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곧 하늘이다"

[노래의 고향 36] 경주 용담정

등록 2013.02.27 11:21수정 2013.02.27 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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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초상 용담정 안에서 보는 수운 ⓒ 정만진

동학을 창시한 수운 최제우는 '사람이 곧 하늘(人乃天)'이니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事人如天)'고 가르쳤다. 그의 '인내천'은 만민 평등의 철학이었다. 양반과 상민을 엄격히 구분하던 시대에 모든 사람은 평등하다고 부르짖었으니 수운의 사상은 그야말로 혁명적이었다.

수운의 주장은 서학(西學)에 대비되는 사상이기도 했다. 그는 체포되어 심문을 받을 때 "내가 주장하는 도는 천도(天道)다. 동에서 일어나 동에서 배우니 동학(東學)"이라며 기독교와 대립각을 세웠다. 동학이라는 이름의 유래를 말해주는 이 일화는 동학농민혁명이 외세를 배척하는 성격을 띤 연유를 말해준다.


9편의 가사를 남긴 수운 최제우

수운은 9편의 가사를 남겼다. 종교적 교의를 담고 있는 이 노래들은 수운 자신과 가족을 둘러싼 내용의 <용담가><안심가><교훈가><몽중노소문답가(夢中老少問答歌)>와, 제자들의 수도를 돕기 위한 교육적 내용의 <도덕가><도수사(道修詞)><권학가><흥비가(興比歌)>로 크게 나눠진다. 1860년 4월 5일 도를 깨달은 수운은 자신의 사상과 감정을 정리하여 포교용으로 이 가사들을 썼는데, 뒷날 책으로 엮어지면서 <용담유사>라는 제목을 얻게 된다.

9편의 가사 중에서 가장 특이한 노래는 <검결(劍訣)>이다. <검결>은 수운의 순교 이후 혁명적 기세가 드센 이 노래를 부르면 관의 지목을 당했기 때문에 동학 교도들이 부르기를 기피하여 <용담유사> 간행시 수록되지 않았다. <검결> 한 대목을 잠깐 읽어본다.

"시호시호(時乎時乎) 이내시호(時乎) 부재래지(不再來之) 시호로다! 만세일지(萬世一之) 장부로서 오만년지(五萬年之) 시호로다! 용천검(龍泉劍) 드난 칼을 아니 쓰고 무엇하리? 무수장삼(舞袖長衫) 떨쳐입고 이칼저칼 넌즛들어 호호망망(浩浩茫茫) 넓은천지 일신(一身)으로 빗겨서서, 칼 노래 한 곡조를 시호시호 불러내니, 용천검 날랜 칼은 일월(日月)을 희롱하고, 게으른 무수장삼 우주에 덮혀있네. 만고명장(萬古名將) 어데있나 장부당전(丈夫當前) 무장사(無壯士)라.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신명(身命) 좋을시고!"

<검결>이 수운의 9편 가사 가운데서 유난히 성격이 다르다는 사실을 재확인하기 위해 1860년 작품인 <용담가(龍潭歌)>의 일부를 읽으며 비교해본다. 지어진 당시에는 노래였지만 지금은 가사가 생명을 다한 시대이므로 어쩔 수 없이 읽게 된다.


"좋을시고 좋을시고 이내신명 좋을시고 구미산수 좋은 풍경 아무리 좋다 해도 내 아니면 이러하며 내 아니면 이런 산수 이 동방 있을소냐. 나도 또한 신선이라 비상천 한다 해도 이내선경 구미용담 다시보기 어렵도다. 천만년 지내온들 아니 잊자 맹세한들 무심한 구미용담 평지 되기 애달하다."

역시 <검결>과는 내용이 사뭇 다르다. 물론 <검결>과 <용담가> 중 어느 결의 노래를 좋아하는가는 순전히 독자의 취향 문제다. 그러나 동학 교도들이 수운의 가사를 모아 책으로 엮어내면서 제목을 <용담유사(龍潭遺詞)>라 붙인 까닭은 주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용담유사>의 '용담'은 최제우 자신을 지칭

