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크스보다 먼저 "종업원 사랑" 외친 '명품' 연필회사

[기획-독일을가다③] 독일 최초 노동자 복지 설계한 파버카스텔의 '사람 중심 경영'

등록 2013.10.31 14:43수정 2013.12.13 1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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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가 독일을 찾았습니다. 왜 독일이냐구요? 우선 우리와 독일은 비슷한점이 많습니다. 2차 대전후 분단국가였고, '라인강'과 '한강'의 기적으로 경제성장을 이뤘던 것도 그렇습니다. 게다가 나라 크기도 비슷하고, 천연자원이 별로 없이 인적자원에 의존하고 수출국가라는 점까지. 하지만 최근 10년사이 한국과 독일은 전혀 달리 가고 있습니다. 한국은 비정규직을 포함한 노사갈등은 여전하고, 계층간 양극화는 더욱 심해지면서 국민들의 사회경제적 민주화 요구가 거셉니다. 독일은 세계 경제위기속에서 지속적인 성장과 복지국가를 유지해가고 있습니다. 독일모델을 세계가 주목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한때 '유럽의 병자'였던 독일이 어떻게 '유럽의 강자'으로 부활했을까요. <오마이뉴스>는 궁금했습니다. 10여일동안 독일 곳곳을 다녔습니다. 거대 자동차회사 노동자부터 기업인, 교수, 일반시민 등 다양한 사람들과의 이야기를 나눴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을 해봤습니다. [편집자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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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중남부의 뉘른베르크시 인근에 위치한 연필회사 파버카스텔. 1761년에 설립돼 250년 역사를 갖고있다. 사진은 파버카스텔 공장 모습. ⓒ 김종철


"독일에서도 여성의 일자리와 육아를 양립하는 문제에 관심이 많죠. 그래서 이번에 '탁아소'를 새로 만들기로 했어요."

산드라 수퍼씨는 물끄러미 기자를 쳐다봤다. 그는 독일 연필회사 '파버카스텔'의 홍보총괄을 맡고있는 임원이다. 이 회사는 올해로 회사가 만들어진 지 252년이나 됐다. 그만큼 회사에 대한 자부심도 대단했다. 지난달 11일 낮 이 회사 카페테리아에서 점심을 먹던 참이었다.

그에게 독일 총선 이슈로 떠오른 양육 수당 지급 논란에 대해 물었다. 앙겔라 메르켈의 여당에선 '집에서 아이를 기르는 가정에 직접 보조금을 지급하자'고 했고, 사회민주당 등 야당에선 '부족한 보육시설을 확충해야한다', '(여당의 공약은) 여성의 사회적 진출을 막으려는 것'이라고 반발했었다.

파버카스텔은 직접 보육시설을 짓기로 나선 것이다. 수퍼씨에 따르면, 이 회사는 슈타인시(市)와 함께 올해 10월 만 1~3세 영·유아를 대상으로 한 탁아소를 열기로 했다. 파버카스텔은 이 탁아소에 약 50만 유로 정도를 투자한다. 우리 돈으로 7억 원이 넘는 큰돈이다. 선거 결과와 상관없이 회사가 자치정부와 함께 '부족한 보육시설'을 해결하기 위해 직접 나선 셈이다.

160년 전, 직원들 위해 '독일 최초 유치원' 만든 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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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버카스텔은 이미 19세기에 종업원 복지를 위한 각종 투자를 진행했다. 직원 가족을 위한 유치원 뿐아니라 각종 연금제도 역시 도입했다. 연필 공정에서 일하고 있는 종업원들 모습. ⓒ 김종철


이 회사 인적자원부의 랄프 히엔씨는 이를 두고 "파버카스텔의 전통에 따른 것"이라고 설명했다. 실제로 파버카스텔은 160년 전에 사내 노동자를 위해 독일 최초의 유치원을 설립한 회사다. 이뿐만이 아니다. 1840년 경 이미 사내 노동자를 위한 복지 체계를 도입했다. "노동을 착취하는 자본주의의 몰락"을 경고했던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보다 20년 정도 앞서서 이뤄진 일이기도 하다.

시대를 뛰어넘는 '진보적 경영'이다. 더군다나 그런 회사가 250년 넘게 장수하고 있다. 그리고 지금은 세계 문구업계의 강자라는 사실도 의미심장하다. 도대체 비결이 뭘까. 지난달 11일 독일 뉘를베르크 인근 소도시 슈타인시에 위치한 파버카스텔을 직접 찾았다.

그동안 화창하던 날씨가 변덕을 부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먹구름이 잔뜩 끼더니 한방울씩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100년이 훨씬 넘은 고풍스러운 성곽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우리 속담엔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고 했다. 기업은 말할 것도 없다.  한 기업이 250년을 넘어 유지된다는 건 결코 쉽지 않은 일이다.

