뜨거운 용암이 흐른다면? "백프롬돠!"

[자전거 세계일주113] 과테말라 파카야 화산에서 달걀 프라이

등록 2009.07.10 21:09수정 2009.07.14 16: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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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생생한 용암의 흐름을 본 적 있습니까? ⓒ 문종성


"뭘 그렇게 챙겨요?"
"화산에 가면 이게 하이라이트거든요."

법수 형은 야심 찬 미소를 지어 보이며 바리바리 짐을 쌌다. 반나절 코스 등산하는데 물과 과일, 비스킷 정도면 완벽한 하모니다. 하지만 아침을 걸러 출출했던 걸까. 그는 우스개 철학이 묻어나는 '삶은…계란', 삶은 계란을 챙겼다. 곁눈질로 한 번 훔쳐보고는 내심 태평한 척 우리를 안내해 줄 차를 기다렸다. '이따 배고프면 하나 달라고 해야지.'


따스함이 무르익는 부활절을 끼고 안티구아를 들르는 여행자라면 이 세 가지는 꼭 해 봐야 한다. 스페인어 공부, 세마나 산타 성상행렬 참관, 그리고 파카야 화산 등반이 그것이다. 다른 두 가지를 이미 경험한 나로서는 아직도 지구가 뜨거운 호흡을 내뿜는 곳, 내셔널 지오그래픽 화면에서나 만나볼 수 있는 살아 있는 대자연의 현장에 간다니 시작부터 기대가 되었다.

우리를 안내할 가이드는 여행사에 예약한 사람들을 도시 곳곳에서 태웠다. 햇살이 바로 머리 위로 올라갈 때쯤, 안티구아에서 차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곳에 안개 자욱한 산이 나타났다. 모두들 차에서 내려 나들이 나온 기분으로 흙길을 밟아나갔다.

화산재 사이로 흐르는 시뻘건 용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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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을 타면 산길을 쉽게 올라갈 수 있다. ⓒ 문종성


그 중 우리의 귀하신 몇몇 부르주아 서양 낭자들께서는 50케찰이라는 적지 않은 대가를 지불하고선 아이들이 끄는 말에 올라타 한가로운 산행을 즐겼다. 산행에 말이 무슨 조화람? 자고로 산행은 걸어야 제 맛!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희희낙락거리는 여인의 선견지명을 부러워할 수밖에 없었다. 2252m나 되는 산길이 경사가 심하고, 비까지 온 뒤라 미끄러운 게 그리 만만치 않았던 것이다. 다리가 후들후들, 시선이 어질어질. 역시 금권을 가진 자만이 평안을 누리는 세상의 적나라한 이치란! 


땀을 흘린 만큼이 내가 올라간 높이다. 스멀스멀 연기가 새어 나오고, 검은 화산재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오고 '급'흥분했다. 열기가 느껴지는 곳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화산재로 뒤덮인 행로를 10여 분 올랐을까. 마침내 정상에 다다랐을 때 탄성을 질렀던 입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용광로보다 더 선연한 붉은 악마의 향연. 넓고 조용한 강물의 흐름처럼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입을 크게 열어젖혀 제물을 바라는 듯한 화마의 음험한 열기를 느끼노라면 간담이 서늘해져 공포스럽기만 했다. 마치 저 속에 빠지면 기억조차 모두 녹아 없어질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말이다.

이 경이로운 장면을 모두들 멀리서 줌렌즈의 힘을 빌려 담아내느라 정신이 없었다. 하지만 나는 가야 했다. 용암의 생생한 입자들이 보고 싶었다. 마침 망원렌즈를 숙소에 두고 온 것도 결심을 부채질한 이유다. 내 뒤로 사람들이 격한 응원을 보내왔다. 하나, 둘, 셋 하면 뛰는 거다. 얼른 가서 사진 몇 장만 찍고 다시 탈출하는 거다. 나는 속으로 다짐하면서 뾰족이 솟아나온 화산재들을 피해 평평한 곳을 눈으로 미리 확인했다.

눈을 질끈 감고 연기 사이로 출발. 그러나 딱 세 발자국 옮기고 내 판단이 잘못됐다는 걸 눈치챘다. 열기 때문에 도저히 다가갈 수 없었다. 얼굴이 화끈거리고 신발 밑창이 녹아 들어갔다. 시야는 완전히 흐물거렸다. 밑을 보니 화산재 사이로 시뻘건 용암이 흐르고 있었다!

순간 왈칵 겁이 났다. 아니다 싶었다. 본능적으로 괴성을 지르면서 재빨리 뒤로 돌아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몸을 던져 날아왔다. 화생방 훈련 끝난 직후 바람을 가르는 그 느낌. 살았구나 싶었다. 사람들도 무모한 도전 앞에 다시 살아 돌아온 나를 환호하며 박수와 휘슬로 격려해 주었다.

패인을 분석하고 마음 매무시를 고쳤다. 화산재의 분포도를 보다 면밀히 관찰하고 좀 더 빠르게, 좀 더 안전한 곳으로 루트를 재조정했다. 그리고 다시 도전. 처음보다 호흡을 빨리 가져간 까닭에 용암 바로 10m 언저리까지 내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셔터를 누르고는 다시 영화 속 플래시맨으로 변신했다.