<용담유사>는 <포덕문>과 더불어 수운이 천도(天道) 득도 후 저술한 동학의 기본 경전이다. 여기서 용담은 수운 자신을 지칭한다. 그러므로 '용담유사'는 '수운이 남긴 가사' 정도의 뜻이다. '유사'란 말이 덧붙은 것은 책의 제목을 수운이 직접 붙이지 않고 후세에 명명되었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용담은 경주시에서 서북쪽으로 10킬로미터 정도 지점에 솟아 있는 구미산(龜尾山) 계곡이다. 이곳에서 수운은 득도를 했고, 포교를 시작했으며, 체포되기도 했다. 그러므로 동학의 발원지이자 성지인 용담은  수운의 가사집 제목으로 선택될 만한 종교적 의의를 지닌 두 글자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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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제우 유허비 생가터에 가면 유허비를 볼 수 있다. 경주시는 현곡면 가정리의 이곳을 복원할 계획이다. ⓒ 정만진


수운의 아명은 복술(福述)이었다. 뒷날 세상의 어리석음[愚]을 구제(濟)하겠다는 의지로 이름을 스스로 제우(濟愚)로 바꾸었다. 다만 성씨만은 최씨로 그냥 두었다.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의 가난한 양반가 선비 최욱과 재가녀 한(韓)씨의 아들로 태어났으니, 미루어 짐작해도 최제우는 경주 최씨다.

최제우는 서자였다. <홍길동전>에 나오는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고' 하는 대목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당시는 적서 차별이 엄연한 시대였다. 그러므로 최제우는 관직을 갖기 힘들었다.

서자 출생 최제우, 세상을 떠돈 끝에 용담정에서 득도

뿐만 아니라 6세 때 생모가 죽고, 17세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났다. 3년상 후 수운은 유랑길에 오른다. 세상을 떠돌아다니던 그는  1859년 경주로 돌아와 수련생활을 하게 되고, 이듬해 용담정에서 도를 깨달아 동학을 창설한다.

용담정 건물은 경주시 햔곡면 가정리의 '동학 성지'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자리잡고 있다. 물론 수운 생존시에 존재했던 건물은 아니고 1975년에 지어진 것이다. 하지만 수운이 한울님과 만나 득도를 했고, 동학을 창시한 종교적 성지이니 아니 가볼 수 없다. 성지 입구 주차장에 차를 세운 뒤 수운 동상 앞에서 잠깐 묵념을 하고는 왼쪽으로, 또 왼쪽으로 길을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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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담정 용담정은 경주시 현곡면 가정리의 '동학 성지' 중에서도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용담정은 수운이 도를 깨친 후 동학을 창시한 곳이자, 그가 관군에게 체포된 곳이기도 하다. 사진의 건물은 1975년에 지어진 것이다. ⓒ 정만진


이윽고 용담정 일대에 닿으면 "신선이 다시 온다 해도 구미 용담 같은 경치는 보기 어려울 것"이라는 취지의 <용담가> 구절이 문학적 과장이 아니라 자연적 사실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기이한 봉우리와 괴석들이 골짜기를 사방으로 에워싸고 있고, 용추의 맑은 물이 흐르고 흘러 나그네의 눈을 시리게 한다. 용담정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

수운은 이곳에서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던 중 철종의 붕어로 대구로 돌아와 1864년 3월 10일 관덕당(觀德堂) 아래에서 참수된다. 하지만 용담정 안의 수운 본인은 자신의 참혹한 최후에 전혀 연연하지 않는 듯, 아주 자비로운 표정으로 나그네를 그윽하게 바라보신다. 나의 귀에는 수운이 "사람이 곧 하늘"이니 "사람을 하늘처럼 섬기라"고 말하는 목소리가 생생하게 들려온다. 그의 음성은 구미산 바람소리와 용담 계곡 물소리만큼이나 맑고 시원하다. 

유허비 있는 생가는 복원 계획, 묘소는 가 볼만

수운 생가는 현재 남아있지 않다. 그러나 생가터에는 유허비가 세워져 있어 찾아온 이의 마음을 달래준다. 수운의 묘소는 이 유허비를 등지고 남쪽으로 도로 너머를 응시할 때 바라보이는 구미산(542m) 중턱에 있다. 천도교에서 '태묘'라 부르는 수운 무덤은 묘역 입구까지 차량이 오를 수 있어 누구든지 참배할 수 있으니 역시 그는 살아서나 죽어서나 만민 평등을 실천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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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묘 천도교도들이 '태묘'라 부르는 최제우 묘소. 묘소에서 정면으로 내려보이는 곳이 수운 생가터가 있는 마을이다. ⓒ 정만진


#최제우 #용담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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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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