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코드'가 이리 잘 팔릴 줄 아무도 몰랐다

[노래의 고향 39] 유행가 <사의찬미>와 <황성옛터>

등록 2013.05.07 16:40수정 2013.05.07 16: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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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음반(부산근대역사관 전시품) ⓒ 부산근대역사관


유행가는 레코드의 존재를 전제로 한다. <황성신문> 1899년 3월 13일자 보도를 보면 한국에 유성기가 처음 상륙한 것은 1899년의 일이었다. 하지만 1926년경까지 축음기와 레코드는 부유층의 재산 목록에나 속하는 아주 고가의 귀중품이었다.

따라서 축음기와 레코드에 실려 대중들에게 전파된 최초의 노래는 아직 유행가가 아니었다. 판소리, 잡가 등이 먼저 레코드에 실려 공중을 탔다. 1913년 당시 레코드는 '소리판'으로 불렸고, '소리 넣는 사람'은 당대 명창들인 송만갑, 박춘재, 정정렬, 김창룡, 김창환, 김연옥, 조목단 등이었다.


이 축음기와 레코드가 한국 땅에서 상품 가치를 인식시킨 것은 '가요사상 최초의 인기곡'으로 기록된 윤심덕의 <사의 찬미>였다. 이 노래의 성공을 본 일본의 레코드 자본들은 크게 고무되었다. 그들은 한국에서 유행가 사업이 성공할 것을 간파, 앞다투어 한국 땅에 상륙했다.

식민지 수탈 목적으로 시작된 유행가 산업

본격적으로 한국에서 레코드 산업을 펼치기 시작한 것은 빅터 레코드와 콜롬비아 레코드사였다. 1927년과 1928년에 각각 유행가 사업을 개시한 두 회사는 모두 일본 땅에 본점을 둔 일본인 회사였다. 우리나라의 유행가 산업은 처음부터 식민지 지배의 경제 수탈 과정으로 시작되었던 것이다.

<사의 찬미>의 성공은 레코드의 존재가 뒷받침해준 응원의 덕분이기도 했지만, 그 노래에 얽힌 정사 사건에 힘입은 결과이기도 했다. 노래를 부른 윤심덕은 일본에서 귀국하는 길에 유부남 애인 김우진과 함께 현해탄에 몸을 던져 동반 정사하였다. 이 사건은 당시 한국 대중들에게 크나큰 흥미를 던져주었고, 가수 윤심덕이 1926년 8월 3일 죽은 이후에야 한국땅에 들어온 <사의 찬미>는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게 되었다.

광막한 황야에 달니는 인생아
너의 가는 곳 그 어디메냐
쓸쓸한 세상 험악한 고해(苦海)에
너는 무엇을 찾으려 하느냐
눈물로 된 이 세상이
나 죽으면 고만일까
행복 찾는 인생들아
너 찾는 것 서룸


죽음을 예고하는 듯 느껴지는 <사의 찬미> 가사는 누가 썼을까. <한국가요사>에서 박찬호는 '가사는 윤심덕 자신이 붙였다고 한다'고 기술한다.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대중가요>의 선성원도 노랫말이 윤심덕의 '자작시'로 보고 있다. 하지만 <노래1>에 논문을 발표한 이영미는 '작사자는 알 수 없다'고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

<사의 찬미>의 작사자는 누구일까?

윤심덕은 1926년 일본 오사카 닛토레코드에서 동생 윤성덕의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음반을 취입했다. 그런데 본래 <사의 찬미>는 음반 취입이 예정되어 있던 노래가 아니었다. 갑자기 윤심덕이 음반에 이바노비치의 <도나우 강의 잔 물결>에 우리말 가사를 붙인 노래를 넣자고 강력히 요청했다는 것이다. 본래의 리듬은 구슬픈 분위기를 강조하기 위해 느리게 변형되었다고 한다.
 
