펑크 4번에 날라리 수도자가 되다

[자전거 세계일주115] 과테말라시티(Guatemala city)

등록 2009.07.16 09:33수정 2009.07.16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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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려라 로페카(Ropeca)! 중앙 아메리카 도로는 도시를 제외하고는 상태가 그리 좋지 못하다. 유명한 판아메리카 하이웨이마저도 군데군데 도로가 꺼진 곳이 있을 정도다. ⓒ 문종성


과테말라시티에서 사흘을 푹 쉬고 떠나는 날. 칙칙한 도시를 벗어나 바람과 햇살과 풀내음으로 어우러진 자연을 마주하는 일상은 자전거 여행의 소소한 기쁨이다. 행선지를 남쪽 바닷가에 위치한 작은 마을로 정했다. 그간 멕시코에서부터 산을 타는 것이 지겹기도 했거니와 오랜만에 다운힐의 감흥에 젖어보고 싶었다. 시원한 쪽빛 바다를 구경하며 답답한 가슴을 펼쳐보는 것은 덤.

운명이라는 보자기에 담겨진 수많은 길 위의 '다음 이야기'는 오직 하늘만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하나 조심스레 꺼내보는 에피소드는 늘 긴장과 기대로 교차된다. 하지만 신은 오늘 나를 단단히 연단시킬 모양이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참을성에 관해 말이다. 


오후에 일이다. 한창 내리막을 달리다 언덕 중간에 위치한 주유소를 발견했다. 보통 내리막 도로에는 과속 방지턱이 있기 마련이다. 한적한 도로라 인도가 없으므로 그 길을 자전거도 동일하게 지나야 한다. 이곳은 속도를 줄이면서 '드르르륵' 한 두 바퀴 진동으로 통과하는 맛이 있다.

하지만 어찌된 영문인지 과속 방지턱을 지나고도 자전거는 딸깍 거리며 안장이 미세하게 요동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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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프레소 커피 과테말라에 와서 잘 안 마시던 커피를 일주일 간이나 마시게 됐다. 재미있는 건 콜롬비아, 자메이카, 파나마, 코스타리카 모두 자기네 커피가 동급 최강이란다. 물론 자부심을 가질만한 맛이다. ⓒ 문종성


'펑크구만.'

본능적으로 느끼는 몸의 감각은 놀랄 만큼 정확하다. 어디 한두 번 겪었어야 말이다. 자전거를 거꾸로 세워 놓고 타이어를 살펴보자 과연 철사가 박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대관절 이 철사조각은 어디에서 떨어진 걸까. 도로 사정과는 별개로 시도 때도 없이 도로 바깥으로 마시고 난 캔맥주 깡통부터 건축 폐기물까지 온갖 쓰레기를 내다 버리는 운전자들을 보아 왔다. 그러니 도로를 공유하는 것 중 가장 약자인 자전거 타이어가 가장 심한 생채기를 남긴다.

숙달된 기술로 쉽게 펑크를 때웠다. 땀을 씻고, 시원한 물 한 모금 들이키고는 다시 다운힐을 즐겼다. 하지만 가끔 시련은 가혹하리만큼 몰아친다. 몇 십 분도 채 되지 않아 이번에는 날카로운 돌에 걸리면서 또 펑크가 나 버렸다.


펑크라는 게 원래 한 번에 '펑' 터지는 것과 조금씩 바람이 빠지는 두 부류가 있는데 두 번째 펑크는 전자의 경우였다. 이것은 때론 위험하다. 갑자기 바퀴가 균형을 잃으면 핸들로 컨트롤하기 난감하기 때문이다.

다시 타이어를 벗겨 내고 튜브를 보니 긁힌 자국이 선명했다. 타이어가 낡은 까닭이다. 지독한 짠돌이 여행자는 벌써 몇 달 째 수천 km를 오는 동안 같은 타이어를 쓰고 있었다. 그것도 멕시코에서 단 돈 5달러 주고 산 싸구려 타이어였다. 

이런 불상사를 대비해 예비 타이어를 두 개씩 챙겨 다녔다. 중남미 거친 도로를 미주했을 때부터 알아 본 것이다. 타이어와 튜브를 새로 교체했다. 아무리 저렴한 타이어라도 새 것이라 빛이 나는 것이 묵은 때를 벗기는 느낌이었다. 이제 당분간 다운힐로 들떠 있는 나를 자극시키는 일은 없으리라.

솔직히 급하고, 참을성 없기론 둘째가라면 서운할 나다. 스스로 답답한 건 아마도 정작 급할 때 여유의 호기를 부리고, 여유를 부려도 좋을 상황에 마음만 급해 일을 꼬이게 만드는 청개구리 심보다. 여행하면서 모난 부분들이 점점 다듬어지고는 있지만 여전히 자기절제는 어렵다.

