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과 인간] 창씨개명에 관한 오해와 진실

[김갑수 역사팩션 140] 3부 '열두개의 눈동자' 편

등록 2008.10.22 15:39수정 2008.10.22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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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씨개명은 전시동원체제의 부산물

창씨(創氏)란, 씨를 바꾸는 게 아니고, 말 그대로 씨를 새로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고 개명(改名)이란 당연히 이름을 바꾸는 것이었다. 당시 일본은 조선인에게 개명을 강요하지는 않았다. 그들이 중시한 것은 창씨였다.

주지하다시피 조선인은 부계 혈통에 따른 성씨(姓氏)가 있어 그것은 죽어서도 바뀌지 않는 관습을 유지해오고 있었다. 조선인에게는 성의 3대 원칙이 있다. 첫째가 '성 불변'의 원칙이다. 둘째는 '동성 불혼'의 원칙이고 셋째는 '이성 불양'(다른 성을 가진 자는 양자로 삼지 않는다)의 원칙이다.

조선인의 '성'제도에 반해 일본에는 '씨' 제도가 있다. 그리고 씨는 개인이 아닌 집(家)에 붙여지는 표식과 같은 것이다. 당연히 호주 이하 가족 구성원 모두는 같은 씨를 사용한다. 이것은 일본이 조선인에게 '개명'이 아닌 '창씨'만을 문제 삼은 배경이었다. 요컨대 일본은 조선인에게 자기들의 씨 제도를 요구한 것이었다.

창씨개명은 그들이 부르짖었던 내선일체의 일환으로 집행된 제도였다. 이를 가리켜 조선인들은 민족말살정책이라고 했다. 그러나 내선일체건 민족말살이건 모두 전시동원체제의 하위 개념이라는 점이 중요하다. 일본은 전쟁 수행을 위해 인적 자원이 더 필요했고, 그러기 위해서 조선 청년을 징집하기로 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창씨개명은 조선인 징집을 위한 술수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일제는 성을 목숨처럼 여겼던 조선인에게 창씨개명이 무리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성을 바꾸지 말고 하나 더 만들라고 했던 것이었다. 그리고 개명 여부는 문제 삼지 않은 것이었다.

또한 그들은 창씨가 강요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이기 위해, 누가 보아도 창씨를 할 만한 사람 중에 일부를 골라 창씨를 하지 않도록 관리하거나 방임했다. 예컨대 비행기를 헌납한 박흥식, 중추원 고문 한상룡, 내선일체 추진동맹 이사를 지낸 박춘금 같은 이도 창씨를 하지 않은 대표적인 친일 인사였다. 그러므로 창씨 여부만을 가지고 친일의 증거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창씨 신고 시행 첫날, 조선인의 자진 신고는 48건에 불과했다. 당시 조선인의 가구 수는 약 400만호였다. 그리고 본격적인 캠페인을 벌인 3개월 동안에도 불과 7.6%만이 창씨에 응했다. 이렇게 자진 신고한 사람들에게는 혹시 친일 성향이 있었다고 말할 수 있을지는 모른다.

아무튼 이렇게도 호응 비율이 낮은 것은 어느 식민지 역사에서도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었다. 다시 말해 피지배 식민들의 혈통적 자부심이 이렇게 큰 예는 없었던 것이다. 그것은 같은 식민지 대만에서는 일본식 창씨를 원하는 사람이 많아 창씨를 의무제가 아닌 허가제로 했다는 것을 보면 능히 알 수 있는 일이었다.

조선인이 호응하지 않자 일본은 조선인이 창씨를 안 할 경우, 각종 인·허가를 내주지 않았고 여행을 불허하는 조치를 취한다. 그러자 나머지 70% 정도의 조선인이 창씨 신고를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도 교육열이 높은 조선인에게 자녀의 학교 재학을 불가능하게 만든 점이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창씨개명에 날카롭게 저항한 조선인도 있었다. 전남 곡성의 58세 유건영은 창씨제에 대해 엄중한 항의서를 미나미 총독에게 보낸 후 자결했다. 전북 고창의 의병 출신 설진영은 창씨 통보를 받자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 창씨를 시킨 후, 자신은 조상 볼 낯이 없다는 유서를 남기고 가슴에 돌을 안고 우물로 뛰어들었다.

