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임 첫 날 어김없이 비명횡사, 이유가...

[노래의 고향 35] 아랑 죽은 사건과는 무관한 밀양아리랑

등록 2013.02.13 11:37수정 2013.02.14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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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하면 떠오르는 상징적 풍경을 보여주는 사진. 영남루가 보이고, 영남루와 강(밀양강) 사이의 아랑이 죽은 숲도 보인다. 오른쪽의 봉우리가 밀양읍성 유적이다. 봉우리 가운데쯤 숲 사이로 무봉사 지붕이 살짝 드러나 보인다. ⓒ 정만진


조선 명종(1545∼1567) 때 한양의 관리들은 밀양부사로 발령이 날까봐 숨을 죽였다. 만약 밀양부사로 부임하라는 왕명을 받는다면 그날로 죽은 목숨이 되기 때문이다. 벌써 몇 명인가! 밀양부사 부임 첫날  원인도 알 수 없게 죽어버린 사람이!

부사가 부임해오면 밀양부의 관리들은 곧장 장례 준비를 했다. 내일 아침이면 신임 부사가 주검으로 발견될 게 자명하므로, 관리들 입장에서는 사전에 이런저런 필요 물품들을 갖추고 여기저기 연락할 준비를 해야 마땅했다.


부임 첫날 어김없이 비명횡사하니 모두들 밀양 부사 사양

당연히 조정은 후임 밀양부사를 구할 수 없었다. 아무리 왕명으로 발령을 내어도 당사자들이 일부러 제 다리를 부러뜨린 뒤 중상으로 임지에 갈 수 없다고 버티는 데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그렇다고 부사 자리를 계속 공석으로 놔둘 수도 없는 노릇, 결국 자격 제한 없는 완전 개방형 공모를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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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루 뒤편, 강으로 내려가는 비탈진 숲 사이 아랑의 사망 지점에 그녀를 기려 세워진 비석이 어쩐지 처량하다. ⓒ 정만진


붓 장사를 하고 있던 이아무개라는 젊은이가 배짱좋게 밀양부사로 부임하게 되었다. 신임부사 임명장을 들고 밀양부 관사에 도착해보니, 관리들이 부산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일 아침 자신이 죽었을 때를 대비해 미리 장례 준비를 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윽고 밤이 왔다. 신임 부사가 비록 남달리 담대한 성격의 젊은이기는 했지만 그리 쉽게 잠이 오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리저리 뒤척이고 있었다. 내심으로는 뜬눈으로 밤을 새어봐야 전임 부사들의 사망 원인이라도 알고 저승으로 갈 것 아니냐는 판단도 했었다.

붓장사 하던 간 큰 젊은이, 완전 개방형 밀양부사 자원


그때 갑자기 사방으로 문이 열리고 싸늘한 회오리바람이 불어닥치더니 시커먼 머리카락을 수양버들처럼 풀어헤친 귀신이 나타났다. 으흐흐흐, 웃는 듯 우는 듯한 소리가 천정에서 방바닥까지 가득 메웠다. 문득 부사는 심장이 멎는 듯했다. 꿈인가? 아니다. 결코 아니다. 그런데 이게 무슨 일인가? 까무러칠 것 같이 몰려오는 심장마비 증세 앞에서도 부사는 생각의 끈을 놓지 않았다. 전임 부사들이 이렇게 죽어갔구나! 그는 정신을 모으고 힘을 결집하여 단말마처럼 외쳤다.

"썩 물러가지 못할까!"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귀신이 갑자기 무릎을 꿇더니 눈물을 주르륵 흘리기 시작했다.

"사또! 저는 원통하게 죽은 것이 한이 되어 저승으로도 가지 못하는 채 구천을 맴돌고 있는 귀신입니다. 신임 사또가 부임해올 때마다 원한을 풀어달라고 애원하려 했으나 저를 보는 순간 모두들 바로 돌아가시니 호소할 겨를도 없었습니다. 지금 사또께서는 정신일도하시어 저를 맞이하시니 오늘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신원의 기회를 맞이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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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을 기리는 사당으로 들어가는 문 ⓒ 정만진


아랑은 본래 밀양부사의 딸이었다. 책읽기 좋아하고 용모 단정한데다 지체 높은 집 규수였으므로 모든 청년들의 흠모 대상이었다. 그러다 보니 관청에서 잔심부름을 하는 통인 하나도 남몰래 그녀에게 반해 있었다. 하지만 신분 차이 등 그녀는 그저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그런데도 그 통인은 포기할 줄을 몰랐다. 통인은 아랑의 유모에게 뇌물을 주어 음력 4월 16일 달밤에 아랑이 영남루 아래로 나오도록  해달라고 부탁했다.