그런데도 두 번의 펑크 속에서 가까스로 여유를 찾아내고야 말았다. 다행히 계속해서 평지나 내리막이었기 때문이다. 30km를 한 시간 만에 주파하니 평소 속도의 두 배인 셈이다. 그러나 세 번째 부터는 곤란하다. 슬슬 끓어오르는 노기를 적당히 가라앉히는 적정선은 여기까지다. 감정의 만재홀수선을 넘어가면 그 날 하루는 버려지는 날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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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란 대나무가 이채롭다. 대나무는 다년생 초본과다. ⓒ 문종성


하지만 시련이 어디 사람과 상황을 가리던가. 마지막 언덕을 넘어 저 멀리 어슴푸레 바다가 보일 때였다. 자전거는 또 한 번 도로와 심하게 마찰을 일으켰다. 참 잔인한 순간이었다. 펑크가 났다는 사고 때문이 아니다. 다시 자전거 짐을 다 풀어헤치고 수리하고 또 세팅 하는 게 여간 귀찮지 않기 때문이다.

타이어는 쪼그라든 할머니 가슴만치 푹 꺼져 버렸다. 어떻게 감정을 컨트롤 할까 아주 잠깐 고민하는 사이 바라본 물비늘에 비친 햇살이 유난히도 눈부셨다.

'휴…. 다 왔네. 한 번 더 고치고 내려가지 뭐.'

뾰족한 증거물을 찾지 못한 채 실눈 같은 구멍만 나 있는 튜브를 패치로 막으면서 의외로 차분한 나에게 스스로도 놀랄 정도였다. 평소 같으면 단 한 번의 펑크에도 일단 혼잣말로 짜증이 튀어나오기 때문이다.

긍정의 힘이나 적극적 사고방식 같은 유치한 심리가 아니라 정말로 내 안에 깊은 평안이 밀려든 듯 했다. 마치 번지르르한 속 빈 신앙의 외투만 두른 나약한 인간에게 '절대 감사'를 시험해 보려는 하늘의 테스트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왠지 분노에 대한 미련이 없었다. 다만 속 좁은 청년 하나 오늘만큼은 마음 밭을 곱게 갈았다는 멋쩍은 웃음이 나왔다.

그 날 저녁, 마을 외곽 소방서 2층에 아직 다 완공되지 않은 건물로 올라갔다. 그리고는 먼지 수북이 쌓인 창고 한 켠을 허락받아 텐트를 치고 잠을 청했다. 그런데 다음 날 아침 출발하려고 보니 자전거 타이어는 또 펑크가 나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텐트 바닥천도 일부 찢어져 버렸다. 아마도 거친 곳에서 잠을 청한 까닭에 위험할 수 밖에 없었던 건축 자재 때문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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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 과테말라 아이들. ⓒ 문종성


순간 "아, 이 죽일 놈의 빵꾸!"라고 역정을 내려다 급히 마음을 고쳐먹었다. 마치 수도자가 된 착각처럼 어제의 감정을 선연히 기억해 냈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새 튜브를 갈면서 타이어에 대고 애걸했다.

"왜 그래? 우리 사이에. 좀 봐주라. 솔직히 요고 타고 가는 것도 힘들어 죽겠다."

우연인지 몰라도 다음 펑크는 과테말라 국경을 넘고서 발생했다. 거친 도로사정과 싸구려 타이어 때문에 자연 펑크는 날 수밖에 없다. 그러니 최대한 선심 쓴 듯 보였다. 안타까우면서도 다행이라는 묘한 감정의 굴곡. 연달아 발생하는 펑크는 나를 날라리 수도자로 만들었다. 침묵 속에 인내와 짜증 사이를 아슬아슬 줄타기를 하면서. 

'이것마저도 감사하라는 신의 계시인가.'

시련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낳는다고 했다. 긴 여정을 떠나는데 이까짓 어려움에 마음 뺏기지 말자고, 더 큰 감동을 위한 변장된 축복이라고 생각하면서 다음 나라를 향해 또 지루한 라이딩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펑크를 특별한 사고가 아닌 일상으로 받아들이고 나자 아주 보드라운 여행의 음률을 다시 느낄 수 있게 되었다.

덧붙이는 글 |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덧붙이는 글 필자는 현재 '광야'를 모토로 6년 간의 자전거 세계일주 중입니다. 저서 <라이딩 인 아메리카>(넥서스 출판)
세계 자전거 비전트립 홈페이지 http://www.vision-trip.net
#과테말라 #세계일주 #자전거여행 #중남미 #세계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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