다른 면으로도 조선인들이 혈통의 족보를 지키려한 노력은 눈물겨웠다. 김씨의 경우, 원래 또는 본래 김씨였다는 의미로 김원(金原)· 김본(金本)으로, 안동 권씨는 줄여서 안권(安權)으로, 하동 정씨는 하동(河東)으로, 전주 이씨는 조선의 본가라고 하여 조본(朝本)으로, 그리고 노(盧)씨는 시조가 용강 쌍제촌에서 우거했다고 하여 강촌(岡村)으로 표기했다.  

물론 개중에는 개인의 의지와 사심 때문에 적극적으로 창씨개명을 한 사람도 있었다. 친일 승려이자 조계종의 실권자 이종욱은 일본 외무대신 히로다의 성을 본떠 히로다 쇼이쿠로 창씨했고, 중추원 참의 최지환은 일본의 후지산과 정한론자인 다카모리의 이름을 따서 후지야마 다카모리로 창씨에 개명까지 했다.

주요한은 일제의 황도 정신인 '팔굉일우'를 따서 '마쓰무라 고이치'라고 창씨개명했고, 이광수는 일본의 시조 천황 진무가 즉위한 산의 이름 향구산에서 향산을 따고 일본의 남자 이름에서 많이 사용하는 랑 자를 써서 향산광랑(香山光郞)이라고 씨와 이름을 모두 일본식으로 창씨개명했다.

일본군 장교 박정희는 다카기 마사오(高木正雄)라고 창씨개명했다. 그런데 다카기(高木)에는 원래 성인 고령박씨의 흔적이, 마사오(正雄)에는 원래 이름 정희(正熙)의 흔적이 조금이나마 남아 있다. 하지만 박정희는 훗날 오카모토 미노루로 다시 창씨개명한다. 물론  여기에는 조선인의 흔적 같은 것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식민지 시대 뒤틀린 여성의 두 유형

일본에 의해 창씨개명을 하지 않게끔 관리된 여류 시인 나윤숙은 경성방송국장을 만났다. 그리고 경성방송국장은 그녀를 구라하시 일본군 보도과장에게 소개했다. 그는 육군소장이었다. 얼마 후 그녀는 문제가 되었던 <조선의 딸> 과 대비되는 <동방의 여인들>이라는 시를 잡지 <신시대>에 발표하게 된다.

비단 치마 모르고/ 연지분도 다 버린 채/ 동아의 새 언덕을 쌓으리다./ 온갖 꾸밈에서/ 행복을 사려던 지난날에서/ 풀렸습니다./ 벗어났습니다./ 들어 보세요./ 저 날카로운 바람 사이에서/ 미래를 창조하는/ 우렁찬 고함과 / 쓰러지면서도 다시 일어나는/ 산 발자국 소리를/ 우리는 새 날의 딸/ 동방의 여인입니다.

나윤숙은 한 달 뒤 <매일신보>에 일본군의 싱가포르 점령을 격정적인 어조로 찬양하는 시 <호산나, 소남도>를 써 발표했다. 소남도는 일본이 붙인 싱가포르의 이름이고, 호산나는 그녀가 신앙했던 종교에서, 주님에게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호할 때 외치는 히브리어였다.

김수임에게는 나윤숙이 가진 당찬 면모들이 거의 없었다. 그녀는 교회에서 노래를 열심히 불러 아마추어로서는 상당한 가창력이 있었을 뿐 아니라 무용 실력도 좋았다. 그러나 그런 것은 좋은 직장을 잡는 데 전혀 소용이 되지 않았다.

