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 안 써야 우리 말이 깨끗하다 (174)

― ‘소설의 핵심적인 문제점’, ‘제도의 근본적인 개선’ 다듬기

등록 2008.07.17 17:23수정 2008.07.17 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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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폐쇄하고 있을 정도의 정서불안적 상태

.. 인간으로서 말을 하지 않을 만큼 자기를 폐쇄하고 있을 정도의 정서불안적 상태에 놓여 있으면 지혜의 싹도 틀 수 없는 것이다 ..  《쇼지 사부로/정필화 옮김-새와 이야기할 수 있는 아이》(특수교육,1990) 175쪽


‘폐쇄(閉鎖)하고’는 ‘닫고’로 다듬습니다. ‘지혜(智慧)’는 ‘슬기’로 다듬고요. ‘인간(人間)’이 아닌 ‘사람’으로 고쳐 줍니다.

 ┌ 자기를 폐쇄하고 있을 정도의 정서불안적 상태에 놓여 있으면
 │
 │→ 자기를 닫고 있을 만큼 마음이 어수선하면
 │→ 자기를 닫고 있을 만큼 마음이 흔들리고 있으면
 │→ 자기를 닫고 있을 만큼 마음 갈피를 못 잡고 있으면
 │→ 자기를 닫고 있을 만큼 마음이 제자리를 못 찾고 있으면
 └ …

“정서불안이다”처럼 말할 때와 “정서불안적 상태에 놓여 있다”처럼 말할 때는 어떻게 다를까요. 뜻이나 느낌은 얼마나 벌어질까요. ‘정서(情緖)’란 무엇이며 ‘불안(不安)’이란 무엇일까요.

한자말을 쓰느냐 마느냐, 서양말을 쓰느냐 마느냐는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습니다. 어떤 말을 골라서 어느 자리에 쓰느냐가 중요합니다. 받아들여서 쓸 만한 말이면 프랑스말이든 필리핀말이든 가릴 까닭이 없습니다. 받아들일 만하지 않다면 토박이말이라고 해도 안 쓰는 편이 낫습니다.

우리는 왜 ‘정서’라는 말과 ‘불안’이라는 말을 쓸까요. 또, ‘정도 + 의’ 꼴을 쓸까요. 이런 말투가 아니면, 이런 낱말이 아니면 우리 생각이 어떠한지를, 우리 마음이 어떻게 있는지를 나타내지 못할까요.
ㄴ. 소설의 핵심적인 문제점


..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점은 심청의 육체를 담보로 한 동아시아 제국의 ‘오디세이적 항해’라는 것이, 철저하고 뿌리깊은 ‘강간 판타지’에 기반하고 있으며, 같은 차원에서 여성인물 심청의 내면을 형편없이 축소시키는 ..  《이명원-마음이 소금밭인데 오랜만에 도서관에 갔다》(새움,2004) 32쪽

“심청의 육체(肉體)”는 “심청이 몸뚱이”나 “심청이 몸”으로 손봅니다. ‘철저(徹底)하고’는 ‘빈틈없이’나 ‘속속들이’로 손보고요. ‘기반(基盤)하고’는 ‘바탕을 두고’나 ‘뿌리를 두고’로 다듬습니다. “같은 차원(次元)에서”는 같은 테두리에서”로 다듬으면 되고, “심청의 내면(內面)”은 “심청이 속마음”으로, ‘축소(縮小)시키는’은 ‘쭈그러뜨리는’이나 ‘짓밟는’이나 ‘깔아뭉개는’으로 다듬으면 좋습니다. 그러나 ‘오디세이적 항해’는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네요.


 ┌ 이 소설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점은
 │
 │→ 이 소설에게 가장 핵심이 되는 문제점은
 │→ 이 소설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 …

평론이라는 글은 이렇게 딱딱하기만 할까요. 평론을 하겠다는 사람이 처음부터 마음먹으며 읽는 책, 대학교나 대학원에 갔을 때 그네들을 가르치는 교수가 쓰는 말이 워낙 ‘어렵고 딱딱하기’ 때문에 이런 말을 쓰고 말까요.

