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요 <산토끼>의 탄생 일화, 뜻밖이네

[노래의 고향 40] 경남 창녕 이방초등학교

등록 2013.07.03 12:28수정 2013.07.03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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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토끼 노래비 뒤로 학교 건물이 보이는 이방초등학교 전경 ⓒ 정만진


1928년 가을, 이일래는 연희전문학교를 졸업한 뒤 경상남도 창녕의 이방 보통학교(현재 이방 초등학교) 교단에 올랐다. 하루는 어린 딸과 함께 학교 뒤 고장산 아래를 산책하고 있었다. 해저물 무렵이었다.

아름다운 노을을 바라보며 한껏 저녁 정취를 즐기던 그는 문득 토끼 한 마리가 산비탈을 뛰어다니는 것을 봤다. '우리는 조국을 잃고 이렇게 얽매여 사는데, 토끼는 저렇듯 자유롭게 산하를 누비며 노니는구나' 하는 생각이 불현듯 이일래의 뇌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런 마음을 이일래는 오선지에 담았다. 제목은 <산토끼>.


산토끼 토끼야 어디로 가느냐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로 가느냐
산고개 고개를 나 혼자 넘어서
토실토실 알밤을 주워서 올 테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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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초등학교 건물 벽에 그려져 있는 악보 ⓒ 정만진


이일래는 스스로 노랫말을 쓰고 곡을 붙인 <산토끼>를 교실에서 아이들에게 가르쳤다. 노래는 순식간에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특히 1938년 10월, 오스트리아 선교회의 지원을 받아 21곡의 자작 동요를 담은 <조선 동요 작곡집>을 펴낸 뒤로는 더욱 빠르게 알려졌다.

1978년 12월 8일, 이방 '국민학교' 교정에 이일래 노래비가 세워졌다. '삼월 하늘 가만히 우러러보며 / 유관순 누나를 생각합니다'로 시작되는 <유관순>의 작곡가 나운영 등 동료·선후배 들이 앞장서서 세운 노래비였다. 물론 노래비에는 '국민 동요' <산토끼>가 새겨졌다.

산토끼가 찾던 '알밤'이 실제 있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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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초등학교 교문으로 들어가는 길목 담장의 산토끼 노래 그림 ⓒ 정만진


이방 초등학교에 찾아가봤다. 교문으로 향하는 오른쪽 왼쪽 집의 담장에도 산토끼의 자취는 뚜렷하다. 한쪽에는 '산토끼 토끼야'를 노래하는 듯한 자세와 입모양을 하고 줄지어 뛰어노는 토끼들의 행렬이 그려져 있고, 다른 한쪽에는 '산토끼 노래비 이방 초등학교'라는 글자가 큼직하게 새겨져 있다. 그 사이를 걸어 교문으로 향한다.


교문에도 이 학교가 <산토끼>를 낳은 곳임을 자랑하는 기념물이 세워져 있다. 우리나라 땅모양의 거석이 하늘로 치솟아 세워져 있고, 돌에는 '대한민국 산토끼 노래학교' 11자가 검게 음각돼 있다. 이방 초등학교 총동창회가 2011년 8월 27일 '산토끼 노래 탄생 83주년 기념, 개교 90주년 기념' 사업으로 세운 기념물이다.

운동장을 복판으로 가로질러 걸으면 운동회 때 아이들이 앉아 응원을 하면서 열광하는 자리인 계단이 보인다. 계단 위로 산토끼 노래비가 서 있다. 노랫말이 새겨진 검은돌에 산토끼가 앞발을 얹고 건너편 둥근돌을 바라보고 있는 형국이다. 둥근돌은 아마도 노랫말 속의 '알밤'을 상징하지 않나 여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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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초등학교의 이일래 선생 흉상 ⓒ 정만진


노래비에서 조금 왼쪽으로 이일래 선생의 흉상이 보인다. 상반신 조각인데, 둘레는 역시 토끼들이 에워싸고 뛰놀고 있다. 선생의 흉상은 2007년 8월 26일 이방초등학교 총동창회가 세웠다. 나는 잠깐 선생의 흉상 앞에서 묵념을 한다.

흉상에서 다시 왼쪽으로 가면 토끼장이 있다. 이곳은 한참 철망 둘레에 서서 지켜보노라면 어른 토끼와 아기 토끼들이 어우러져 노는 인상적인 광경을 맛볼 수 있는 지점이지만, 그러나 그늘을 좋아하는 토끼의 속성 때문에 좀처럼 그럴 기회는 주어지지 않는다. 토끼들은 대체로 응달에 숨어 있고, 가끔 물을 마시러 양지로 나올 뿐이다.