"나는 아랑과 말 한 마디만 주고받을 수 있다면 죽어도 소원이 없는 사람이오. 유모는 보름달 보러 가자면서 아랑을 영남루 아래로 모셔 오시오. 그리고 내가 청소를 하다가 마주친 양 몇 마디 말을 걸 동안만 잠깐 자리를 비켜주면 되니 아주 마음을 놓으시오."   

그래서 깊은 밤에 아랑은 통인 사내와 단 둘이 마주치는 상황에 놓였다. 사내는 아랑에게 마음을 고백했지만 그게 받아들여질 리는 만무한 일이었다. 결국 사내는 아랑을 겁탈하려다가 뜻을 이루지 못하자 뒷날 탄로날 것이 두려워 그녀를 죽이고 말았다. 그리고는 밀양강 자갈밭에 그녀의 시신을 묻었다.

아랑을 짝사랑한 통인, 그녀를 살해하여 강가에 암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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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에서 영남루로 올라가는 진입로 왼쪽의 계단 위에 아랑을 기리는 사당 아랑각이 세워져 있다. ⓒ 정만진

다음 날 이후 아랑의 부모는 사방천지로 사람을 보내고 통문을 날려 딸을 찾았지만 끝내 행방을 알 수가 없었다. 세월이 흘러 부모는 다른 지방으로 옮겨갔고, 신임 부사들이 발령을 받아왔다.

이때부터 아랑의 혼령이 관아를 찾아왔다. 신임부사에게 자신의 원한을 갚아달로는 호소를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신임부사들은 산발하고 흐느끼는 아랑을 보는 순간 모두들 죽어버렸다.

아랑의 말을 다 들은 신임 부사는 날이 새는 길로 통인과 유모를 잡아들여 문초했다. 지금껏 들키지 않은 것을 믿고 둘은 무죄를 주장했지만, 부모도 끝내 찾지 못한 아랑의 시신을 지역에 아무런 연고도 없는 신임 부사가 밀양에 당도한 바로 다음날 찾아내고, 사건 당일 범죄자의 행적과 주고받은 말까지 빠짐없이 알고 있는 데에는 도리가 없었다.

부사는 두 죄인의 목을 베어 거리에 내걸었다. 이후 밀양 사람들은 아랑의 영혼을 위로하여 노래를 불렀다. 노래의 이름은 '아랑가'. 가사는 대략 아래와 같이 전해져 오고 있다.

송림 속에 우는 새 처량도 하다
아랑의 원혼이 네 설워 우느냐
영남루 비친 달빛 교교한데
남천강 말없이 흘러만 간다
채색으로 단청된 아랑각은
아랑의 유혼이 깃들어 있네

현지 사람들은 뒷날 이 노래의 제목을 '아리랑'이라 바꿔 부르게 된다. 어째서 그렇게 이름이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설화 속 인물의 이름인 '아랑'과 노래의 후렴 '아리랑'의 음이 비슷한 데에 그 까닭이 있지 않을까 추정된다. 

경쾌한 곡조 특이하고, 아랑 사건과 무관한 내용의 밀양아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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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랑을 기리는 사당 안에 걸려 있는 그녀의 초상 ⓒ 정만진

그런데 세월이 흐르자 아랑의 이름이 여러 번 반복되는 본래의 '아랑가'보다 아래의 노래가 '밀양 아리랑'으로 더 유명해졌다.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날 좀 보소

동지섣달에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
정든 님이 오시는데 인사도 못 해
행주치마 입에 물고서 입만 방긋
다 틀렸네 다 틀렸네 다 틀렸네
가마 타고 시집 가서 다 틀렸네

굳이 불러보지 않고 가사만 보아도 이 노래는 죽은 아랑과 무관하다는 사실이 직감된다. '아랑가'와는 달리 이 노래의 가사는 어느 대목에도 아랑의 안타까운 사연을 담고 있지 않다. 게다가 곡조는 얼마나 경쾌한지, 그 많은 아리랑 노래들 중에서는 물론이고 '한(恨)의 민족'이라는 우리 겨레의 무수한 민요들 중에서도 가볍고 빠르기로는 단연 압권이다.