어떤 분은 “우리 말은 세분화한 뜻을 담아내지 못한다”고 말합니다. 그러면 미국말이나 일본말은 ‘세분화한 뜻’을 잘 담아내나요. 우리 스스로 우리 말로 우리 뜻을 담아내는 훈련과 공부를 안 했거나 못했기 때문에 ‘세분화한 뜻’을 우리 말로 담아내기 어렵다고 느끼지 싶은데.

ㄷ. 제도의 근본적인 개선

.. 박정희의 유신 독재가 종막을 향해 치닫던 시절답게 한국의 의료보험 제도도 졸렬한 내용으로 시작되었고 그후 23년이 지나도록 의료보험제도의 근본적인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김규항-B급 좌파》(야간비행,2001) 249쪽

“종막(終幕)을 향(向)해”는 “마지막으로”나 “벼랑으로”로 다듬습니다. “박정희의 유신 독재”는 “박정희 유신 독재”로 고치면 되고, “한국의 의료보험 제도”는 “한국 의료보험 제도”나 “우리 나라 의료보험 제도”로 손볼 수 있습니다. “졸렬(拙劣)한 내용(內用)으로 시작(始作)되었고”는 “어설프게 태어났고”나 “엉성하게 뿌리를 내렸고”로 손봅니다. ‘그후(-後)’는 ‘그 뒤’로 고치고, ‘개선(改善)’은 ‘고치다’로 고쳐 줍니다.

 ┌ 근본(根本)
 │  (1) 초목의 뿌리
 │  (2) 사물의 본질이나 본바탕
 │  (3) 자라 온 환경이나 혈통
 ├ 근본적(根本的) : 근본을 이루거나 근본이 되는
 │
 ├ 의료보험제도의 근본적인 개선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 의료보험제도는 밑바탕이 고쳐지지 않았다
 │→ 의료보험제도는 조금도 나아지지 않았다
 │→ 의료보험제도가 고쳐질 낌새는 없었다
 │→ 잘못된 의료보험제도를 제대로 고치지 못했다
 │→ 비틀어진 의료보험제도를 어느 하나 바로잡지 못했다
 └ …

좀더 부드럽게 다듬는 일은 어렵군요. 그렇지만 어떻게든 손을 보려고 마음을 기울여 주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생각합니다. 어렵더라도 한 걸음 두 걸음 걷고, 힘들더라도 세 걸음 네 걸음 걸으면서, 좀더 알맞는 말을 찾아야 한다고 느낍니다. 더욱 살갑게 마음에 와닿을 글을 써야 한다고 느낍니다.

‘(무엇)의 (무엇)적 (무엇)’처럼 쓰면서, ‘무엇’을 온통 한자말로 채우는 말투는 일본 말투입니다. 꼭 일본 말투여서가 아니라, 우리한테 쉽지 않은 말투이고, 낯익기 어려운 말투이며, 우리들은 우리 나름대로 누구나 손쉬우며 깨끗하고 알뜰하게 주고받을 수 있는 고유한 말투가 있습니다.

우리 말투가 마땅하지 않거나 없다면 나라밖 말투도 들여올 수 있을 테지요. 다만, 우리가 넉넉히 쓸 만한 우리 말투가 있을 때에는 구태여 일본 말투를, 게다가 일제강점기 때 스며든 식민지 말투를 끌어들이지 않아도 됩니다.

덧붙이는 글 | 글쓴이 인터넷방이 있습니다.

http://hbooks.cyworld.com (우리 말과 헌책방)
http://cafe.naver.com/ingol (인천 골목길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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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말꽃(국어사전)을 새로 쓴다. <말꽃 짓는 책숲 '숲노래'>를 꾸린다. 《쉬운 말이 평화》《책숲마실》《이오덕 마음 읽기》《우리말 동시 사전》《겹말 꾸러미 사전》《마을에서 살려낸 우리말》《시골에서 도서관 하는 즐거움》《비슷한말 꾸러미 사전》《10대와 통하는 새롭게 살려낸 우리말》《숲에서 살려낸 우리말》《읽는 우리말 사전 1, 2, 3》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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