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87] 파리강화회의와 무장투쟁론

김갑수 항일역사팩션 제2편 '중경에서 오는 편지'

등록 2008.07.14 20:00수정 2008.07.14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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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수의 집에 김영세 앞으로 편지 한 통이 날아들었다.

"삼촌, 신의주에 아는 사람이 있으셨나요?"

발송자는 세창양복점이라고 되어 있었다. 김영세는 영문을 몰라 하다가 수신자가 분명히 자기 이름으로 되어 있음을 확인하고는 편지를 뜯었다. 놀랍게도 편지는 정화가 쓴 것이었다.

김영세 선생님께,

선생님께서 주신 만년필로 이 글을 씁니다. 이곳에서 국내로 직접 편지를 써 보내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 신의주에 가는 인편을 통해 이 편지를 부칩니다. 황망히 오느라고 감사의 말씀도 제대로 못 드리고 와 마음에 걸렸습니다. 선생님께서 주신 펜으로 선생님께 편지를 쓰는 일이 꿈만 같습니다. 저에게 이런 행복한 기회가 주어질 날이 있을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저는 무사히 도착했습니다. 예관 신규식 선생은 임시정부의 주관자이십니다. 그 분은 보잘 것 없는 일을 한 저에게 극진한 경의를 표했습니다. 시아버님은 군자금에 앞서 살아서 돌아온 것만으로도 기뻐하셨습니다. 남편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반겨 주었습니다.

이제 저는 자의건 타의건 임시정부의 요원이 된 듯합니다. 갈 때는 비밀이었지만, 제가 돌아온 후에는 저의 일이 어느 정도 알려지게 되면서, 저를 대하시는 이곳 어른들의 태도가 달라지셨습니다. 그 분들은 이제 저에게 동지라는 호칭을 쓰십니다. 물론 제가 사양하며 예전처럼 이름을 불러 달라고 하지만요.


요즘 들어 저는 나라의 독립을 위해 일해야 한다는 사명감 같은 게 생겼습니다. 그래서 보다 많은 것을 배워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선생님과 조카 분을 뵈었을 때도 그런 생각이 들었었습니다. 정말 두 분은 아름다운 가족이셨고 동시에 지식인이 어떤 모습인지를 저에게 선보이셨습니다.

지금은 후회하고 계시지만 당시에는 완고하셨던 저의 아버님은 저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한 공부는 천자문과 소학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저는 나름대로 독서는 계속했습니다. 하지만 모자랄 뿐입니다. 이곳에는 여성들의 모임인 대한부인회등이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여성 단체에 관여하지 않습니다. 여성 모임의 주동 인물들은 이화여전등을 나온 이른바 신여성들로서, 그 중 일부는 자기들이 신식 교육을 받고 앞서가는 여성이 라는 인식이 강해서 주위 사람들의 눈총을 사기도 합니다.

"하여튼 개화· 계몽되었다는 사람들이란."

김영세는 편지에서 눈을 떼고 혀를 차며 말했다.

"어서 읽으시지요."

정화의 편지에 김문수는 김영세 이상으로 관심이 높았다. 임시정부의 소식을 당사자에게 직접 듣는다는 것은 김문수에게 비현실적이면서도 벅차고 감동적이었다.

저는 성재 이시영 선생님께 한학과 역사를, 세관 유인욱 선생님께는 영어를 배우고 있습니다. 특히 유 선생님은 저에게 미국 이야기를 소상히 들려주십니다. 저는 중국 고전에서 신학문에 이르기까지 구할 수 있는 대로 책을 구해 읽고 있습니다.

제 남편은 우승규(당시 동아일보 통신원, 해방 후 <나절로>라는 필명으로 활약), 심대섭 (시인, 소설가 필명 심훈), 윤보선(대한민국 대통령) 같은 유학생들과 교제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 분들이 제 집에 자주 놀러 오신답니다. 심대섭은 임정의 선전부장인데 항상 예의 바르고 열기 있는 청년입니다.

제가 국내에서 마련한 자금은 시아버님께 드렸는데, 그것이 어떤 용도로 쓰였는지 저는 알려 하지 않았습니다. 제 시아버님은 집 안에서는 온유하신 분이시지만 공적인 일에는 엄정하고 과묵하십니다. 아무튼 큰돈은 아니었지만 한동안 임시정부에서 요긴하게 쓰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망명정부라지만 그래도 한 나라의 정부입니다. 제가 모금한 돈이 큰 도움이 되었다고는 생각할 수 없습니다. 저는 그게 안타깝습니다. 지속적인 자금 조달을 위해 동포들의 재정 지원이 절실하다고 느껴집니다.

