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86] 식민지 여성의 페미니즘

김갑수 항일역사팩션 제2편 '중경에서 오는 편지'

등록 2008.07.13 15:09수정 2008.07.13 1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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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를 부러워하는 아들

그렇지만 김문수로 하여금 신문 기자 노릇에 결정적으로 부끄러움을 준 것은 정화였다. 그 작은 몸집의 아낙이 그렇게도 의미 있게 살고 있는데 반해 자신의 삶은 너무도 나약하고 초라하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이 시대에서 가장 화려한 직업은 독립운동가다.’
그는 독립운동을 하러 떠난 아버지가 부러웠다.

그는 대안으로 유학을 생각해 보기도 했지만 현실적으로 가능한 것은 일본 유학뿐이었다. 삼촌이 일본 유학을 허락할 리도 없었고 문수 자신도 그것은 내키지 않았다. 그는 중국 유학이나 아니면 독립운동에 투신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해 보기로 했다.

김문수는 손으로 턱을 괸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그는 조순호를 생각하고 있었다. 나민혜에게 조순호와 함께 나오라고 지나가는 투로 말했지만 사실 그는 조순호가 나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지난 번 나민혜를 만날 때 나오지 않았다. 나민혜의 말로는 조순호는 유학 준비로 바쁘다는 것이었다. 바빠도 생각만 있으면 나올 수 있는 일이건만 그녀는 좀처럼 얼굴을 나타내지 않았다.

김문수는 그 사이에 나민혜를 두어 차례 만났었다. 그녀는 신념 있는 페미니스트임을 김문수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것 같았다. 그녀는 입센의 <인형의 집> 몇 구절을 외우고 있었다.
“나는 인형이었네. 나는 인형이었네.”

김문수는 나민혜의 독백이 뜬금없다고 생각 들었다. 그래서 ‘나민혜씨는 인간이여’라고 말해 주고 싶었다. 하지만 나민혜는 이런 김문수의 생각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어제 <인형의 집> 연극을 보았어요.”


<인형의 집>이 한국에서 초연된 것은 1925년의 일이다. 아마도 나민혜는 조선배우학교에서 상연하는 연극을 보고 온 모양이었다.
“저는 노라가 독립된 인간으로 홀로 서기 위해 남편의 결합 요구를 거절하고 집을 나오는 장면에 큰 충격을 받았어요.”
“그게 왜 민혜씨에게 충격을 줬지요?”

나민혜는 대답 대신 노라의 대사를 반복했다.
“나는 인형이었네, 나는 인형이었네.”
김문수는 희곡 <인형의 집>을 이미 읽어서 알고 있었다. 김문수는 <인형의 집> 줄거리를 생각해 보았다.

변호사 헬마의 부인이자 세 자녀의 어머니로 행복하게 살던 노라는 남편이 병을 얻어 요양 가게 되자, 죽은 아버지의 이름을 위서하여 고리대금업자 구로구스타에게 돈을 빌린다. 건강을 찾은 헬마는 재기에 성공하여 은행장에 취임하게 된다. 한편 구로구스타는 마침 그 은행의 직원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헬마가 구로구스타를 해임하려 하자 그는 행장 아내의 위서 대출을 폭로하겠다고 맞선다. 집에 돌아온 남편은 아내에게 배신당했다며 욕설을 퍼붓는다. 노라는 자신이 이제껏 남편의 인형 같은 존재로 살아왔다고 자각한다. 그녀는 끝내 남편을 용서하지 않고 집을 나간다.

“나민혜씨, 이거 내 손가락 보이지요. 정신 차려요.”
나민혜는 당황했다. 처음 그는 김문수를 조금 쉽게 본 것이 사실이었다. 김문수에게는 그런 면이 없지 않았다. 그는 일본 제국주의만 빼면 이 세상 사람들은 모두 착한 줄 아는 순진한 청년이었다. 그는 세상 물정에도 매우 어두웠다. 그는 여자의 말 한마디에도 당황하며 수줍어하고는 했다.

그런데 화제가 역사나 문학 같은 데로 옮겨 가면 그게 아니었다. 그는 제 아무리 권위 있는 학자의 이론에도 날카롭게 대립각을 세웠으며 특히 세속적이거나 서구적인 가치관을 피력하는 사람에게는 갑자기 인격이 달라진 것처럼 반응했다. 나민혜는 그것을 간과한 것이었다.

기실 나민혜의 그런 언행은 다른 남자들에게는 위력이 있었다. 그래서 생각 없이 ‘나는 인형이었네’를 반복해 본 것뿐이었다. 이제 나민혜는 김문수에게 면박을 당할 차례임을 직감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김문수는 차분한 어조로 물었다.

“나민혜씨, 혹시 <장끼전> 읽어 봤어?”
“장끼는 꿩 아니에요?”
“누가 장끼가 뭐냐고 물었어요?”
“안 읽었어요.”
<장끼전>은 <인형의 집>보다 최소 50에서 100년은 앞서 나온 한국의 고전소설이다.

엄동설한에 굶주렸던 장끼는 아내 까투리와 함께 21마리의 아들딸을 데리고 먹이를 찾아 들판에 나섰다. 장끼는 땅에 떨어져 있는 붉은 콩 하나를 발견한다. 까투리는 간밤 불길한 꿈 이야기를 하면서 먹지 말라고 충고한다. 또한 그녀는 약간 수상쩍게 보이는 땅을 가리키며 덫이 놓여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장끼는 아내에게 면박을 주고 콩을 먹으려다가  덜컥 덫에 걸리게 된다.