혼인이력이 있는 그녀는 역설적이게도 교회 성탄절 연극에서 동정녀 마리아 역을 도맡아 했다. 당연히 그것 역시 이력서에 쓸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녀는 아름다워 보이고 평화롭게 느껴지는 것들을 유달리 좋아했다. 그러다 보니 춤과 노래를 주로 하게 된 것이었는데,  그것은 그녀의 나라에서 예로부터 기생이 갖추어야 하는 자질에 속했다.

그녀는 애정관에서도 나윤숙과 큰 차이가 있었다. 나윤숙은 자기에게 무엇인가를 줄 수 있는 남자들을 선택하여 사귀었지만 김수임은 달랐다. 그녀는 자기를 매혹시킬 수 있는 한 남자와의 사랑을 대책 없이 선망하고 있었다.

어려서부터 귀여운 외모로 능금이라는 별명을 얻은 그녀는 외모에 맞지 않는 불우한 환경과 성장 과정으로 인해 조금이라도 험해 보이는 일들을 외면한 반면, 아름답고 평화로워 보이는 일들을 무조건 동경하게 되었다. 이를 테면 평화로운 가정, 명문 학교, 외국 노래, 알프스 산정, 크리스마스캐럴 같은 것들에 그녀는 이유 없이 매혹되고는 했다.

그녀에게는 주소 하나만을 달랑 들고 경성의 선교사를 찾아가는 당찬 면모도 있었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기독교의 여호와에게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그녀의 기도는 정확하거나 실제적이지 않았고, 대체로 목사나 장로에게서 배운 내용을 추상적으로 재현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녀는 팔려갔던 집을 탈출하고 경성으로 향하는 완행열차에서도, "주여, 저의 육신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저를 인도하시고 주관하시되 오직 주님의 뜻대로 행하시옵소서"라고 추상적인 기도를 올렸다.

경성역에서 내려 북아현동까지 걸어 간 그녀는 외국인 집의 철제 대문 앞 돌계단에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너무도 배가 고팠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에 대문이 열리더니 대비를 든 청소부 아저씨가 나왔다.

"룰 목사님 댁 맞지요?"

김수임은 목사 부인이 주는 빵과 베이컨과 계란 프라이를 먹었다. 그것은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녀에게 준 첫 번째 선물이었다. 그녀는 다섯 살 아들과 여덟 살 딸을 키우는 서양 부인이 이 세상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소녀 김수임에게 미국인 선교사의 가정은 천국이나 진배없이 느껴졌다.

그녀는 룰 목사의 주선으로 이화고녀에 입학했고, 목사가 정년이 되어 자기 나라로 돌아가게 되자, 양딸을 원하던 올드미스 캐럴의 집으로 옮겨갔다. 이화여전 교수였던 캐럴은 김수임을 추천해 영문과에 무시험으로 입학시켰다. 그리고 그녀가 대학을 마치고 선교원에 취직이 되어 성공회의 기숙사로 입주하게 될 때까지 같이 살았다.

캐럴 역시 특이한 첫사랑의 이력을 지닌 여성이었다. 처음으로 만나 사랑이 막 싹텄을 즈음 철학을 전공했던 그 미국 청년은 어느 정신이상자가 난사한 총에 맞아 죽은 것이었다. 그로부터 캐럴에게는 어떤 남자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녀는 독신으로 늙어가고 있는 중이었다. 결코 범상하다고 할 수 없는 첫사랑의 전력을 지닌 캐럴과 김수임 두 여인은, 나이와 인종이 달랐지만, 사랑에 대하여 정상 이상의 환상을 품고 있다는 점에서 일맥 공통점이 있었다.

덧붙이는 글 |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의 실상과 이에 도전한 매혹적인 인간들의 삶이 펼쳐집니다.


덧붙이는 글 식민지 역사를 온전히 청산하는 데 기여하고자 쓰는 소설입니다. 제국주의의 실상과 이에 도전한 매혹적인 인간들의 삶이 펼쳐집니다.
#창씨개명 #김수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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