임시정부의 쇠퇴
 
이곳에서는 파리강화회의에 많은 기대를 걸었었습니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는 전승국인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 등이 패전한 독일의 식민지 나눠 먹는 모임에 불과했습니다. 조선의 독립하고는 전혀 무관했지요. 임시정부의 실망은 컸습니다. 임시정부의 총리 이 동휘 같은 분은 처음부터 외교 노선이 아닌 무장 투쟁을 주장했습니다. 제 시아버님 김가진도 무장 투쟁을 지지하여 1921년 북간도 독립부대인 군정서 고문을 하셨습니다.

무장 투쟁을 지지하는 사람은 임시정부에서 소수파이긴 했지만 외교에 의한 독립이 불가능 하다고 판단되자 자연히 임시정부에 대한 지지가 약화되었고, 갈수록 임시정부는 쇠퇴하는 추세입니다. 일제의 문화정치는 성공을 거두고 있는 듯합니다. 조선인 자본가들은 문화정치에 보조를 맞춰 교육사업이나 문화사업에는 돈을 내지만(이것은 그들에게 부와 명예를 동시에 줍니다.) 독립 운동에 자금을 대는 일은 위험할 뿐더러 실속이 없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임시정부의 재정은 날로 어려워지고 자연이 탈퇴자도 많이 생기게 되었습니다.

국내로 가서 계속 투쟁하는 분도 있지만 대부분이 그렇지 못합니다. 이곳에서 바라는 점은 국내인들이 가만히만 있어 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광수의 처신은 이곳 사람들에게 분노를 안기고 있습니다. 그 같은 인재가 그런 처신을 하는 것은 그동안 피 흘리며 일궈 놓은 독립지사들의 노력을 물거품으로 만드는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두가 독립운동의 진영에서 이탈한 것은 아닙니다. 간도에 가 무장 독립군에 가담한 이도 있고 손문이 이끄는 중국 혁명군에 합류한 청년들도 많습니다. 일단 학업을 택한 이도 있고 힘을 기르겠다며 무관학교에 입교한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이곳 상해 한인 사회는 3·1운동 후 2,000명에 이르던 인원이 지금은 500명 정도로 줄었습니다. 임시정부뿐 아니라 이곳에 있는 다른 애국 단체들도 침체에 빠졌습니다. 대동단의 국내 조직과 만주 조직도 해체되었습니다. 시아버님과 남편은 상해를 떠나 독립군 부대에 가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마침 북로군정서의 김좌진 장군이 시아버님을 초빙했습니다. 그러나 시아버님은 연로하셔서 건강이 쇠약하십니다. 사실은 세 식구가 만주로 옮겨 갈 경비 마련도 쉽지 않습니다. 이제 국내에 가는 분들도 돌아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연통제 조직도 거의 와해되기에 이르렀습니다.

선생님, 밝은 소식을 못 드려 미안합니다. 하지만 저는 아직 어리고 잘 모라서 그런지 크게 상심하지는 않습니다. 왜냐 하면 상황이 어떻게 변하든 저는 제가 할 일을 찾아 하면 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사실 저는 개인적인 사유로 독립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것은 제 삶을 제가 주관하는 아름다운 것으로 만들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선생님, 편지를 언제까지 제가 써 보낼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행여나 선생님께서 저에게 답장하실 의향이 있으시다면 신의주 세창양복점으로 해 주시기 바랍니다.

존경하는 정화 올림.

착잡해진 삼촌과 조카

편지를 읽은 삼촌과 조카는 침통한 심정에 젖어 들었다. 임시정부의 어두운 소식도 그렇지만 청년으로서 그리고 지식인으로서의 자책감 때문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여자인 정화에게 부끄러웠다. 그러나 그들이 현실을 타개할 만한 일에 뛰어들 통로조차 막혀 있는 것이 엄연한 사실이기도 했다.

김영세는 편지를 다리 사이에 놓은 채 한숨을 쉬며 천정을 올려 보았다. 김문수는 뒤로 물러나더니 책상에 한 팔을 얹은 채 방바닥을 보고 있었다.

"신문사는 재미없지?"
"네."
"잡지사도 재미없지요?"

영세는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교사 노릇을 해야 할까 보다."

그러나 영세의 심정은 문수와 조금 다른 것이 있었다. 뜻밖에도 정화가 편지를 해 준 것은 그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이기 때문이었다. 놀랍게도 그는 정화와 편지만이라도 계속 나눌 수 있다면 평생을 혼자서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의 총체를 조망하고 친일 문제를 온전히 청산해 보고자 하는 열망으로 쓰는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의 총체를 조망하고 친일 문제를 온전히 청산해 보고자 하는 열망으로 쓰는 소설입니다.
#정화 #세창양복점 #김가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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