덕분에 번들렌즈치고는 제법 선명한 사진을 남길 수 있게 되었다. 내 무모함이 '콜럼버스의 달걀'이었는지 안전하고 재밌다는 판단이 서자 다른 젊은 친구들도 나처럼 따라 해 그 시간을 즐겼다. 자고로 불확실한 결과에 대한 결단이 어렵지 일단 뚫리면 대중적인 것이 된다.

화산재 위에 올려놓은 프라이팬, 그 결과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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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기가 익었는지 확인하는 한 여행자. 저 위로 붉은 용암이 보인다. ⓒ 문종성

그러나 구제불능 낙천주의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그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하나의 장치에 불과할 따름. 분출한 마그마를 따라 전혀 새로운 여행의 '맛'을 느끼러 온 부류들도 있었다.

산에 올라올 때 현지 아이들로부터 구입한 균형을 지탱하던 막대기가 있었다. 그런데 몇몇 여행자들은 막대기에 쇠꼬챙이를 끼우더니 끝에 베이컨을 달아 화산재 사이로 흐르는 용암 위에 올려놓는 것이 아닌가. 몇 분이 지나자 고기는 지글지글 익고 있었다.

갑자기 여기저기에서 프랑크 소시지와 햄이 나오고 소풍 모드로 돌변했다. 이런 방법이 있었구나. 단세포처럼 화산 볼 생각만 했던 내게 이 장면은 충격으로 다가왔다.

이때 회심의 미소를 짓던 법수 형. 그는 가방에서 프라이팬을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달걀도 같이 꺼냈다.

"후후 종성씨, 요거 날계란이에요."
"그래요? 이걸 어떻게 하시게요?"
"어떡하긴요. 프라이팬에 구워 먹어야죠."

캬, 이것이 바로 창조적 여행의 진수. 대부분 고기를 가지고 온 서양 여행자들 사이로 법수 형은 아예 계란 프라이 준비를 해 가지고 온 것이다. 숙소에서 프라이팬까지 빌려가면서. 게다가 소금까지 곁들이는 건 경탄을 금치 못할 발상이었다. 용암 위에 프라이팬을 얹어놓고 계란프라이를 먹자니 입 안에 군침이 차 올랐다.

계란프라이를 준비하는 법수 형을 보면서 이럴 줄 알았으면 마른오징어나 가지고 올 걸 하는 후회가 밀려 들어왔다. 뚤룸 유적지를 기억한다. 피라미드에 오면서 비키니 수영복을 챙겨 천혜의 해수욕장에서 파도를 즐기던 서양 여행자들. 그처럼 정보력에 차이가 여행의 질적인 차이를 만들어 낸다.

이 놀랍고도 생생한 자연의 광대함 위에 쪼그리고 요리를 하는 여행자들. 정말 멋지지 않은가! 베이컨 맛이 좋은지 덩어리 한 조각을 몇 사람이 나눠 먹고는 왁자지껄 수다를 뱉어낸다. 하지만 우리의 계란프라이는 어찌 된 영문인지 제대로 익을 기미가 안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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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산재 아래 흐르는 용암의 열기로 달걀프라이를 시도하는 법수 형. ⓒ 문종성


'아차, 식용유를 안 챙겨왔군.'

계란이 프라이팬에 비릿한 반액체로 그대로 남아 있었다. 10여 분 간 용암 위에서 갖은 방법을 도모해 봤지만 끝내 염원에 이르지 못하고 정상까지 따라온 개에게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건네고 말았다. 지나가는 다른 여행자들도 호기심을 가지고 바라봤지만 실패로 끝나자 자기 일처럼 아쉬워했다. 그래도 시도는 좋았다.

우리는 대신 과일을 우걱우걱 씹어 먹으며 일몰시간의 화산을 하염없이 바라봤다. 이처럼 어둠을 틈 타 살아 있는 붉은색이 하늘과 조화를 이뤘던 적이 있었던가. 언제 다시 이렇게 지구의 뜨거운 호흡을 가까이서 볼 수 있을까.

생각해 보니 초등학교 자연 시간에 배운 마그마. 그 마그마가 계속 분출하는 화산에서 계란프라이를 할 생각을 다 하다니. 한낱 해프닝으로 끝났지만 우리는 자위했다. 간편하게 조리할 수 있는 소시지나 베이컨을 챙겨 온 다른 사람들보다 더 기발한 도전을 했노라고.

만약 한 번 더 기회가 주어진다면 그땐 물과 라면을 가지고 와 '뽀글이'를 해 먹겠노라고 뜨겁게 흐르는 용암에 대고 약속했다. 그리고 내 뒤를 따라 파카야 화산에 가는 여행자에게 꼭 조언해 주고 싶다. 최소한 마른오징어라도 챙겨가라고. 그리고 은박지에 치맛살이라면 당신은 센스만점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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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암 위를 뛰어 다녔더니 신발이 다 녹아버렸다. 투어가 끝난 뒤 하는 수 없이 버렸다. 아디오스! ⓒ 문종성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덧붙이는 글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과테말라 #자전거여행 #세계일주 #안티구아 #파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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