<사의 찬미> 성공 이후 서울에 지사를 차린 빅터레코드가 제일 먼저 발매한 노래는 1927년에 나온 전수린 작곡, 왕평 작사, 이애리수 노래의 <황성 옛터>였다. 유행가들은 때마침 같은 해 2월 16일부터 전파를 내보내기 시작한 경성라디오방송을 타고 널리 널리 퍼져나갔다. 하지만 경성방송국이 개국할 당시 한일 양국어의 혼합 방송이었다는 사실과, 나라 안에 라디오가 1440대 밖에 없었으며, 1932년 말에도 2만565대뿐이었다는 점을 생각하면, 유행가의 폭발적 확산은 역시 음반에 힘입은 결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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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라디오(부산근대역사관 전시품) ⓒ 부산근대역사관


황성 옛터에 밤이 되니 월색만 고요해
폐허에 설운 회포를 말하져 주노라
아 아 가엽다 이 내 몸은 그 무엇 찾으리
끝없는 꿈의 거리를 헤매어 있노라

성은 허물어져 옛터인데 방초만 푸르리
세상이 허무한 것을 말하여 주노라
아 아 가엽다 나그네 홀로 잠 못 이루어
구슬픈 벌레소리에 말없이 눈물 져요

<사의 찬미>가 이바노비치의 <다뉴브 강의 푸른 물결> 곡에 붙여진 노래인 데 반해 <황성 옛터>는 우리나라 사람이 작사, 작곡한 최초의 유행가였다. 

<황성 옛터>는 태어날 당시 우리 사회를 지배했던 망국의 슬픔을 가사에 담고 있었고, 또 우리 민족 고유의 정서로 흔히 이야기되는 한(恨)이 적절하게 녹아든 곡조를 지닌 노래였다. 당연히 노래는 대중의 마음을 적셨고, 그 후 한참 세월이 흐른 21세기에도 여전히 국민적 사랑을 받는 노래로 남아 있다.

고려 말 회고가와 비슷한 느낌 주는 <황성 옛터>

<황성 옛터>의 가사는 고려말의 유신 회고가(遺臣懷古歌)를 연상하게 해준다.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가 역성혁명을 일으켜 마침내 나라가 망했을 때, 끝까지 고려의 충신으로 남으려는 일부 신하들은 조선 정권에 참여하지 않으면서 노래를 지어 불렀다. 국문학사에서는 그 노래들을 '(유신) 회고가'로 분류한다.

오백년 도읍지를 필마로 돌아드니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다
어즈버 태평연월이 꿈이런가 하노라.

길재가 남긴 회고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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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쟁이가 곱게 물든 개성 민속여관 앞길을 사람들이 걸어가고 있다. ⓒ 평화통일대구시민연대


길재의 시조보다도 더 <황성 옛터>와 엇비슷한 노래는 원천석이 남겼다.

흥망이 유수하니 만월대도 추초(秋草)이로다.
오백 년 왕업이 목적(牧笛)에 부쳤으니
석양에 지나는 객이 눈물 겨워하노라

'황성 옛터'는 어디일까? 경주에 황성공원이 있어 사람들 중에는 <황성 옛터>의 무대를 경주로 여기기도 한다. 신라가 망한 후 삼베옷을 입고 숨어산 마의태자의 전설을 연상한 탓이다.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가 않다. 노래 속의 황성 옛터는 개성을 가리킨다. 즉, 이미 길재나 원천석의 시조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황성 옛터>를 읊조리면서 고려말 유신 회고가와 내용이며 정서적 분위기가 유사하다고 느끼는 것은 '참'인 것이다.

개성공단이 '황성 옛터'처럼 되지는 않아야 할텐데

<황성 옛터>는 '성은 허물어져 옛터인데 방초만 푸르리'라고 노래하고 있다. 남쪽 사람들이 철수한 개성공단은 장차 어찌 될 것인가. 뒷날 어떤 시인이 '황성 옛터는 다시 허물어졌지만 풀들은 예나 다름없이 한결같이 푸르구나' 하고 노래하는 일은 없어야 할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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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성공원의 김유신 동상 <황성 옛터>의 무대를 경주 황성공원으로 아는 이들이 많다. 마의태자를 연상한 결과이지만, 사실과 다르다. 노래 <황성 옛터>의 지리적 무대는 개성이다. ⓒ 정만진


덧붙이는 글 우리나라 대중가요의 역사를 잘 설명해주고 있는 책 두 권을 소개합니다. 박찬호 저 <한국가요사> 1권(미지북스), 선성원 저 <우리가 정말 알아야 할 우리 대중가요>(현암사)입니다. 이 기사는 두 권의 책과, 실천문학사가 펴낸 무크지 <노래1>을 참조하여 썼습니다.
#황성옛터 #사의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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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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