장끼가 죽어가면서 아내에게 한 말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과부될 여자에게 장가든 내가 잘못’이라는 거였고 다른 하나는 ‘재가하지 말고 일부종사를 지키라’는 것이었다. 까투리는 남편의 깃털 하나를 뽑아 와 극진히 장례를 치른다. 그러면서도 그녀는 문상 온  부엉이, 물오리, 갈가마귀 등을 살핀다. 까투리가 최종적으로 낙점한 상대는 홀아비로 사는 장끼였다. 그녀는 새 남편과 살면서 아들 딸 모두 혼인시킨 후 명산대천을 찾아 유람 다니다 큰물에 들어가 조개로 환생한다.

페미니즘이라는 것

김문수는 나민혜가 안타까울 때가 있었다. 그녀의 서구 취향은 지나칠 때가 있었다. 김문수는 그녀가 화가이자 교사라는 사실이 실감나지 않을 때가 많았다. 김문수는 <인형의 집>을 주목하는 서구인들을 이해할 수 없었다. 더욱 이해할 수 없는 것은 덩달아 열광하는 한국인들이었다. 김문수의 생각으로는 <장끼전>이 단연 앞서는 문학이었다. 표현의 세련성은 물론이고 남녀평등이라는 주제 제기에서도 <장끼전>이 더 강렬한 것 같았다.

만약 <인형의 집>이 동양이나 아프리카 작가의 것이었다면 어땠을까? <장끼전> 같은 소설이 스칸디나비아에서 출판되었더라면 어떠했을까? 김문수는 입센 말고도 동화 작가 안데르센을 알고 있었다. 그의 우화 역시 그렇게 세계적으로 명성을 낼 문학이 아니었다. 제국주의의 위세는 문학에서도 불평등을 조장하고 있는 것만은 틀림없었다.

게다가 한국인들의 의식은 서구에 대한 동경 이상의 수준을 넘고 있었다. 한국인들에게는 서구의 것이면 무조건 굴복하는 관습이 생겨나고 있었다. 이것도 삼촌 말대로 개화· 계몽주의의 영향일까? 삼촌은 정신적, 문화적 오염은 치유되기가 어려워 우리의 상상 이상으로 오래갈 거라고 했는데 그 말이 맞을는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김문수는 나민혜를 미워하거나 경시하지는 않았다. 조그만 여자 하나를 미워하거나 경시할 만큼 그는 각박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민혜는 김문수에게 늘 먼저 연락을 해왔다. 그것은 고마운 일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최소한도 김문수 생각으로는 그랬다. 그리고 그는 나민혜가 착하고 순진한 처녀라는 생각을 부단히 하고 있었다. 왜 그런지 그것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것은 사람을 중하게 여기는 김문수 집안의 전통에서 비롯된 건지, 아니면 모든 사람을 선하게만 보는 김문수 특유의 천성 때문인지도 몰랐다.

“김 선생님은 참 대단하신 분이어요. 나는 여러모로 모자란 것 같아요.”
김문수는 나민혜의 우울한 표정을 보며 측은함을 느꼈다. 김문수는 다소곳이 눈을 내리고 있는 나민혜를 보며 그녀가 착하고 순진한 여자라는 생각을 새삼 하고 있었다.

“나민혜씨, 페미니즘이란 여자가 남자를 버리고 집을 뛰쳐나가는 것이 아니라, 남자와 대등한 능력을 갖추고 대등한 대우를 받으며 남자와 조화롭게 살자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유럽의 문제이지 식민지 조선의 문제는 아닙니다. 서양에서 수공업이나 가내공업을 할 때는 여자도 경제 활동에 참여하여 대등한 대우를 받았어요. 그런데 공장공업이 생기자 남자들은 나가 일하는데 여자들은 놀게 되었단 말입니다.

우리 한국처럼 가정 또는 가족 문화가 발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여자는 일도 안하는데다 실권도 없어지게 되었어요. 인형이란 말이 나올 법하지요. 서양 여자가 외출할 때 옷 입는 장면을 보세요. 양쪽에서 조이고 잡아당기고 모자 쓰고 장갑 끼고 난리법석을 떨며 정말 인형처럼 만들잖아요. 여자는 부서질 듯이 차려 입고 종종 걸음으로 파티에 갑니다. 비인간적이지요.

한국의 경우 집안일에서는 여자가 전권을 갖는 것이 전통입니다. 그러니 할 일이 많고 보람도 느끼며 그에 상당하는 대우도 받아 왔던 겁니다. 여자가 공부하고 책 읽는 것은 남자와 대등한 능력을 갖추어 사회 활동에 기여하기 위해서인데, 최근 조선 여자들은 좋은 남자와 결혼하기 위해서 공부하는 이상한 경향이 생겼어요. 다 외국 것을 잘못 받아들인 결과인데 이를 부추기고 있는 것이 최근에 붐을 타고 있는 통속소설들입니다. 그리고 그 배후에는 신문사가 있고요.”

사람이 말을 많이 하면 허전하고 쓸쓸해지는 법이었다. 그날 김문수는 허전하고 쓸쓸한 마음으로 귀가하며 조순호를 생각했다. 조순호는 나민혜와 다른 여자일 거라는 확신이 그에게는 있었다. 문제는 조순호가 만나자고 해도 응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었다. 김문수는 직접 편지를 쓰기로 마음먹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하게 청산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쓰는 소설입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하게 청산하고자 하는 열망으로 쓰는 소설입니다.
#페미니즘 #독립운동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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