한국은행이 지난 3월 발표한 보고서를 보면, 창사 200년을 넘은 기업은 전 세계 57개국 중 모두 7212곳에 불과하다. 한국은 단 한 곳도 없다. 국내 기업 중 창사 100년을 넘긴 '장수 기업'은 6곳 뿐이다. 경영환경이 급변하면서 기업의 수명은 더욱 줄고 있다. 미국 경제전문지 <포브스>는 지난 2011년 "글로벌 100대 기업의 평균 수명은 약 30년에 불과하며, 이들 기업이 70년간 존속할 확률은 18%에 불과하다"고 짚었다.

'사람 중심 경영', 세계 최초 공공보험보다 39년 앞선 사내 건강보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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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버카스텔 홍보총괄임원인 산드라 수퍼씨가 이곳 공장에서 직접 제조한 연필을 선보이고 있다. 파버카스텔은 전세계적으로 매년 20억개가 넘는 연필을 생산하면서 세계 1위를 달리고 있다. ⓒ 김종철


그런데 여기 파버카스텔이라는 연필회사가 있다. 1761년 창사 이래 8대째 경영을 이어가면서도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 가장 큰 이유는 '혁신'이다. 세계 최초로 육각형 연필을 만들었고, 연필심의 경도에 따라 2H, H, HB, 4B로 구분하는 연필의 '표준'을 세운 것이 대표적인 예다. 현재 파버카스텔은 중국 업체의 저가 공세에도 세계 1위 자리를 놓치지 않고 있다.

또 다른 이유도 이에 못지않다. 바로 앞서 언급한 '탁아소'가 대표적인 예다. 파버카스텔은 기업의 지속가능한 발전에 필수적인 경영전략으로 인식되고 있는 '기업의 사회적 책임(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을 19세기부터 실천한 곳이다. 물론 '사람 중심 경영'이 그 중심이었다.   

1844년 이 회사는 사내 건강 보험 제도를 도입했다. 프로이센(옛 독일)의 '철혈재상' 비스마르크가 세계 최초로 노동자를 대상으로 한 공공복지제도인 '질병보험'을 도입한 것은 그로부터 39년 뒤인 1883년이었다. 1849년 직원들을 위한 저축은행과 연금제까지 도입했다. 직원 사택과 직원 자녀를 위한 보육·교육 재정지원제도 역시 마련했다. 독일 최초의 기업 부설 유치원이 파버카스텔에 의해 2년 뒤에 설립된 것은 당연했다.

이처럼 파버카스텔이 시대를 훨씬 앞설 수 있었던 것은 당대의 경영자 덕분이다. 랄프 히엔씨는 "4대 경영자인 로타르 폰 파버는 '노동자가 행복해야, 질 좋은 필기구가 나온다'는 철학이 있었다"고 귀띔했다. 그는 "로타르 폰 파버는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노동자에 대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며 "그는 회사 경영을 승계한 뒤, 노동자의 일자리 환경이나 건강 등에 안전성을 보장하려 했고 작업 환경부터 개선했다"고 덧붙였다.

"일하는 노동자가 행복해야 질좋은 필기구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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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버카스텔은 전세계 15개 공장에서 7000여명이 일하고있다. 이어 독일에서만 900명 이상을 고용하면서 고가의 핵심제품을 만들고 있다. 마이스터의 손끝에서 나오는 기술력을 놓치지 않고 있다. 사진은 직접 눈으로 연필의 품질 검사를 하고 있는 여성 직원. 그 역시 품질검사에선 전문가다. ⓒ 김종철


로타르 폰 파버가 시작한 노동자 중심의 전통은 대를 이어 계승되고 있다. 1911년 파버카스텔은 창사 150주년을 맞이해 전 직원을 대상으로 사진을 찍었다. 사진이 부자나 귀족의 전유물이던 시절, 파버카스텔은 이 사진을 모든 직원들에게 나눠줬다.

지난 2009년 세계 금융위기가 닥쳤을 때도 파버카스텔은 직원을 포기하지 않았다. 랄프 히엔씨는 "과거에도 큰 경제위기 때는 어쩔 수 없이 해고가 있었지만 현 상황에서는 해고나 본인이 자진해 퇴직하는 경우가 1% 미만"이라고 말했다.

그는 또 "파버카스텔은 전 세계 직원들에게 '공정한 임금'을 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면서 "다른 독일의 중소기업보다 10% 정도 높은 임금인데 이는 경영진과 회사의 노동자평의회와 협의에 따라 결정된 것이다, 성과급도 따로 나간다"고 덧붙였다.

이같은 전통 덕에 회사에 대한 직원들의 만족도는 높을 수밖에 없다. 근속년수가 30~40년에 달하는가 하면, 50년 동안 근속한 이도 있다. 랄프 히엔씨는 "다른 독일기업과 마찬가지로 65~67세 사이에 정년퇴직하게 되는데 퇴직 이후에도 이들과 관계를 계속 이어가고 있다"면서 "매년 퇴직자 중 한 분을 초청해 '홈커밍데이' 같은 파티를 연다"고 말했다.