아랑가는 조금 낯설고, 그 대신 밀양아리랑은 가사와 곡조가 입에 익어 있으니, 만약 어떤 나그네가 영남루 위나 아랑각 앞에서 진혼곡으로 노래 한 자락을 읊는다면 대부분 밀양아리랑을 부르리라.

그러나 가사의 뜻과 곡조가 죽은 이의 영혼을 위로하는 데 어울리지 않아 노래를 부르면서도 어쩐지 아랑에게는 미안한 마음을 금할 수 없게 되리라. 나 역시 그런 생각에 젖어, 아랑각 그녀의 초상 앞에 선 채 잠깐 침묵에 빠진다. 

밀양 영남루 일대의 문화유산 답사

아랑의 흔적을 찾아 경상남도 밀양을 방문, 이윽고 영남루 경내로 들어선다. 왼쪽의 웅장한 누각이 눈길을 끈다. 평양 부벽루, 진주 촉석루와 더불어 우리나라 3대 부각으로 이름을 날렸던 영남루 건물이다. 보물 147호.

영남루가 남다른 것은 답사자들에게 완전 개방되어 있다는 점이다. 특히 여름철에 가보면 누각 위에는 밀양 시민들이 모래알만큼 많이 올라 앉아 흘러가는 밀양강의 풍치를 바라보며 피서를 만끽하고 있다.

조선 시대만 해도 영남루는 전국적으로 내로라하는 시인 묵객들이 풍류를 즐겼던 곳인데, 이렇게 많은 일반 시민들이 올라 있다니! 그저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도 그 인파가 답답하지 않고 시원하게 느껴지니 그것이 기이하다.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밀양강 일대의 시원한 경치를 한번 바라보게 되면 누구나 이 영남루가 어째서 우리나라의 3대  비각으로 칭찬받게 되었는지를 실감할 수 있으리라.

영남루와 마주보고 서 있는 건물은 천진궁이다.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117호인 천진궁은 1665년(현종 6)에 지어진 건물로 1957년 대대적인 중수를 거쳤는데, 단군은 물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부여 발해 고려 조선의 시조를 모시고 제향하고 있다. 안내판은 '이 건물은 건축학적 가치에 앞서 일제가 조선 왕조의 정통성을 말살하기 위해 역대 시조의 위패를 땅에 묻고 감옥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민족의 수난사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고 설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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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양 영남루. 1층 기둥 사이로 밀양강이 보인다. 보물 147호. 아랑은 이 누각의 뒤편 왼쪽 비탈에서 죽임을 당했다. ⓒ 정만진


영남루와 천진궁 사이의 너른 마당을 걸어 끝까지 오면 오른쪽으로 내려가는 작은 문이 나온다. 아랑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그녀가 죽은 자리에 세운 비석과 사당(아랑각)으로 안내하는 협문이다. 이 둘은 1930년 영남루를 중수할 때 함께 세워졌다.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26호인 아랑의 비와 사당의 위치는 영남루 뒤편인데, 밀양강으로 내려가는 가파른 내리막길의 중간쯤에 자리잡고 있다.

아랑각에서 다시 올라와 산비탈을 끼고 오른쪽으로 걸어 들어가면 아득하게 강을 내려다보는 자리에 무봉사가 있다. 무봉사에는 통일신라 때 작품으로 여겨지는 석조여래좌상이 있다. 보물 493호.

무봉사에서 돌아나와 사찰 뒤편 봉우리로 올라가는 산길을 걷는다. 산길의 초입은 계단이다. 계단 바로 아래에서 '밀양 아리랑' 비석을 본다. 노래비에는 '아랑가'가 아닌 '밀양아리랑'이 새겨져 있다. 조금 더 올라가니 산성에 이르는 중간 지점에 사명대사 동상도 있다.

동상을 오른쪽에 두고 말끔하게 정비된 산길을 따라 걸으면 금세 경상남도 기념물 167호인 밀양읍성의 성곽이 보인다. 하늘을 머리에 이고 있는 성곽 너머로는 절벽과 강물이 펼쳐진다. 그레서 밀양강을 옛날 사람들은 해천(垓川)이라 불렀다. 밀양강이 해자 역할을 했다는 의미다. 바람이 불지 않아도 성곽 위를 걸으며 저 멀리 내려다보는 밀양강의 풍경은 정말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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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루 왼쪽 성터에서 바라본 밀양 시가 ⓒ 정만진


#밀양 #영남루 #아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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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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