나는 이일래 선생이 <산토끼>를 창작한 순간을 떠올려본다. 산토끼 한 마리가 노을이 아름다운 햇살을 받으며 풀밭을 뛰어놀고 있다. 얼마나 자유롭고 밝은 장면인가. 이만하면 선생이 찰나의 음악적 영감을 얻기에 충분하다. 식민지의 억압 속에 갇힌 채 전망 없이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우리 민족의 삶도 저 산토끼처럼 환하고 분방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토끼장 앞에 서서 토끼들이 몰려나오기를 기다리면서 이일래 선생을 생각하다가 문득 <산토끼> 노래를 흥얼거려 본다. 사람이 '산토끼 토끼야 어디로 가느냐? 깡충깡충 뛰면서 어디로 가느냐?' 하고 물으니 산토끼가 '산고개 고개를 나 혼자 넘어서 토실토실 알밤을 주워서 올 테야'라고 답하는 듯하다.
  
나는 문득 노랫말에서 '전망'의 문제를 본다. 산토끼에게는 전망이 있다. 식민지 우리 민족의 일상은 전망 흐린 암울 그 자체였지만, 산토끼에게는 저 고개를 넘어가면 '알밤'이 있다는 전망이 밝았다. 그래서 이일래는 산토끼가 부러웠고, 그 또한 전망을 마음 속에 품고 있었으므로 <산토끼>를 지었다.   

동요 한 구절에서 청소년 문제를 떠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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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초등학교 토끼장의 토끼. 사진 왼쪽에 희미하게 연두색 철망이 보인다. ⓒ 정만진


하지만 지금 우리나라 사람들에게 전망이 있는가? 없는 듯하다. 이는 자살률이 증명한다. 2013년 6월 20일에 발표된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에서는 1년에 1만5906명이 자살한다. 하루에 44명꼴이다. 이는 OECD 가입국들의 하루 평균 12.8명에 비해 3.4배나 되는 숫자로, 우리나라가 8년 연속 자살률 세계 1위국임을 잘 증언해준다.

우리나라는 교통사고 사망자가 많기로도 세계 1위이다. 해마다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이 5천229명에 이른다. 그런데 자살자는 1만5906명이나 돼 교통사고 사망자의 3배나 된다. 정말 엄청난 숫자다. 숫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는지 극명하게 말해준다.

특히 청소년 사망 원인의 1위가 자살이라는 사실은 우리를 심각하게 만든다. 교통사고 사망자의 1.7배, 익사자의 16.3배나 된다. 여름철마다 물에 빠져 죽는 아이가 생겨날 때 사람들은 참으로 안타깝게 탄식을 해왔다. 그런데 익사 청소년보다 자살 청소년이 16.3배나 많다.

올해 5월 2일 통계청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청소년의 12.1%가 자살 충동을 느낀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각종 언론이나 학자들의 통계는 이보다 훨씬 수치가 높다. <한겨레>는 2012년 9월 24일 '청소년의 25.8%가 자살 충동을 느낀 바 있다'고 보도했다. 그런가 하면, 서울시 여성가족재단은 40%라고 했다. 일부 논문은 70%에 이른다고 밝힌 사례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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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자가용 뒷유리에 '미래의 판검사가 타고 있어요' 라고 쓰여 있다. 이런 사회를 살아가야 하니 우리나라 청소년들은 스스로 '전망'이 없다고 느낄 수밖에 없다. ⓒ 정만진


청소년 자살의 원인을 살펴보면 성적 비관 자살이 39.2%, 가정 불화 비관이 16.9%, 경제적 어려움 16.7%, 고독과 외로움 12.5%로 나온다. 즉, 청소년 자살은 육체적 정신적 질환 때문이 아니라 스트레스와 촉발 사건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다. 그것이 바로 청소년 자살의 특징이다. 성적 부진·가정 불화·왕따·폭행·이별 등이 청소년 자살의 주요 원인이다.

이는 노인 자살에 비해 청소년 자살이 오히려 예방 가능성이 훨씬 높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어른들이 우리 아이들의 마음에 자살 충동이 일어나는 일이 없도록 신경을 쓰고 관심을 기울이면 충분히 예방할 수 있다는 말이다.

게다가 노인들은 4명이 자살을 시도해 1명이 실제 사망에 이른다. 그러나 청소년은 200명∼400명이 자살을 시도해 1명이 사망에 이른다. 청소년 자살은 시도율은 높지만 사망률은 낮다는 특징을 보여준다. 즉, 청소년들은 실제로 죽기를 결심해 자살 시도를 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 주세요'라는 신호로 그 행위를 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에게 전망을 보여줘야 하지 않나 생각한다. 무턱대고 '잘 될 거야'라는 식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지원과 관심을 보여줘야 한다. 저 고개를 넘어가면 '알밤'이 있다는 믿음이 있기에 산토끼는 '혼자' 산을 넘는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은 "아무도 없고 나는 '혼자'"라는 절망감에 빠져 허우적대고 있다.

아이들이 컴퓨터 게임 등에 빠져 오락가락하는 대신 <산토끼> 같은 노래를 부르면서 운동장에서 신나게 뛰어놀 수 있는 나라를 만드는 일이 시급하다. 고민이 있어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는 청소년이 22%나 되는 나라, 아버지에게 3.2%, 스승에게 1.3%만 말한다는 나라 대한민국, 우리 어른들은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숨어야 마땅할 것이다.
#이일래 #이방초등학교 #산토끼 #자살 #청소년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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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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