입사 5개월 차의 신입사원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 매니저로 채용돼 현재 업무 인수인계를 받고 있는 조엘 프로만씨의 이야기다. 그는 <오마이뉴스> 취재진과의 인터뷰 내내 회사에 대한 자부심을 감추지 않았다.

"입사한 지 5개월 됐는데 (지금까지도) 선임자로부터 노하우를 전수받고 있다. 곧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6개국을 돌아다닐 예정이다. 이처럼 업무 인수인계에 투자하는 곳은 독일에서도 흔치 않다. 파버카스텔은 인재영입과 검증에 상당히 공을 들이는 것 같다. 한 인간의 다양한 면을 본다고 할까? 나같은 경우, CEO와 오전 내내 함께 시간을 보내며 검증 받았다. 회사의 철학에 맞는 인재인지를 살펴본 것이다."

250년 넘게 이어져온 경영철학... "나는 건강한 돈을 원한다"

파버카스텔의 '사람 중심 경영'은 사회적 책임 경영으로도 이어지고 있다. 파버카스텔은 1980년대 중반 브라질에 100㎢ 넓이의 소나무 숲을 조성했다. 연간 20억 자루의 연필을 생산하는 회사로서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기 위한 조치를 선제적으로 취한 셈이다. 그러나 이는 단순한 자원 확보 목적은 아니다. 한 그루의 소나무 묘목을 목재로 쓰기 위해서는 15~20년 정도 기다려야 한다. 게다가 스스로 조성한 숲의 30%에 달하는 산림은 자연 상태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슈타인성과 공장을 안내한 지그프리드 블로쉐씨는 "브라질에 조성한 숲에는 멸종위기종 다수가 서식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고 소개했다. 실제로 파버카스텔 숲은 총 55종의 포유류, 232종의 조류, 55종의 파충류 및 양서류의 서식지로 자리 잡았다. 또 과학자와 환경전문가들로 구성된 국제산림인증(FSC)을 받기도 했다.

이 회사는 '착한 경영'에 대해서도 선구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파버카스텔은 2000년 3월 독일 금속노조와 함께 사회 협약을 맺었다. 파버카스텔의 전 세계 15개 지사를 포함해 국제 노동기구(ILO)가 권고하는 고용과 노동조건을 자발적으로 수용하기로 한 것이 이 협약의 골자다. 아동 노동 금지, 위생적이고 안전한 노동환경 보장, 국적·성별·종교·인종을 불문하는 평등한 기회와 대우 등의 내용 등이 담겨 있다.

각국마다 다른 노동조건을 당연시하는 다른 기업과 달리, 스스로 이익을 줄일 수도 있는 결정을 내린 셈이다. 파버카스텔은 2003년 7월 '유엔글로벌콤팩트(UN Global Compact. 이하 UNGC)'에도 가입했다. 2000년 발족한 UNGC는 세계의 지속균형발전을 위해 기업활동에 있어 친인권·친환경·노동 차별반대·반(反)부패 등 10대 원칙 준수를 핵심으로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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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버카스텔은 종업원 복지 뿐 아니라 창의적인 제품 개발을 위해 매출액의 20% 가까이를 연구개발에 투자하고 있다. 일반적인 기업보다 2배이상 높은 수준이다. 사진은 공장에서 갓 만들어진 파버카스텔 연필들. ⓒ 김종철


이에 대해 8대 경영자인 안톤 볼프강 백작 역시 '전통'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250주년 기념 책자에서 "제 고조부이신 로타르 폰 파버 백작은 보기 드물게 사회에 대한 의식이 강한 기업가였다"며 "뒤를 잇는 세대들은 여전히 그의 모범을 따르는 것을 자신의 의무로 여기고 있다"고 고백했다. 무엇보다 그는 "사업을 하는 사람으로서, 저는 두 가지 측면 모두가 건강한 돈을 원한다"면서 "사회적인 책임감·믿음·정직·공정한 경쟁과 같은 건강한 가치에 기반함과 동시에, 건강한 이윤추구를 하겠다는 것이다"고 강조했다.

파버카스텔의 아태·중동·아프리카 담당 울프 홀스만씨는 이를 "가족기업이기에 가능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단기적인 매출 이익에 연연하기 보다는 장기적 목표를 갖고 지속적으로 추진 가능한 것이 가족기업의 성공 비결"이라고 했다.

중소·중견기업뿐만 아니라 대다수 대기업이 가족소유기업임에도 사회적 존경을 받지 못하는 한국의 현실과 상당히 대비되는 대목이다. 무엇보다 갈수록 기업수명이 짧아지고 있는 한국의 현실속에 강산이 25번 바뀔 동안 굳건한 위치를 지키고 있는 파버카스텔의 경영 전통은 분명 곱씹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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