력자 이홍장을 만나 자신의 어려움을 타개하고 조선에 복귀하고 싶었다.

김옥균은 안내인 격으로 따라 붙은 홍종우와 청나라 공사관 관리 오보인 등과 함께 상해 행 사이쿄마루에 승선했다. 상해에 도착한 그들은 미국 관할 치외법권 지역에 있는 동화여관에 투숙했다. 김옥균과 홍종우는 나란히 방을 잡았다.

아침이 되자 홍종우는 김옥균의 방문을 밀어 보았다. 문은 소리 없이 열렸고 침대에 앉아 안약을 넣고 있던 김옥균은 그가 들어오는 것을 보지 못했다. 홍종우는 품 안에서 권총을 꺼냈다. 그러고는 김옥균의 가슴을 정확히 겨냥해 방아쇠를 당겼다.

이듬 해 봄 진달래가 보라색으로 산을 온통 물들이고 있는 한양 양화진 형장에서는 김옥균의 시신에 대한 육시형이 집행되었다. 그의 몸통은 한강의 물고기에게 던져졌고 그의 머리와 다리는 형장에서 얼마간 햇볕을 쪼이게 한 다음 '모반대역죄인옥균'이라고 쓴 휘장을 날리며 조선 8도를 순회했다. 이것은 을사조약이 체결되기 불과 11년 전의 일이었다.

김영세가 내린 결론

그날 김영세가 조카 앞에서 내린 결론은, '무모한 개화주의는 사악한 계몽주의의 어머니'라는 것이었다.

"나는 정약용에서 김옥균으로 이어지는 개화·계몽 지식인들 때문에 이 나라가 결딴났다고 본다. 부부간에는 이혼이란 게 있을 수 있다. 하지만 부부 사이를 깨지 않으려면 잘 났든 못 났든 감싸 안고 살아야 한다. 제 남편 제 마누라는 못 났다고 하면서 남의 남편, 남의 마누라는 멋있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든지, 아니면 제 남편, 제 마누라에게 너는 인격을 개조해야 한다고 윽박지른다면 그 가정은 파탄날 수밖에 없는 것 아니겠냐? 섣부른 개화·계몽은 이 나라 이 민족의 파탄을 조장한 것이다."

김문수는 삼촌의 입에서 또 어떤 말이 나올지 궁금했다. 그는 침을 삼키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안창호에서 이광수로 이어지는 지식인의 계보도 거의 같은 것이다."
안창호 하면 누가 뭐래도 이 시대 최상의 민족 지도자이며, 이광수 역시 대다수 조선 지식인의 흠모를 받고 있는 문사였다. 그런데 김영세는 정약용 - 김옥균 - 안창호 - 이광수로 이어지는 개화· 계몽 라인에 망국의 책임을 지우고 있는 것이었다.

김문수의 동아일보 기자 생활

김문수가 근무하는 신문사 문화부의 업무는 의외로 한가했다. 기자들은 두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 신문사의 지침을 미리 알아서 기사를 쓰는 기자와 써 봤자 기사로 채택되기는커녕 간부들의 눈 밖에 나기가 십상이니 그저 주어지는 일을 하며 월급이나 받으면 그만이라고 여기는 기자가 있었다. 김문수는 차츰 후자 쪽으로 기울어졌다.

입사한 지 불과 6개월밖에 안 된 그가 직업에 회의를 갖기 시작한 데에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처음 그는 기자들이 기사를 조심해서 쓰는 이유를 총독부의 검열 때문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시일이 흐르면서 그는 그게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기사가 총독부의 검열에 걸려 취소되는 경우는 의외로 적었다.

간부나 고참 기자들은 기사의 초점을 오로지 한 군데에 맞춰 놓고 있었다. 먼저 총독부의 검열선 이내이면서 동시에 신문은 조선 민족의 편이라는 것을 독자에게 인식시킬 수 있는 묘한 기준점을 그들은 찾고 있었다. 그들이 최상으로 추구하는 것은, 줄 위에서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는 좌우 대칭의 평형이었다. 그래야 그들은 회사를 유지하면서 독자들에게 영향력을 지속적으로 가질 수 있다고 믿고 있었다.

다음으로 김문수는 저널리즘 자체의 속성에 회의하기 시작했다. 어느 경우든 사실 그대로 보도되는 기사란 단 한 건도 없었다. 이것은 총독부 검열과는 무관한 것이었다. 어떤 기사든지 무슨 수단을 써서라도 독자의 흥미를 유발하거나 사회에 문제를 제기하는 방향으로 기사가 작성되어야 했다.

애초부터 신문은 그래야 영향력이 유지될 수 있는 속성을 지닌 것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정도가 너무 심한 것이 문제였다. '사실 보도'와 '신문의 영향력 제고'가 충돌할 경우 사실 보도가 이기는 경우는 없었다. 게다가 총독부 검열과 기사 왜곡 두 가지 모두 가장 심한 부서는 놀랍게도 자기가 속한 문화부였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쓰는 소설입니다. 소모적인 친일논쟁보다는 정신과 실천으로 극일에 성공한 매혹적인 인물들의 삶과 사랑을 그립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쓰는 소설입니다. 소모적인 친일논쟁보다는 정신과 실천으로 극일에 성공한 매혹적인 인물들의 삶과 사랑을 그립니다.
#정약용 #김옥균 #안창호 #이광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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